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리, 허드슨 강의 기적을 보고...'
'김PD의 인문학 여행' (23)
2009년 1월 15일, 탑승객 155명을 태운 US Airways 1549 여객기가 이륙 1분 만에 갑작스레 달려든 새떼들과 충돌한다. 순식간에 양쪽 날개 엔진은 회복 불가능한 상태가 되고 동력을 잃은 여객기는 종이 쪽처럼 활강을 시작한다. 그때까지 부기장의 손에 들려 있던 조종대가 기장의 손으로 넘어온다. 절체절명의 순간, 155명의 인원을 태운 여객기의 운명을 손에 쥔 사람은 40년 베테랑 항공기 조종사 설리 슐렌버거. 은퇴를 1년 앞둔 백발이 성성한 59세 남자의 손에 모든 운명이 맡겨지는 순간이었다.
같은 시각, 라구아다 공항 관제탑에도 긴급히 여객기 엔진 결함을 알리는 무전이 수신된다. 관제사는 11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테터보로 공항으로 회항할 것을 명령한다.
‘테터보로 공항 13번 활주로를 열었다. 그쪽으로 회항하길 바란다!’
‘불가능하다.’
' 11km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불가능하다. 허드슨 강에 착륙하겠다.’
긴급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메뉴얼 북을 살펴보던 부기장은 자신이 지금 듣고 있는 대화가 믿기지 않는다.
1분 1초가 아까운 순간, 동력을 잃은 여객기의 고도는 이미 빠른 속도로 떨어지기 시작한다. 결국 여객기는 허드슨 강 위로 진입을 시도한다.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2001년 뉴욕 항공기 테러 사건의 악몽을 기억하고 있는 뉴욕 시민들 입장에서는 기절초풍할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여객기는 안전하게 허드슨 강 위에 비상 착륙한다. 긴급하게 탈출 명령이 내려지고 150명의 승객들은 승무원들의 지시에 따라 하나둘씩 차례차례 비상 탈출을 시도한다. 허드슨 강 인근을 지나던 선박들이 신속하게 승객들을 구조하기 위해 몰려든다.
이 이야기는 실화다. 155명 탑승객은 한 두 명의 가벼운 찰과상을 제외하고는 전원이 무사히 구조된다. 미국은 물론이고 전 세계 항공사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기적적인 일이 일어난 것이다.
이미 이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 <설리, 허드슨 강의 기적>을 본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사실 오늘은 영화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바로 그 은퇴를 1년 앞둔 40년 베테랑 조종사 설리 슐렌버거다.
그는 공항 관제소의 지시를 어겼고, 자신을 포함 155명의 생명을 위험에 빠드리게 했으며 말도 안 되는 허드슨 강 비상 착륙을 시도했다는 혐의(?)로 미국 연방교통안전위원회(NTSB)에 조사를 받는다. 과연 그는 영웅인가? 아니면 승객들의 안전을 볼모로 영웅심에 빠진 사기꾼인가?
영화는 NTSB의 조사를 받기 위해 호텔 안에 감금되다시피 한 조종사 설리의 갈등과 실제 상황이 교차하면서 진행된다. 청문회가 열리고 항공기 안전에 관한 최고의 전문가들로 꾸려진 조사위원회가 설리의 허드슨 강 비상착륙은 무모한 시도였다는 쪽으로 결론을 내려간다.
미국은 재난과 안전에 있어서 만큼은 세계 최고의 메뉴얼을 갖고 있다. 오랜 경험에서 나온 풍부한 데이터에 기초해서 인간의 생명을 지키는 원칙과 메뉴얼들이 존재한다. 조사위원회 소속의 전문가들 눈에는 허드슨 강 불시착은 은퇴를 앞둔 나이든 조종사의 무모함 혹은 객기 정도로 비춰졌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만약 매뉴얼대로 여객기를 테터보로 공항으로 회황했다면 동력을 잃은 항공기는 뉴욕 도심 한가운데 추락하고 말았을 것이다. 이 사실은 사고조사위원회에서 실행한 시뮬레이션을 통해서 사실임이 입증이 되었다.
‘도대체 어떻게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있었는가?’라고 질문하는 조사관들에게 기장은 차분하게 대답한다.
“정확히 42년, 나의 비행기 조종 경험에 비춰 봤을 때 당시 상황에서는 허드슨 강에 착륙하는 것밖에는 다른 수가 없었다. 그것은 데이터나 논리가 아니라 직감이었다.”
그건 42년 동안 한 노장 파일럿의 몸에 축적된 경험과 시행착오의 결과물이다. 숫자나 논리가 대체할 수 없는
노년의 직감이다. 항공기 사고가 비행기 자체의 결함보다 조종사의 과실로 인해서 더 많이 발생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말이었다. 한 사람의 경험과 직관, 그리고 그에 기초한 정확한 판단력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해서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기적은 아니었다. 이런 유사한 기적이 이전에도 있었기 때문이다. 1983년 7월 23일, 캐나다 몬트리올 공항을 이륙한 에어 캐나다 소속 143편 보잉 767기가 고도 41,000피트 상공에서 연료 경고등이 켜진다. 비행기 연료가 바닥이 난 것이다. 조종칸에 앉아 있던 누구도 원인을 알 수 없었다. 출발 전 체크한 항공기 연료 게이지는 분명 정상적이었는데, 어떻게 연료가 바닥이 나는 일이 벌어진 것일까?
급기야 항공기 엔진이 멈추고 모든 전원 공급도 차단된다. 디지털 전자 계기로 작동되는 첨단의 항공기가 무용지물이 된 것이다. 비행기는 말 그대로 이제 바람에 의지해서 활강하는 방법에 남은 게 없었다. 당시 이 긴박한 상황에서 항공기 조종대를 잡고 있던 파일럿은 1만 5천 시간의 비행경력을 지닌 48세의 조종사 밥 피어슨.
그는 현재 상태로는 여객기가 정상적으로 관제탑의 지시에 따라 목적한 공항에 착륙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린다. 지도를 펴고 적당한 착륙 지점을 찾던 밥 피어슨 기장의 눈에 띈 곳은 인근에 위치한 위니펙의 한 낡은 활주로. 바로 김리(Gimli) 공군기지였다.
당시 김리 공군기지 활주로에는 모터쇼가 열리고 있었다. 다행히 경기가 일찍 끝나 활주로에는 두 명의 소년들만 자전거를 타고 놀고 있었다. 연료가 없어 엔진이 꺼진 여객기는 소리도 없이 활주로 위로 진입한다. 연료가 바닥난 상황에서 이제 남은 것은 활주로에 비행기를 안착시키는 문제. 조종사 밥 피어슨은 이때 위험에 처한 비행기를 ‘사이드 슬립’이라는 조종기법을 이용해서 착륙을 시도한다. 일부러 비행기를 옆으로 기울어지게 해서 속도와 고도를 빠르게 낮추는 방법으로 고도의 숙련된 기술이 필요로한 착륙 방법이었다.
김리 공항 활주로에 있던 사람들에게는 믿어지지 않는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자신들을 향해 보잉 여객기 한 대 달려올 줄 누가 알았겠는가? 비행기에 탄 조종사의 눈에도 자전거를 탄 아이들이 보였다. 다행히 비행기는 글라이더처럼 활주로를 미끄러졌다. 착륙과정에서 동체가 파손된 것을 제외하면 승객 61명과 승무원 8명을 포함해서 전원이 무사하게 구조됐다.
이 사건은 두 가지 질문을 남긴다. ‘도대체 어떻게 여객기 연료가 바닥나는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일까?', 그리고 ‘연료가 바닥난 비행기를 조종사는 어떻게 안전하게 착륙시킬 수 있었던 것일까?’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의외로 단순하다. 당시 그들이 몰던 여객기는 최신형으로 에어 캐나다에만 보급되었던 신형 보잉 767-200. 이전까지와는 달리 첨단의 디지털 장비들이 부착되었고 그 과정에 항공기 연료를 계산하는 단위가 이전까지 사용되었던 파운드에서 국제표준값으로 바뀐 것을 제대로 알지 못했던 것이다.
쉽게 말해서 당시 에어 캐나다는 그동안 사용하던 파운드를 폐기하고 국제 표준 단위인 리터로 전환을 하는 중이었고, 에어 캐나다 항공기에 변경된 단위가 최초로 적용되었던 것이다. 목적지까지 리터로 계산하면 20,088 리터의 급유를 받아야 할 비행기가 타성에 젖은 직원의 실수로 파운드로 계산되어 4분의 1 정도밖에 안 되는 4,900리터의 급유만 받고 이륙을 한 것이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이야기는 두 번째다. 연료가 바닥난 항공기를 ‘사이드 슬립’이라는 조정기법으로 안전하게 활주로에 착륙시킨 조종사 밥 피어슨. 사실 그는 오랜 시간 동안 ‘무동력 글라이더’를 취미로 조종해온 베테랑 글라이더 조종사였다. 오로지 바람에 의지해서 비행기를 조종해 본 경험이 풍부했던 조종사였기에 여객기는 조종사의 오랜 경험에 기초한 글라이딩을 통해 안전하게 착륙할 수 있었다.
만약 그가 이런 글라이딩의 경험이 없는 젊은 조종사였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만약 US Airways 1549의 조종사가 42년 경력의 베테랑 조종사가 아니었고, 그들이 기내의 위급 상황을 전혀 모르는 관제탑 직원들의 명령에만 의존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오늘 내가 찾고 싶은 답은 바로 이 질문들 속에 있는 것 같다.
이처럼 때로는 머리보다 몸이 더 확실할 때가 있다. 오래된 경험과 지혜는 나이 든 몸에서 우러나온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김리 글라이더'이고 '허드슨 강의 기적'이다. 공교롭게도 오늘 이야기한 두 가지 이야기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존재한다. 나이 든 몸에 새겨져 있는 경험과 지혜야말로 그 어떤 첨단의 테이터나 디지털 전자기기 못지않은 탁월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 특히 위급한 상황에서 이런 몸에 새겨진 지혜가 더 위력을 발휘한다.
누구나 위험에 빠지면 당황하고 순간적인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아무리 유용한 정보들을 담고 있는 메뉴얼이라도 해도 패닉 상태에 빠진 사람의 눈에는 무용지물이다. 당황해서 잘못된 판단을 할 가능성도 높아진다. 이럴 때 나이 든 경험자들의 직관이야말로 모든 상황을 해결하는 열쇠다.
중요한 것은 언제부턴가 이런 나이 든 노장들의 경험과 지혜를 사회가 너무 가볍게 여기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의 몸에 새겨진 지혜를, 그들의 몸이 간직하고 있는 직관을 인정하자. 그걸 인정하는 순간이 바로 사회가 더 안전하고 풍요로워지는 길로 접어든 순간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내가 '뒤늦게 발동걸린 인생들의 이야기'를 다시 쓰는 이유다.
글: 김덕영 <뒤늦게 발동걸린 인생들의 이야기>, <하루키에겐 피터캣, 나에겐 통의동 스토리가 있다> 저자 / 다큐멘터리 P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