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통의동 다이어리 (106)
어제 점심 때 식사를 하러 동네 식당에 갔다. 오후 1시를 훌쩍 넘긴 시각인데도 불구하고 왠일인지 자리가 꽉 차있었다. 다행히 빈자리 하나가 보이길래 서둘러 자리를 잡고 앉아 주문을 했다.
'오징어 볶음 하고 청국장 주세요'
요즘엔 동네에서 이런 메뉴를 시켜 먹을 수 있는 곳이 그리 많지 않다. 한 마디로 '집밥'이 먹고 싶을 때면 어김없이 들르는 곳이 바로 오늘의 주인공 청하식당이다. 서울 시내 한복판임에도 불구하고 서촌에는 지리적으로 경복궁과 가까이 있다 보니 조금은 예스러운 풍류가 흐른다. 오래된 한옥들, 조선시대 지도에 등장하는 옛 길들이 그대로 모습을 보존하고 있는 동네다.
이런 서촌에도 젠트리피케이션의 여파로 임대료 상승이 이어지면서 동네를 떠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자본과 상업의 논리일 수 있겠지만 옛 것에 담긴 숨은 이야기들까지 어디론가 쓸려버리는 것 같아서 조금 안타깝기도 하다.
하지만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상관하지 않고 묵묵하게 자기 자리를 지키는 곳들, 청하식당 같은 곳이 바로 그런 곳이다. 누군가는 그런 곳을 추억을 사고 파는 '메모리 비즈니스'의 장소들이라 부르기도 했다. 물건이 아니라 추억과 시간을 팔 수 있다는 자체가 나에겐 너무나 인간적으로 느껴진다. 통의동, 서촌이 바로 그런 곳이다.
청하식당이 경복궁 옆 서촌에 첫 둥지를 튼 건 지금으로부터 42년 전. 그러니까 1974년의 일이다. 자료를 좀 찾아봤더니 1974년에는 참 기억에 남을 만한 일들이 참 많았던 것 같다.
우선 1973년 터진 중동 전쟁의 여파로 석유값이 치솟았고 박정희 정권은 긴급조치 3호를 발령했다. 서슬 퍼런 공안 정국이 계속되었고 그해 8월 15일에는 기억할 만한 사건이 두 개가 일어난다. 지하철 1호선 개통식과 재일교포 문세광이 광복절 경축식에 참석했던 박정희를 암살하려다 육영수 여사를 숨지게 한 사건이다.
그렇게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경복궁 서촌에 자리를 잡은 우리의 '청하식당'. 처음에는 그냥 작은 공간을 빌려서 백반집으로 시작했다. 그 시절 우리네 부모 세대들이 다 그렇듯이 주인 되시는 유복희 여사도 누구보다 부지런했다. 서촌에서 따듯한 국물에 아침밥을 먹을 수 있는 유일한 곳, 청하식당은 바로 그런 곳이었다.
지금에야 서촌 하면 떠오르는 것이 세종마을 먹거리나 누상동, 누하동, 옥인동으로 연결되는 유명 관광(?) 벨트라고 할 수 있지만, 사실 예전 서촌의 핵심은 효자동과 통의동 쪽이었다.
자하문로 중심으로 놓고 보자면 왼쪽이 현재의 관광(?)벨트, 오른쪽이 바로 서촌의 오리지널리티가 있는 곳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효자동과 통의동 쪽에는 청와대와 정부청사 별관 등이 있어서 나랏일로 오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정치권력의 핵심에 해당되는 인물들이라기보다는 그들을 보좌하는 테크노크라트들이라고 해야 할까.
흥미로운 것은 이런 동네 분위기가 옛날 조선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왔다는 점이다. 경복궁에는 여러 개의 큰 대문이 있는데, 그중에서 서쪽에 난 문을 가리켜 영추문이라 했다. '맞이할 영, 가을 추', 즉 가을을 맞이한다는 뜻을 담은 영추문은 인왕산 능선 뒤로 넘어가는 석양의 붉은빛을 한 가득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석양의 노을이 울긋불긋한 가을 단풍과 흡사했던 까닭일까.
예부터 영추문 근처에는 궁궐에 연을 맺고 있는 중인 이상의 신분과 내시, 궁녀들이 터를 잡고 살았다. 조선 시대 왕궁에 고기, 소금, 땔감 등 생활필수품을 공급하던 '사재감'이라는 관아도 이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고위 관료들의 발걸음이 자주 오갈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권력과 그 권력을 뒷받침하는 실무자들이 한데 어울려 살았던 곳, 그곳이 바로 효자동과 통의동을 잇는 서촌의 지역적 운명인 셈이다.
세월이 흘렀지만 서촌의 특성은 쉽게 변하지 않았다. 청하식당이 아침에 일찍 문을 열고 영업을 시작한 것도 바로 이런 청와대와 정부 청사에 근무하는 사람들을 위한 배려였다.
가끔씩이지만 우리 가게에도 그 시절 청와대나 정부 관련 기관에 근무했던 사람들이 찾아오곤 한다. 이미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된 몸으로 옛날 자신이 출근하던 골목길을 돌고 돌아 우리 가게까지 오는 것이다. 그들과 잠시 이야기를 나눠보면 시간이 주는 감회가 이만저만 크지 않다.
언제가 한 번은 그들에게 청하식당을 아느냐고 질문을 던졌다. 거의가 모르는 사람이 없다. 서둘러 출근하느라 아침 끼니 놓친 사람들에게 따듯한 국물에다 흰 쌀밥을 먹을 수 있었던 곳이다 보니 그들에게도 기억이 나쁠 리가 없다. 재밌는 건, 그들 입에서 자연스럽게 튀어나온 청하식당 앞에 붙은 수식어였다.
'아!. 그 식당 잘 알지. 청와대 아침 식당, 청하식당!'
뭔가 개운치 않은 뒷맛이다. 물론 아침부터 문을 여는 식당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겠지만, 오랫동안 방송일을 해온 탓에 직감적으로 '뭔가 있다'는 느낌이 든다. 저널리스트로서의 본능이 발동하기 시작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정치인들이나 공무원들이 뇌물 때문에 곤혹스러운 일을 당하는 것은 늘 있는 일이다. 청하식당이 '청와대 아침식당'이 된 사연은 이렇게 시작된다. (작가의 상상을 가미했으니 절대로 팩트 여부를 따지지는 말기를..)
옛날 청와대 일대에는 교통이 엄격하게 통제되었다. 지금에야 걸어서 청와대 현관 앞까지 걸어갈 수 있지만 옛날에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철저하게 통제된 지역이다 보니 그곳에 이사를 온 공무원들에게는 불편한 게 한 둘이 아니었다.
시골에서 부모님들이 부쳐주는 쌀이나 고추 같은 걸 받으려고 해도 차로 이동이 안되기 때문에 곤혹스럽기만 했다. 이사라도 오는 날이면 이삿짐을 이고 지고 하면서 걸어서 효자동으로 올라가는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때는 리어카로 짐을 실어날라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물론 '야매(?)'로 하는 거지만, 운반비조로 돈을 받는 전문 배달부들도 생겨났다. 청하식당의 주인아저씨가 바로 이 일을 했다. 아주머니는 식당일을 보고 아저씨는 리어카로 짐 배달을 하면서 그렇게 청하식당을 키웠다.
그 시절에는 가장 귀한 게 쌀이었다. 그것도 시골에서 몇 부대로 보내주는 지역 특산미는 맛도 좋고 고향 부모들의 정성이 담긴 물건이다 보니 함부로 다룰 수도 없는 귀한 물건이었다. 문제는 막상 쌀부대를 이고 집까지 가려면 그게 보통일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어느 날 우연히 그렇게 쌀을 지고 가던 한 공무원이 청하식당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얼굴엔 온통 땀이 줄줄이 흘러내리는 몸으로 그는 쌀부대를 청하식당 바닥에 던져놓으며 말했다.
"저기요. 이거 내가 고향 부모님한테 받은 아주 귀한 쌀인데, 매번 이걸 지고 집까지 가려니 너무 힘들어서 못 가겠소. 그러니 말이요. 이걸 여기다 맡겨놓을 수 없겠소? 내가 올 때마다 이걸로 밥좀 해주시요. 물론 돈도 서운치 않게 드리리다."
그렇게 해서 청하식당에서는 공무원들이 쌀을 부대로 맡겨놓고 아침이나 점심때 밥을 먹는 곳이 되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시골에서 부모님이 보내주는 쌀보다 뇌물로 받은 처치 곤란한 쌀 포대들이 많아졌다. 옛날에는 뇌물을 돈이 아니라 쌀부대로 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가끔은 포대 안에 돈다발도 들어 있을 것이다.
'청와대 아침식당'이라는 별칭 속에는 이렇듯 권력과 서민이 한 곳에 어울려 살아가는 복잡다단한 뉘앙스가 깔려 있는 것이다. 아무튼 내가 머물고 있는 '김PD의 통의동 스토리'에서 청하식당은 걸어서 1분 거리다. 가끔은 그래서 문을 걸어 잠그고 밥을 먹으러 가기도 한다. 그런데 그럴 때면 어김없이 휴대폰 벨이 울린다.
'김PD! 가게 문 닫아놓고 어디 갔어요?'
기다릴 땐 오지 않던 손님이다. 그것도 바로 문 앞이란다. 이럴 땐 어쩔 수 없다. 난 숟가락 내려놓고 쏜살 같이 가게로 달려간다. 하지만 그때도 요구르트 마시는 건 잊지 않는다. 청와대 아침식당, 청하식당에서는 요구르트가 꼭 딸려나온다. 40년 전통이다. 그걸 마시지 않으면 왠지 뒷맛이 개운하지 않다.
글 김덕영 ('뒤늦게 발동걸린 인생들의 이야기' 저자, 다큐멘터리 PD, 서촌의 복합창조문화공간 '김PD의 통의동 스토리' 대표)
* 현재 작가는 8번째 신간 <뒤늦게 발동걸린 인생2>를 집필 중에 있습니다. 글이 마음에 드신 분들은 작가의 신간 출간에 힘을 보태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후원을 해주시는 분들에게는 저자 사인이 담긴 신간을 배송해드립니다.
스토리 펀딩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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