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식과 이해의 불일치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김PD의 인문학 여행' (27)
혹시 살면서 이런 적은 없는가?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데, 몸이 따라주지 않아서 고생했던 적 말이다. 혹은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몸으로 체험하는 것이 너무나 큰 차이를 가져와서 당황했던 일도. 우리의 의식은 생각의 방향과 행동의 방향이 일치하는 것을 지향한다. 그럴 때 마음도 편안함을 느낀다. 그 반대의 경우는 뭔가 불편하다. 뭔가에 대해서 알고 있다는 믿음, 그것에 관한 정보의 축적, 결국 그것이 우리가 사물이나 현상, 혹은 관계에 대해서 알고 있다는 '지식'(knowledge)의 본질이다. 하지만 알고 있다는 것과 그걸 몸으로 '이해'(understanding)하고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때로는 '지식'과 '이해'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엇갈릴 수도 있다.
일상에서 벌어지는 일들 가운데는 아마도 사랑에 관한 일들이 그럴 것이다. 벌써 3년째 까페를 운영하다 보니 이젠 가게를 찾는 낯선 손님들과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때가 많다. 특히 연애 얘기는 늘 단골 메뉴다. 어제도 그랬다.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전혀 모르는 사이도 아닌 한 손님이 있었다. 그녀가 어제는 여자 후배와 함께 가게를 찾았다. 형식적인 인사, 안부, 근황 등을 묻는 이야기 끝나고, 우연히 내가 쓴 소설 <내가 그리로 갈게>로 화제가 바뀌었다. 중년 남녀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소설이었다. 사랑의 정의, 올바른 사랑법에 관한 나름대로의 철학은 담고 쓴 소설이었다. 화제가 남녀 간의 사랑, 타인과의 관계로 바뀌자 우리 대화의 양상도 바뀌었다. 재미없던 이야기들이 피가 돌고 살이 되는 생생한 삶의 현장이 됐다.
특히 어제 이야기들 중에서 여성들이 느끼는 사랑의 부조화, 그로 인해 겪어야 하는 심리적 갈등과 불편함과 조금은 두려움까지 느끼게 되는 일들이 내 귀를 자극했다. 처음에는 그냥 재밌는 이야깃거리라도 있나 하고 들어보던 것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어떤 분노, 사명감 같은 것으로 바뀌었다. 나도 남자지만, '아직도 너무하는 남자들 너무 많구나', 뭐 그런 생각도 들었다.
예를 들어보자.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그 사람과 관계를 맺는 경우가 있다. 때로는 스토킹처럼 괴롭힘을 당하면서도 그 사람을 정리하지 못해 고민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보통은 여성의 경우가 압도적으로 다수를 차지한다. 이런 사람을 보고 누군가는 '착한 여자 콤플렉스'에 빠져 있다고 간단히 말할 수도 있지만, 실제로 그 한 사람의 개인의 머릿속에 들어가 보면 사정은 복잡하다. 분명 그녀 자신도 자신이 이해하는 것과 행동의 결과로 나타는 차이에 대해서 당황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알면서도 행동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와의 관계를 정리하고 싶은데, 그리 하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끌려다는 경우는 또 뭘까? 분명 우리 주변엔 그런 사람들이 적지 않다. 심지어 남자인 나 자신 안에도 그런 '착한 여자' 콤플렉스 같은 요소들이 마음속 어느 곳엔가 웅크리고 있는 걸 발견할 때도 있다.
'때로는 단호해야 한다. 그러지 않고선 나를 지킬 수 없다.'
분명 저 사람과 나는 맞는 사람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관계를 정리하지 못하고 속된 말로 질질 끌려 다니는 경우.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한편으로 인격이 성숙해지고 사랑의 본질에 다가서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런 과정이 오래 지속되다 보면 자신의 인격이 파괴되고 퍼스널리티가 혼란을 겪는 심리적 고통을 경험하게 된다. 그 순간이 브레이크를 걸어야 할 순간이다. 어쩌면 달리는 차에서 뛰어내릴 각오를 해야 하는 순간이 아닐까 싶다. 좀 잔인하긴 하지만...
그렇다면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반복되는 것일까? 왜 중단하지 못할까? 과연 왜 우리 안에서는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난 개인적으로 이런 '부조화'의 원은 알고 있다는 믿음과 그걸 몸으로 실천하는 것의 차이에서 온다고 믿는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사물과 현상에 대한 '지식'(knowledge)과 그걸 받아들이고 해석한 뒤 실천으로 옮기는 '이해'(understanding)의 과정에서 부조화가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부조화의 간극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다면, 우리가 일상에서 겪는 다양한 앎과 실천의 갭을 줄일 수 있지 않을까.
'거꾸로 가는 자전거'
2014년 세상에 호기심 많았던 한 무명의 엔지니어를 일약 세계적인 명사로 만든 사건이 유튜브에서 일어난다. 데스틴 샌드린이 그 주인공이다. 그는 우연히 네덜란드 암스텔담을 여행하던 중에 친구의 소개로 아주 색다른 경험을 하게 된다. 바로 '거꾸로 가는 자전거'를 타게 된 일이다. 보통의 자전거들은 자신이 핸들을 움직이는 방향으로 자전거 바퀴가 움직인다. 그런데 그가 만난 '거꾸로 가는 자전거'는 말 그대로 방향이 반대다. 그래서 핸들을 오른쪽으로 틀면 바퀴는 왼쪽으로 움직인다. 반대로 왼쪽으로 핸들을 돌리면 바퀴의 방향은 오른쪽이 된다.
중요한 건 이 자전거를 아무도 탈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자전거를 잘 타는 사람일지라도 말이다. 데스틴은 3미터를 이동할 경우 200달러를 주겠다고 내기를 걸었지만, 지금까지 그 내기에 이겨서 200달러를 따간 사람은 없었다. 고작 3미터였는데 말이다! 도대체 이런 일은 왜 일어나는 것일까? 우연히 이 거꾸로 가는 자전거를 발견한 데스틴 샌드린은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결론에 도달한다. 바로 지식과 이해가 늘 일치하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우리가 사물과 현상에 대해서 파악한 정보적 지식이 늘 우리가 몸으로 행동으로 옮기는 이행의 과정과 논리적으로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나도 자전거 타기를 좋아해서 늘 느끼는 것이지만, 자전거 타기는 우리의 몸과 두뇌가 반복적인 실패에 반응한 결과물이다. 몇 번을 넘어지는 시행착오의 과정을 거쳐서 어느 한순간 뭔가 머리와 몸을 연결하는 어떤 관 같은 게 뻥 소리를 내며 뚫리는 경험을 하게 된다. 바로 그 순간이 자전거를 탈 수 없던 내가 자유롭게 자전거를 몰고 거리를 활보하는 기쁨을 만끽하는 순간이다. 자전거 배우면서 수없이 넘어지고 쓰러지는 과정은 우리 두뇌가 자전거 위에서 균형을 잡으려 노력하는 손과 발, 근육과 신경들의 복잡한 알고리즘을 정리하기 위해서 필요한 절대적인 시간을 의미한다. 그걸 두뇌가 가지런히 정돈시키고 고착시키자마자 더 이상 자전거를 타면서 이유 없이 쓰러지는 일도 사라진다. 마치 두뇌 안에 어떤 회로를 연결하는 것 같은 작동원리다.
신기하게도 자전거 타기에 한번 성공하면 어떤 상황에서도 자전거 타는 법을 잊지 않는다. 아무리 오랜 시간 동안 자전거를 타지 않아도 쉽게 다시 자전거를 몰 수 있다. 이미 우리 몸과 두뇌 안에는 자전거 타는 법이란 습관과 이해가 습득되어 있기 때문이다. ‘거꾸로 자전거’는 그동안 우리 몸이 반응하는 방식을 뒤집어놓은 것이었다. 그 결과 머릿속으로는 자전거 타는 법을 알고 있어도 몸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게 된다. 데스틴의 경우 ‘거꾸로 자전거’를 타는 데는 무려 8개월이 걸렸다. 이것은 두뇌 안에 있던 기존의 방식을 지우고 새로운 회로를 연결시키는데 그만큼의 시간이 들었단 이야기다.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겠지만 그렇게 새로운 '거꾸로 가는 자전거'를 타는 순간 정상적인 자전거는 탈 수 없게 된다.
이걸 뇌과학에서는 '신경가소성'(neuroplasticity)이라 부른다. 우리 두뇌가 마치 칠판에 글씨를 썼다 지웠다 하듯이 언제든지 경험에 의해서 새로운 정보를 저장하고 운영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말이다. 두뇌가 지니고 있는 신경가소성은 오늘날 나이가 들어서도 새로운 일에 도전하고 낯선 체험을 하면서 활력을 되찾는 노년들이 늘어나는 이유를 설명하는 근거가 된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단련시켜 새롭게 발전할 수 있는 낙관론의 배경이기도 하다.
어떤 면에서 보자면 사랑의 부조화에서도 데스틴의 '거꾸로 가는 자전거'와 같은 '지식'과 '이해'의 간극이 존재한다. 머리로는 자전거 핸들과 바퀴가 서로 반대되는 방향으로 작동된다는 걸 알기 때문에 손을 반대로 틀면 될 것 같지만 막상 해보면 안 되는 것처럼 사랑도 마찬가지다. 매일매일 반복되는 갈등과 불화, 다툼 속에서 '이젠 정리를 해야지', 하고 마음속으로 결심은 하지만 막상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 특히 여성을 스토킹 하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그런 여성의 나약한 부분을 집요하게 파고 들어서 관계를 유지시켜 나가려 한다.
이렇게 사랑의 부조화를 경험하는 사람들에게 '거꾸로 가는 자전거'가 힌트가 될 수 있다. 내가 인식하는 것들, 내가 알고 있는 것들, 그런 모든 지식들을 합쳐도 내가 몸으로 이해하고 행동하는 것들을 모두 대변할 수 없다. 알고 있는 것과 이해하는 것은 다른 것이란 사실을 스스로 인정해야 한다. 결국 몸을 써야 변화가 온다. 머리로 아무리 많은 것을 이해한다고 해도, 몸이 움직이지 않으면 늘 거기서 그 자리인 이유가 있다. 한 발짝 움직이기조차 싫은 때가 있다. 하지만 모든 변화의 출발은 바로 그 한 발짝을 앞으로 내딛는 것이다.
하지만 어쨌거나 사람은 쉽게 변하지는 않는다.
글: 김덕영 (작가 / 다큐멘터리 PD)
왼쪽부터 신간 <하루키에겐 피터캣, 나에겐 통의동 스토리가 있다>, 중년들의 사랑을 소재로 한 장편소설 <내가 그리로 갈게>, 그리고 늦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꿈을 향해 도전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뒤늦게 발동걸린 인생들의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