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애 첫 주례사

'낯선 경험은 두뇌를 단련시킨다.'

by 김덕영

'내 생애 첫 주례사'

낯선 경험은 두뇌를 단련시킨다.


2016년 3월 나는 태어나서 처음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려는 한 부부의 주례를 봤다. 그들에게서 청첩장과 주례 요청을 받으면서 시작된 낯선 경험과의 동거는 그렇게 한 달 남짓 계속되었다.


어색하고, 그만두고 싶기도 했고, 무엇보다 내가 주례를 서기에 적합한 사람인가를 놓고 스스로 계속 물음을 던졌다. 주례라는 게 통념상 나이가 어느 정도 든 사람들이 하는 일이다 보니, '이젠 나이가 들었구나', 라는 자아의 울림이 중량감 있게 다가왔다. 사실 나이를 별로 신경 쓰고 살지 않았기에 더욱 그랬는지 모른다.


아무튼 일주일 동안의 주례사 작성,
세 번의 예행 연습까지 하면서 주례를 봤다.


어려웠던 건 정해진 시간이었다. 8분에서 9분 안에 끝날 수 있도록 분량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 원고 분량이 정확해야 했다. 자칫 평생 한 번뿐인 결혼식을 망칠 수도 있을 태니 말이다.


게다가 나빠진 시력 때문에 원고를 적어도 글씨가 안 보인다는 점. 그냥 한꺼번에 확 적어서 쭉 읽고 싶어도 읽을 수 없는 현실이 나를 더욱 안타깝게 만들었다. 그래서 활자를 폰트 20까지 올려서 아주 큰 글씨로 또 한 벌의 여벌 원고를 준비했다.

03.jpeg 첫 주례를 경험하는 나 같은 초자 주례에겐 긴장되고 떨리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주례사도 꼼꼼이 준비했다. 막상 주례 당일엔 한 글자도 제대로 보이진 않았지만...


그렇게 별별 준비를 다하면서 쓴 주례사였다. 그만큼 나에게는 그리 길지 않았지만, 진실하게 나와 만날 수 있는 낯선 시간들이었다. 그리고 난 그 낯선 것들을 통해서 나의 뇌가 더 단단해진 것 같다.


2016년 3월의 봄날, 남산 전망대가 바라보이는 한 아름다운 웨딩홀에서 이뤄진 내 생애 첫 주례사는 이렇게 시작된다.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려는 두 젊은이의 결혼식에 이렇게 많은 내빈 여러분들께서 참석해주셔서 신랑과 신부, 그리고 가족들을 대신해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먼저 결혼식을 진행하기에 앞서, 여러분들께 오늘 주인공인 신랑과 신부에 대해서 간략한 소개를 드리고자 합니다......


....이렇게 멋진 젊은이들이 어느 날 저를 찾아와 결혼식에 주례를 맡아달라고 했을 때, 저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직은 주례를 서기엔 경험과 인격도 부족한 제가 그런 엄숙하고 성스러운 자리에 주례로 설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나보다 더 훌륭하신 분들이 많을 테니, 어서 다른 분을 찾아보라’고 말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거절을 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참 행복했습니다. 누군가의 인생에서 결혼식 주례를 맡는다는 것은 삶에서 큰 영광이기 때문이며, 그걸 부족한 거 많은 저에게 부탁을 했다는 사실이 너무 고마웠습니다.. 일종의 '누군가 나를 알아주고 인정해준다'는 고마움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주례를 거절하면서도 기분이 유쾌했습니다.


그렇게 또 며칠이 흘렀습니다. 두 사람이 어느 날 정색을 하면서 다시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러더니 하얀 봉투로 정성껏 포장을 한 청첩장을 한 장 내밀면서 주례를 봐달라는 부탁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더 이상은 거절한다는 게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오늘 두 사람의 이 성스러운 자리에 서게 된 것입니다.


모든 인생에서 처음은 참 많은 의미가 있습니다. 처음은 낯선 것이기 때문에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익숙한 것들보다는 낯선 것을 통해서 더 발전합니다. 저에게는 아마 이 두 사람의 결혼식에 처음 주례를 봤다는 사실 자체가 어쩌면 평생 잊지 못할 낯선 추억이 될 것입니다. 참 고맙고 그래서 의미 있는 순간입니다. 이 낯선 경험이 저를 더욱 발전시킬 것입니다.


다큐멘터리 프로듀서로 20년을 살아왔습니다. 그 일을 하면서 가장 좋았던 것은 국내는 물론이고 세계 여러 나라, 여러 도시들을 여행할 수 있었던 점입니다. 그러면서 참 많은 사람들을 만났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다큐멘터리 제작을 하면서 저는 틈틈이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힘들기도 하지만 저에게는 가장 보람 있고 재미있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우연히 <뒤늦게 발동걸린 인생들의 이야기>라는 책을 쓰기 시작하면서 인생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 책은 제목 그대로 자신의 인생에서 진정 자기가 원하는 꿈을 찾아 나선 노인들의 이야기입니다.


자신이 진정 하고 싶은 꿈을 이루기 위해서 그들은 70 혹은 80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도전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런 놀라운 노년을 살다 간 인생들을 한 권의 책에 담았습니다. 그 책과 함께 저는 다큐멘터리 프로듀서에서 작가로 또 한 번 인생의 전환점을 살고 있습니다.


저는 두 사람의 결혼식에 주례를 맡게 된 다음날부터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생겼습니다. 도대체 왜 신랑과 신부처럼 유능하고 능력 있는 젊은이들이 왜 저에게 자신들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결혼식 주례를 맡아달라는 부탁을 했을까, 하는 그런 궁금증 말입니다. 누구든 구하려면 좋은 분들을 구할 수 있을 텐데 말이죠.


그러다 전 며칠 전 비로소 그 이유를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제가 쓴 한 권의 책 때문이었습니다. 신랑과 신부는 자신들의 결혼식이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순간이 되기를 원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지금 이 자리에 계신 두 젊은이의 부모님에게 말입니다.


이 세상 모든 부모들처럼 두 젊은이의 부모님들도 평생을 자식들을 위해 헌신하셨던 분들입니다. 자식들을 위해서 뭐든 아낌없이 희생하셨고, 그래서 어느 날 머리가 희끗한 노년의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신랑과 신부의 눈에는 그런 부모님들이 모습이 안쓰럽게 보였던 것 같습니다.


어느 날 신부가 제게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저희는 결혼식에 참석하시는 많은 하객들과 저희 부모님들이 이젠 자식을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들의 행복을 위해서 인생을 살아나갈 수 있는 용기를 얻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입니다.


결혼식의 하객들이 단지 형식적으로 자리를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뭔가 자신들의 행복한 인생을 위해서 다같이 첫걸음을 옮기는 자리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뜻이었죠.


어쩌면 저는 지금 이 자리에 참석한 많은 분들, 특히 신랑과 신부의 부모님들께 신랑과 신부의 마음을 전달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걸 깨닫게 되면서부터 저는 이번 결혼식이 참 각별한 의미로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제가 서 있는 이 자리는 훌륭한 작가가 되려는 꿈을 향해 도전하고 있는 저에게도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해보라'는 힘과 용기를 주는 고마운 자리이기도 합니다.


그건 두 분의 부모님들께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저는 오늘 두 사람을 대신해서 양가 부모님들께 이젠 자식들 걱정 그만 하시고 진정 당신들의 꿈을 향해 다시 한 번 멋진 인생의 도전을 시작하시라고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것이 신랑과 신부가 저를 이 자리에 세운 이유입니다. 참 기특하고 착한 젊은이들이 않나요? 아마 결혼식 때 부모님과 하객들을 위해서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주례를 통해서 대신 전달하는 그런 착한 결혼식은 여러분들도 처음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늘 두 사람의 인생을 건 첫출발이 큰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라 믿습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 모두를 대신해서 두 젊은이가 내딛는 인생의 첫걸음 위에 행운이 늘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 여러분들이 늘 그들의 앞길을 올바르게 인도해주리라 믿습니다. ‘인생’이라는 길을 가는 두 사람의 발길에 꽃을 뿌려주면서 말입니다.


인생은 늘 길에 비유되곤 합니다. 끝으로 저는 얼마 전에 읽었던 한 책에 실려 있던 아름다운 구절을 인용하면서 주례사를 마치려고 합니다. 그건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에 얽힌 이야기입니다. 마침 신랑과 신부도 스페인으로 신혼여행을 떠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천 년이 넘게 이어지고 있는 스페인 산티아고의 순례길, 그 길은 무려 800킬로미터에 달할 정도로 힘들고 어려운 고행의 길입니다. 그 길을 떠나려는 한 수녀님을 위해서 친구가 써줬다는 축전의 메시지를 여러분과 함께 나누면서 저의 주례사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이 자리에 선 신랑과 신부를 위해서 제가 몇 구절 의미를 다듬었으니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대들의 발길이 닿는 곳마다 꽃이 피어나기를.

앞서 간 발길들이 그대들의 걸음걸음에 축복이 되기를.


그대 영혼의 날씨가 늘 따듯하기를.


그대들의 기도가 다른 순례자들을 위해 뒤덮인 꽃과 같기를.


그대들의 마음이 하찮은 일들 속에서도 의미를 찾기를


그대들을 위해 기도하는 친구들이 내내 그대들을 안고 가기를.


그대들을 둘러싼 삶의 동심원이 길 가는 내내 그대들을 에워싸기를


깨어진 세상이 그대들의 어깨 위에서 위로받을 수 있기를.


그대들이 지고 가는 영혼의 배낭에 그대들의 기쁨과 슬픔도 함께 짊어지고 가기를.


지금 이 순간 그대들이 받고 있는 온 세상 모든 이들의 축복을 기억하기를...”


감사합니다.


2016년 3월 12일

주례 김덕영 씀.


02.jpeg 결국 준비한 장문의 주례사 대신 솔직한 나의 심정을 전달했다. 낯선 경험이었지만 그런 경험을 통해 일상이 즐거울 수 있다면, 발전은 계속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글: 김덕영 (다큐멘터리 PD / <뒤늦게 발동걸린 인생들의 이야기> 저자 / 서촌에 위치한 복합문화공간 '김PD의 통의동 스토리' 대표)



<뒤늦게 발동걸린 인생들의 이야기>, 김덕영 지음, 다큐스토리 미디어


* 현재 신간 <뒤늦게 발동걸린 인생 2> 집필과 <한국전쟁, 동유럽으로 보내진 북한 전쟁고아들>에 관한 논픽션을 준비 중에 있습니다. 글이 마음에 드신 분들은 신간 출간과 프로젝트 펀딩에 힘을 보태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후원을 해주시는 분들에게는 저자 사인이 담긴 신간을 배송해드립니다.


스토리 펀딩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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