통의동 골목길에서의 기록들
"저희 결혼식에 주례 좀 봐주세요."
통의동에 터를 잡고 2년 넘게 '김PD의 통의동 스토리'라는 까페 겸 와인바를 운영하면서
참 많은 사람들과 인연을 맺었다. 손님으로 들와서 후배가 되고 선배가 되고
또 어떤 사람은 친구가 되고 인생의 가르침을 주는 스승이 되기도 했다.
'손님 접대 제대로 하라'며 두 번 다시 보지 않을 사람처럼 자리를 뜬 경우도 있다.
우연이든 필연이든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공간에서는 일이 없을 수가 없다.
예상치 못한 다양한 에피소드들이 생겨났다 사라진다. 그건 마치 봄날 산등성이에 피어오르기
시작하는 각양각색의 꽃봉오리들처럼 울긋불긋 알록달록 거린다.
하지만 대부분 그런 일들은 예상의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심지어 가게 안에서
목소리를 높여 싸움이 일어나는 일까지도 미리 예상이 가능하다. 잘 모르던 남녀가 가게 안에서
만나 친구가 되고 연인으로 발전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그것도 예측 범위 내에 있다.
가게 주인이 그런 걸 미리 예측하고 분위기를 만들어서 손님들에게 만족감을 주는 것도
어찌 보면 주인의 능력일 것이다.
그런데 며칠 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 하나 일어났다. 오늘 하려고 하는 얘기,
바로 내가 주례를 맡게 된 일이다.
평소 한 달에 두어 번 정도는 꼬박꼬박 얼굴 도장을 찍던 H가 있었다.
편의상 그녀가 결혼을 결심하고 주례를 요청하러 같이 온 남자는 B라고 하자.
이미 두 사람이 결혼을 한다는 말을 들었던 터라서 그날도 가게 안에 두 사람이 나란히 왔을 때,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그래, 결혼식 준비는 잘 되어가고 있지?'하고 물었다.
그러자 H가 대답 대신 가방에서 주섬주섬 뭔가를 꺼냈다. 청첩장이었다. 연한 우윳빛이 감도는
딱딱한 표지가 세 겹으로 둘러싸여 있고 표면에는 약간 반짝거리는 효과도 들어가 있는 게
예사 것들보다는 좀 더 고상해 보이는 그런 청첩장이었다.
가방에서 꺼내 손에 든 청첩장은 분명 나를 주려고 꺼낸 게 맞을 텐데,
H는 줄 생각을 안 하고 뭔가 우물쭈물한 눈치다. 게다가 화장실 간다고 잠시 자리를 비운
예비 신랑 B는 돌아올 줄 모르고...
"그거 나 안 줘?"
"저기요..5분 있다가 드릴게요..."
"5분 있다가? 왜?"
평소 후배처럼 편하게 대했기 때문에 청첩장 하나도 좀 재밌게 건네주려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따라 여러 테이블에 손님들이 들어와 있어서 H와의 대화는 잠시 끊어질 수밖에 없었다.
손님들을 위해서 와인을 오픈하고 음식과 안주를 서빙하고 다시 주방으로 돌아왔더니
H와 B가 나란히 앉아서 공손하게 청첩장을 내밀었다. 그러더니 불쑥한다는 말이, 바로.
"저희 결혼식에 주례 좀 봐주세요."
살면서 누구나 예상치 못한 일을 경험한다.
그리고 어차피 그런 일들을 경험하면서 성장하고 발전하는 게 인생이다.
그런데 이번 일은 생각보다 충격파가 좀 크게 다가왔다. 다른 일도 아니고 '주례'라니...!
일단 그들의 주례 요청을 받고 처음 머릿속에 든 생각은 '내가 나이가 몇이지?'하는 생각이었다.
그건 보통 결혼식 주례가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얼굴에 주름살 자글자글할 정도로 경륜 있는
사람들이 하는 것이란 통념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 기준에서 보자면, 올해 쉰두 살이 된
나는 햇병아리가 분명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아! 내가 어느새 주례 요청을 받을 나이가 됐구나'하는
일종의 푸념 같은 것도 마음속에 느껴져 왔다.
"이거 몰래 카메라 찍고 있는 거 아니지?"
그들이 건넨 청첩장과 주례 요청을 받으며 내 입에서 제일 처음 튀어나왔던 말은 그거였다.
누군가 날 놀리려고 몰래 카메라를 찍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만큼 그들이 부탁한 주례 요청은 예상의 범위를 훨씬 벗어나는 것이었다.
그제야 H가 왜 '5분 후에 청첩장을 주겠다'면서 우물쭈물했는지 이해가 갔다.
이제 반대로 우물쭈물하게 된 건 나였다.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하나... 못하겠다고 거절하는 건 새로운 인생을 살아나가려 하는 그들에 대한
예의가 아닐 테고... 그렇다고 불쑥하겠다고 하는 것도 나에게는 왠지 남의 옷을 입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일인데...'
속으로 이런 생각들이 오고 갔다. 무엇보다도 그 순간 나를 가장 혼란하게 만든 것은
'내가 새로운 인생을 함께 시작하려는 두 사람을 위해서 진정 축복해 줄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이었다. 그건 나를 되돌아보게 만드는 질문이었다.
누구나 사랑하고 이별하고, 기뻐하고 슬퍼하면서 또 다른 누군가와 인연을 맺는다. 나 역시도 그랬다.
만남의 기쁨이 있으면 언젠가는 이별의 고통도 있는 법이고, 그래도 언제나 사람에게 만큼은 순수하자는
다짐을 하면서 살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어가면서 그런 순수함보다는
이기적인 욕심이 앞섰다. 나만 알고 나만 생각하는 그런 이기심 하나 때문에 사람을 아프게 하고
남에게 상처를 주기도 했다. 적어도 사랑과 결혼에 있어서 만큼은 자랑할 것이 없는 인생이었다.
'그렇다면 거절하는 것이 옳은 것이 아닐까?', 머릿속에서 수없이 많은 생각들이 오고 갔다.
청첩장을 받아 들고 우물쭈물했던 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런데 동시에 그 순간 마음 한구석에서
또 하나의 감정이 불쑥 튀어올랐다. 그건 전혀 예상치 못했던 감정이었다. 바로 '고맙다'는 느낌.
결혼식 주례를 요청받고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왜 내 마음속에서 그런 느낌이 생겨났는지 난 지금도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 어쨌거나 그날 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내 안의 느낌, 고마움, 그게 바로
나를 움직였다.
요즘엔 주례가 없이 결혼식이 이뤄지는 게 남다른 일이 아니다. 허례허식을 줄이고 간소화된 결혼식을
올리자는 건 세상이 그만큼 합리적으로 변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형식보다 내용을 중요시하는
젊은층들에겐 말 그대로 자신들만의 즐겁고 의미 있는 결혼식을 올리자는 게 유행이 되고 있다.
분명 H나 B 역시도 그런 유행 정도는 잘 알고 있는 젊은이들일 텐데...
게다가 학교 은사님이나 유명인들에게 결혼식 주례를 부탁하는 게 어찌 보면 더 나을 수 있는데
굳이 통의동 골목길까지 와서 나에게 결혼식 주례를 부탁해야 하는 특별한 이유도 없다.
그들에게 뭐 하나 잘 해준 것도 사실 없다. 싫은 소리나 많이 안 했으면 그나마 다행이다.
그런 그들이 나를 찾아와 자신들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한 순간이 될 결혼식의 주례를 요청했다.
아무것도 아닌 나에게....
고 김수환 추기경은 1996년 배드민턴으로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된 방수현 선수의 결혼식 미사에서
"사랑이 혼인의 약속을 지켜주지 않고, 혼인의 약속이 사랑을 지켜준다"는 유명한 결혼식 주례를 남겼다.
쉽게 변하고 가볍게 살아가는 것이 유행이 되고 있는 결혼과 사랑에 '믿음'이라는 형식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깨닫게 해 준 말씀이었다.
합리적 이성과 효율적인 가치들이 중요시되면서 때론 형식이 굴레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래서 비합리적인
형식을 벗어나서 자유로운 생활을 추구하는 모던한 삶의 미덕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진지하고 엄숙한
형식이 오히려 내용을 규정하기도 한다. 형식의 그런 긍정적인 측면이 무시되면서 세상살이가 너무 가벼워지고
무상해지는 것은 아닐까. 예의 갖춘 격식과 매너가 사람 사이를 보다 품위 있게 만들고 그런 형식은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하루를 더욱 가치롭고 풍요롭게 만든다.
독립운동가 김구 선생은 모처럼 맡은 결혼식 주례식에서 "너를 보니 네 아비 생각이 난다. 부디 잘 살아라."라는 사상 초유의 짧디 짧은 주례사를 남겼다는 기록도 있다. 누군가 시계를 보니 5초도 안 걸렸다는 믿기지 않는 얘기도 있다. 비록 그렇게 짧은 주례사였지만, 그 말을 들은 신랑 신부들은 눈이 부을 정도로 펑펑 울었을 것이다. 그건 그 안에 담겨 있는 두 사람이 함께 간직하고 있는 기억의 무게 때문일 것이다. 조국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바친 독립투사들의 삶, 그리고 그들이 남긴 유산, 비록 식장에 육신으로 서있지는 하지 못하지만 영혼으로 자식들의 결혼식을 지켜보는 부모의 마음, 그걸 김구는 단 한 마디로 대변했다.
김구의 주례사는 그래서 그 짧은 형식 속에 거친 파도를 헤치고 행복의 나라로 닻을 올리려는 두 젊은이에 대한 애틋함과 대견함이 묻어 있다. 그럴 때도 역시 형식은 강력하다. 형식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주 질기고 강한 끈이 그들을 묶고 있다.
그렇다면 나는 그들과 어떤 끈으로 묶여 있는 것일까.
어떤 형식의 그릇이 그들과 나를 한 곳에 모이게 한 것일까.
지금부터 결혼식까지는 남은 한 달 간의 시간 동안 내가 진짜 찾아야 하는 물음의 답이다.
그리고 다시 한번 이런 자리를 빌어서 그들에게 말하고 싶다.
'나에게 이런 신선한 물음을 갖게 해줘서 너무 고맙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나에게 당신들의 신성한 자리를 내줘서 고맙습니다.'
2016년 2월 13일
통의동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