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PD의 인문학 여행' (22)
'김PD의 인문학 여행' (22)
'사탕 한 알의 사연'
얼마 전 일이다.
날씨가 좋아져서 그런지
요즘 통의동 골목길에는 예전보다
행인이 늘고 있다.
대부분은 서촌에 여행을 왔거나
오래된 한옥들 사진을 찍기 위해
출사를 나온 포토그래퍼들이다.
행인이 많다 보니 가게 문을 잠그고
밥 먹으러 나가는 것도 쉽지 않다.
사실 임대표나 나나 좀 그런 것에는
개념(?)이 없긴 했다.
툭 하면 문 잠그고 돌아다녔으니 말이다.
그래서 요즘엔 저녁 식사를
가게 안에서 해결하는 경우가 많다.
대충 냉장고를 뒤져서 먹을 만한 것들을
찾아 후라이팬에 들들 볶으면 그만이다.
때로는 브런치를 저녁 식사 대용으로 삼기도 한다.
그 며칠 전 무엇을 먹고 있었는지는
솔직히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분명한 것은 테이블 위에 몇 가지
접시를 차려놓고 밥을 먹고 있던 것은
분명했다.
사실 우리 식단은 국물과 반찬,
특히 김치 때문에 '김.통.스'처럼
와인이나 커피를 파는 곳에서는
어울리지 않는다.
눈치 안 보고 밥 먹는 일이
뭐 대단한 일도 아니고 자랑할 만한
일도 아니지만,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손님이 없는 경우에는 그렇게 식사를
하는 경우가 있다.
한 숟가락 밥을 떠서 젓가락으로
반찬을 집어 올려 우물우물 먹고 있을 때였다.
2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젊은 여성 한 분이
가게 안에 들어왔다.
입 안 가득 뭔가를 우물거리고 있는
나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오소오세요!"
입 안에 음식물이 있기 때문에
최대한 입술을 오무려서 인사를 했다.
대충 한 눈에 봐도 주인들이
가게 안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있는
중이라는 걸 알았을 것이다.
주인은 우물우물 뭔가를 씹고 있고
손님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우물거리고...
그런 약간 어색함을 깨듯이 그녀가 말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테이크 아웃해 주세요."
임대표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눈짓을 한다.
'난 다 먹었어. 내가 할게. 마저 먹어'
나도 눈짓으로 말한다.
'알았어. 그럼 끝까지 먹을게.
고마워...'
어색한 손님은 가만히 가게 안에
있기가 불편했던지 계산을 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천진난만한 주인은 천연덕스럽게
남은 밥을 싹싹 마무리했다.
임대표가 아메리카노를 내리는 사이,
난 테이크 아웃 잔을 준비했다.
창문 너머로 그녀가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시선이 몇 번 교차했다.
'깨끗하게 커피 잘 내리고 있는지 검사하나?'
속으로 그런 생각도 들었다.
보통은 주문하고 스마트폰을 보는 사람이
90% 이상은 된다.
나머지 10% 정도는 중정 마당에 나가
한옥 기와 지붕을 구경하거나
가게 안에 붙어 있는 사진들을 감상한다.
그녀가 달랐던 것은
자꾸 우리와 시선이 마주쳤다는 점이다.
나는 입술 떨리지 않게 임대표에게 말했다.
"깨끗하게 잘 포장해...
좀 까다로운 사람 같아 보여"
임대표는 뭔소리를 갑자기 하고 있는지
모른 체 눈만 꿈뻑꿈뻑 거리고...
계속 우리를 쳐다보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난 깔끔하게 마무리해서 손님에게
커피를 건넸다.
"여깄습니다!"
자! 여기까지가 저녁 6시 경의 상황이다.
그날도 늘 그랬듯이 와인과 위스키를
서빙하면서 하루를 보냈다.
1시를 조금 넘겨서 가게 문을 닫고
집으로 향했다.
늘 하던대로 경복궁역 횡단보도에서
길을 건넜다. 임대표랑 가게 얘기랑
연애하는 커플들 얘기를 하면서
길을 걷던 중이었다.
누군가 큰 소리로 아는 체를 했다.
"아니! 가게 밖에서도 이렇게
다정하게 다니시는 거예요?!"
목소리의 주인공을 향해서
고개를 돌렸다.
어디선 한 번 본 것 같은 얼굴,
하지만 누군지 정확히 알 수 없는
사람이 우리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엉겹결에 우리도 "아. 네~" 하면서
아는 체를 했다.
'그런데 이 분은 누구지?'
순간 저녁 시간에 아이스 커피 한 잔을
테이크 아웃했던 그 젊은 여성이 떠올랐다.
그런데 갑자기 그녀가 갑자기 가방에서 뭔가를 찾는다.
'뭘 찾는 걸까?'
임대표와 둘이서 그녀 앞에서 서서
어색한 침묵 속에서 몇 십초를 기다렸다.
드디어 그녀가 가방에서 찾을 걸 찾았는지,
손에 뭔가를 가득 움쳐쥐고는
나에게 팔을 뻗었다.
"드릴 건 없고. 이거 드세요."
손바닥을 벌려 보니 흰종이에 포장된
커피 사탕이었다. 포장된 걸 봐서는
국산은 아니고, 어디선가 수입한 사탕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사탕 하나 줄려고
사람을 이렇게 길거리에 세워놓다니!
좀 어이가 없었다.
난 처음에는 그 사탕이 요즘 유행하는
좀 귀한 사탕인 줄 알았다.
아. 왜 '허니버터스'처럼 물량이 없어서
품귀현상도 생기고, 그래서 유명해지는
과자도 있는데, 사탕이라고 예외는 아닐 테니까.
"감사합니다."
사탕 3개를 받아들고 임대표랑 하나씩
까먹었다. 나머지 하나는 호주머니에 넣었다.
그녀가 다시 한 번 우리에게 잘 가라고
인사를 했다. 나도 엉겹결에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그렇게 그녀와 길거리에서
작은 헤프닝을 끝으로 우리는 각자 갈 길을
갔다.
입 안에 든 사탕을 이리저리 굴려가면서
임대표와 나는 그 알 수 정체불명의 여성에
관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집으로 갔다.
여기까지만 알았다면, 아마 난 그 사탕을 준
손님에 대해서 영원히 이상한 사람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커피 한 잔 주문하는데 무척이나 우물쭈물 거리고,
커피를 내릴 때도 계속 우리를 감시(?)했던 사람,
그리고 길거리에서 사탕을 주려고 몇 분 동안
우리를 길에 세워놓았던 사람으로 말이다.'
그런데 모든 이야기에는 끝이 있다.
끝을 보지 않고 전체를 다 봤다고 말할 수 없듯이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 사람에 관한 진실,
그 사람의 진심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 사람이 누군지 말할 수 있을까.
오늘 아침 임대표가 갑자기 놀라는 표정으로
말을 걸었다.
"저기 있잖아! 얼마 전에 사탕 준 여자 분..."
"왜? 그 사람이 어때서?"
"그 사람 우리 밴드 멤버야!"
"진짜?"
네이버 밴드에 '김PD의 통의동 스토리'라는
걸 만들어서 몇 년째 운영 중이다.
회원수만 600명이 넘는 나름 큰 모임이다.
우리 역시 그 멤버들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우리에게 사탕을 준 여성은 4월 달에
우리 밴드에 가입했던 심**이란 분이었다.
이미 나와도 밴드를 통해서 온라인 상으로
몇 번 대화도 나눈 사람이었다.
당연히 그녀 입장에서는
우리가 친숙한 사람이었을 터!
안타깝게도 우리만 그녀가 누군지
몰랐다는 사실!
난 그녀가 우리 밴드의 멤버라는 가정 하에
그날 있었던 일들을 그녀의 입장에서 재구성했다.
아마도 이랬을 것이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저녁 때 모임이 있는데,
일찍 서촌에 도착했네.
가만... 여기 내가 밴드로 가입한
그 좀 이상한 까페가 하나 있지.
주인들도 좀 지멋대로이고...
그래 남은 시간 동안 '김.통.스'에나
가 봐야겠다. 가서 첨이지만
김PD랑도 인사도 하고...'
어쩌면 그렇게 그녀는 경복궁역에서
통의동 골목길까지 발걸음을 옮겼을 것이다.
어스름 어둠이 내리는 골목길.
꼬마 전구 불빛이 비치는 '김.통.스' 간판이
보이자 그녀는 안도의 숨을 쉰다.
'찾았다. 뭐 어렵지도 않네.
주인들한테 뭐라고 소개를 할까?'
그녀는 약간은 긴장된 얼굴로
'김.통.스' 현관으로 들어선다.
그러다 천연덕스럽게 저녁 밥을 먹고 있는
김PD랑 시선이 마주친다.
테이블엔 저녁 밥상처럼 차려진
끼니들이 놓여 있다.
'반가워요! 저 밴드 멤버에요.'하고
다정하게 인사를 나누려고 했던 그녀는
입 안 가득 뭔가 우물거리는 김PD를 보고
할 말을 잃어버린다.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다가
결국 한 마디 꺼낸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테이크 아웃해 주세요."
밥 먹는 주인 앞에서 아는 체를 하기
어려웠던 그녀는 결국 밖으로 나간다.
그리고 곁눈질로 계속 김PD와 임대표를
번갈아 바라본다.
한 마디라도 하고 가야 할 것은데...
그 순간 김PD는 임대표가 귓속말로
속삭인다.
"깨끗하게 잘 포장해...
좀 까다로운 사람 같아 보여"
아...... 난 그것도 모르고.....
그녀가 까다로운 손님이라고만 생각했으니....
그녀는 반갑게 인사라도 하고 싶었을 텐데 말이다.
그것이 저녁 때 그녀와 우리가
서로 말 못하고 어색하게 마주보고
있었던 상황이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다시 밤이 된다.
우연히도 우리는 다시 조우한다.
광화문 한 복판, 횡단보도 앞에서.
'이 사람들 또 만났네.
아까 인사라도 할 걸 그랬어.
그래도 이렇게라도 다시 만났으니 참 반갑네.'
아마도 그래서 그녀는 반가운 마음을
어떻게라도 표현하고 싶었던 것 같다.
가방을 뒤져서 사탕 세 알을 꺼낸 건
그래서였을 것이다.
그것도 모르는 김PD는 속으로
'참 이상한 사람도 다 있네'하고
생각하고 있었으니!
공교롭게도 일이 이렇게 될라고 했는지,
그날 그녀가 준 사탕 세 알 중에서
두 개는 우리 둘이 나눠 먹고
한 알이 남아 있었다.
가방에 넣고 다니던 거였다.
그래서 이 사탕 한 알을 버리지
않았던 걸까?
모든 사물에는 고유한 인연이라도
있는 것일까?
아무튼 그 사탕 한 알을 여러분에게 공개한다.
남들이 보면 하잖은 사탕 한 알이겠지만,
우리에겐 참 고마운 마음의 선물이었다.
글: 김덕영 <뒤늦게 발동걸린 인생들의 이야기> 저자 / 다큐멘터리 PD
작가의 책들, <유레일 루트 디자인> (오프하우스, 2010년), <세상은 모두 다큐멘터리였다> (당대, 2011년),
<그리스의 시간을 걷다> (책세상,201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