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여행자

나의 통의동 스토리 (120)

by 김덕영

'행복한 여행자, 그가 세상을 여행하는 목적은?'


지금으로부터 1년 전쯤 된 일이다. 8월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하는 어느 일요일 오후. 점잖게 생긴 중년 남자 한 분이 스물대여섯쯤 되어 보이는 딸과 함께 우리 까페 문을 열고 들어왔다. 마침 가게 안에 손님도 없던 터라, 남자는 이곳저곳 가게 안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특히 고대 그리스의 유적지들을 탐험할 때 찍었던 몇 장의 여행사진들에 관심이 가는 눈치였다. 남자는 잠시 후, 조용히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내 가게 안을 촬영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남자가 가게 안을 서성이며 촬영을 하고 있는데도, 그의 딸은 그저 조용히 아버지의 행동을 지켜보기만 했다.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어느 유행가 가사처럼 그저 미소로 바라볼 뿐이었다. 그렇다고 두 사람의 행동이 남들의 눈에 띌 정도로 특별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왠지 그들의 말 없는 시선 속에서 나는 뭔가 말 못 할 사연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었다. 잠시 후, 남자가 가게 안 촬영을 끝내고 중정 마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물끄러미 한옥 처마를 바라보며 앉아 있는데, 그 뒷모습이 여간 쓸쓸해 보이지 않았다. 결국 나는 호기심에 밖으로 나가 그에게 몇 마디 물었다.


"서촌이 처음이신가 봐요?"


남자는 갑작스러운 물음에 조금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을 했다.


"네. 우리 딸이 아빠랑 같이 가보자고 해서 오늘 이곳에 나왔습니다."


딸이 꼭 가볼 데가 있다고 해서 온 거란다. 연배가 좀 있어 보이는 나이, 인상 좋은 선배의 모습 같은 분위기가 얼굴에서 느껴졌다. 낯선 사람의 갑작스러운 물음에도 친절하게 대답을 하는 모습을 보니 마음도 닫힌 구석이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런데 그의 눈가에 감도는 석연치 않은 불안함과 쓸쓸한 분위기는 뭘까?


남자: "여행을 많이 다니셨나 보네요?"


딴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남자가 기습적으로 말문을 돌리는 질문을 던졌다. 이제 내가 대답을 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김피디: "네. 취재 때문에 이곳저곳 많이 다녔습니다."
남자: "좋으시겠어요."
김피디: "뭘요. 전 선생님이 좋아 보이는데요."
남자: "그러신가요? 전 사실 외국은 많이 못 나갔어요. 대신에 국내는 거의 안 가본 곳이 없는 것 같아요. 저 꼬맹이가 어렸을 때부터 손잡고 데리고 다녔거든요."


다 큰 딸을 '꼬맹이'라 부르는 아빠. 딸 없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참 부러운 표현이다. 순간 그가 '꼬맹이' 손을 잡고 세상을 여행하는 모습이 연상됐다. 본 적도 없는데도 말이다.


김피디: "아. 따님 말씀이시군요."
남자: "네. 딸아이가 얼마 전에 취직을 했거든요. 이젠 딸아이가 절 데리고 다니네요..(웃음)"
김피디: "부럽습니다."
남자: "그러세요? 전 피디님이 부러운데.."
김피디: "전 그냥 여행이라기보다는 일이었죠. 그런데 선생님은 여행의 목적이 무엇이었나요?"
남자: "저요..글쎄요..."


그는 잠시 하늘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잠깐이었지만 그 시간이 나에겐 어색하고 길게만 느껴졌다. 그리고 그의 답이 나왔을 때 난 전율했다. 내가 예상한 대답이 결코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의 답은 이랬다.


남자: "제가 여행을 하는 목적은 가족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전국 방방곡곡 안 다녀본 곳이 없는 여행의 마니아에게 뜻밖의 대답이 들려왔다. 여행의 목적이 '가족'라니?! 내 머릿속에선 아무리 뒤져도 찾아볼 수 없는 대답이었다. 나에게 여행은 그런 목적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곳에 있었다. 난 여행의 목적이 '가족'이었다는 그의 말이 궁금해졌다.


남자: "늘 가족과 함께 하고 싶었고, 가족과 함께 기억을 나누고 싶었습니다. 어디를 가든지요."
김피디: (침묵)
남자: "그래서 여행의 목적이라기보다는 그냥 행복한 여행이었다고나 할까요.."
김피디: (침묵)
남자: "여기도 딸아이가 가보자고 해서 들어왔어요. 사실 제가 몇 달 전에 정년퇴직을 했거든요. 처음 얼마 동안은 출근을 안 하니까 이상하더라고요. 나이 든다는 생각도 들고...마음도 울적해지고...그런 걸 보고 딸아이가 팔을 잡고 부추겼어요. 같이 나가자고요... 아빠가 어렸을 때 자기를 데리고 다녔던 것처럼, 이제는 자기가 아빠를 데리고 다니겠다면서요.."
김피디: (침묵)
남자: "참 착한 아이죠..(미소)"
김피디: "네. 선생님이 참 부럽습니다.
남자: "부럽긴요..."

....


이것이 지난여름 한 중년 남자와 만난 대화를 기억을 더듬으며 재구성한 것이다. 며칠 전 인터넷에서 그 중년 남자의 블로그를 발견했다. 놀랍기도 했고 반갑기도 했다. 예상대로 그는 자신의 또 다른 인생을 참 멋지게 살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캄보디아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여행을 좋아했기 때문일까. 정년퇴직을 하고 '꼬맹이' 딸아이의 손에 이끌려 풀 죽은 모습으로 우리 가게 문을 열고 들어왔던 그가 아니었다. 원래부터 아마 그런 사람이었겠지만, 그의 눈 속에서 나는 미래에 대한 희망과 새로운 세상에 도전하겠다는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태양을 봤다.


스크린샷 2016-08-02 오전 6.26.33.png 캄보디아 시골 마을에서 피크닉을 하고 있는 행복한 여행자, 오창용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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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쓴 글들을 보니 캄보디아에서의 생활이 아직은 낯설고 서툰 느낌이다. 반찬은 어떻게 만들고 찌개는 어떻게 끓여야 하는지, 인터넷을 통해 뒤진 정보들을 요약해 놓은 것들이 보였다. 그런 바쁜 시간 속에서도 언제 땄는지 스킨스쿠버 자격증도 보였다. 늘 도전하는 인생을 살겠다는 그의 말이 허풍이 아니었다. 예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딴 스킨스쿠버 자격증이라서 더 빛날 수밖에. 비록 몇 줄의 글이었지만 그 안에는 행복한 아버지, 행복한 여행자의 모습이 가득 담겨 있었다. 사람은 얼굴이나 목소리만으로 자신의 향기를 풍기는 것이 아니라, 글로써도 향기를 풍기나 보다. 그의 글에서 남자의 향기가 느껴졌다. 인생을 끝까지 즐기며 살겠다는 각오가 담긴 남자만의 향기였다.


난 그가 정말 부러웠다. 사실 그날 그와 처음 만났던 바로 그날, 그가 떠난 뒤 난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너의 여행의 목적은 무엇이었지?'하고. 나에겐 나를 넘어서는 욕심이 있었다. 그건 욕망처럼 나를 붙잡고 늘어지는 실체를 알 수 없는 텅 빈 공허함과 다를 게 없는 것이었다. 원래 욕심과 허탈하고 공허한 느낌은 늘 동전의 앞뒷면처럼 늘 붙어 다니기 마련이다.


그런 나에게 그가 던진 한 마디는 나의 여행에 대한 개념을 송두리째 도마 위에 올려놓고 난도질했다.


'여행의 목적은 가족이었습니다.'


그 말이 왜 그렇게 가슴을 울렸는지...적어도 고백하지만 내가 여행의 목적을 '가족'으로 생각한 적은 없었다. 나에게 여행은 언제나 일이었다. 나만의 시간이었다. 뭔가 만들어내야 한다, 뭔가 찾아내야 한다는 강박증에 사로잡혀 정신없이 여행지를 헤집고 다닌 것 같다. 그리고 여행의 행복은 언제나 나 자신의 만족일 뿐이었다. 난 언제나 혼자서 그렇게 여행을 즐겼다. 이기적인 여행자.


인생이란 게 참 그렇다. 여행의 목적에서 가족을 떠올리는 남자와 여행의 목적에서 일과 자신만을 생각했던 남자. 이 둘 중 누가 더 행복할까. 내가 그와 대화를 나누면서 여러 번 침묵을 지킨 것은 아마도 그가 부러웠기 때문이고, 그가 참 행복해 보였기 때문이고, 나보다 더 아름다운 여행의 개념을 가슴에 지녔기 때문이고, 또...아마도 그가 지금도 어느 곳에서 참 행복한 여행을 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부러움과 부끄러움이 햇살 아래 눈을 치켜뜰 수 없을 만큼 따갑고 강렬했다.


인간은 누구나 나이가 들면 늙고 병들고 그리고 죽는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인생의 묘미는 바로 거기에서 시작된다. 시간이라는 오묘한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누군가 좋은 사람이 옆에 있을 수 있다면, 우리가 삶을 마감하는 순간도 그렇게 불행하고 슬픈 일만은 아닐 것이다. 그날 내 앞에 앉아 여행의 목적을 깨우쳐준 그 남자처럼 말이다.


"Bon Voyage! 진짜 봉 브와야지! 행복한 아버지! 행복한 여행자..."


01.jpg 2014년 8월 어느 여름날 그와 만났을 때 사진을 그의 블로그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04.jpg 그날 그가 구입한 나의 책 <뒤늦게 발동걸린 인생들의 이야기>도 그의 블로그에 기록되어 있었다.


#정년퇴직 #나이는숫자에불과하다 #도전도전도전



글쓴이: 김덕영 <뒤늦게 발동걸린 인생들의 이야기> 저자 / 다큐멘터리 PD / 서촌의 복합창조문화 공간

'김PD의 통의동 스토리' 대표


뒤늦게 표지.jpg '나이는 숫자에 불과할 뿐이다.' 100세 시대, 늦은 나이에 두 번째 인생에 도전해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

<뒤늦게 발동걸린 인생들의 이야기>, 김덕영 지음 (다큐스토리, 2013)


hafUd0091wp0av6z7oxx5_y0oxu0.png 중년의 사랑을 그린 장편 소설, <내가 그리로 갈게>, 김덕영 지음
kimpdcafe.jpg 현재 작가는 서촌 통의동에 있는 작업실 겸 까페에서 조금은 색다른 방식으로 창작 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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