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전체'와 '편년체' 사이에서

어느 자폐인의 졸지에 프리퀄 출판 소식 12 - 서술 방법론 자체가 왜?

by 장지용 알비스
기전체.jpg 기전체로 쓰인 한국사 원전인 삼국사기

과거에 한국사와 중국사의 편찬 원칙에서 역사 기록을 어떻게 정리하느냐는 해석 방식 자체에까지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른바 '서술 방법론 자체의 문제'가 걸렸기 때문이죠.


크게 '기전체'와 '편년체' 방식으로 나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 외에도 '기사본말체' 니 '강목체' 같은 것도 있습니다만 대부분의 독자들은 신경 안 써도 되는 특유의 서술 방식이니 '기전체'와 '편년체'만 생각하셔도 됩니다.)


'기전체'는 대주제나 그 역사의 주체별로 묶어서 등급이나 우위를 두는 방식으로 이른바 본기-세가-연표-지-열전 등의 분류법을 따르는 것입니다. 한국사에서는 삼국사기와 고려사가 이런 방식으로 서술했던 것이 대표작입니다. (물론 삼국사기 본기[고구려/백제/신라 본기]는 일부 편년체 어법을 사용하긴 했습니다.)

'편년체'라는 방법은 몇 년 모월 모일 이런 식으로 적는 방식을 의미합니다. 한국사에서 조선왕조실록이 이런 기록법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즉, 둘 다 올바른 서술방법이다 이런 것이니 뭐가 좋은 것이냐 하는 논쟁은 안 하시는 것이 정신건강에도 유익합니다.


문제는 제 책인 <어느 자폐인의 졸지에 프리퀄>, 즉 <이상한 나라의 자폐인>도 이러한 서술 방법론적인 수정이 전면적으로 이뤄지게 되었다는 것이니다!


처음에 제가 의도한 방법은 '기전체'를 참조하여 분류별로 작업한다는 것이었는데, 막상 써보고 나니까 '편년체'처럼 시간 순서대로 썼습니다. 출판사 측에서 너무 시간 순서대로 써서 임팩트가 덜하다는 비판이 제기되었거든요. 이것에 대한 수정 작업이 한번 더 있을 예정입니다. 이것을 대주제 별로 묶어서 재편성한다는 것이 첫 번째 복안입니다.


그리고 공개할 수 있는 사안을 하나 더 공개합니다. 이 책에서 감동에 대한 부분을 소거했습니다. 이는 장애인 인권 문제 때문에 그러한 요소인데요. 장애인의 삶에 대한 편찬 원칙을 준수하기 위한 조치입니다. 바로 "장애인의 삶 이야기를 할 때 비장애대중이 생각하는 '감동' 요소에 대한 배제 원칙"을 세웠는데, 이는 이른바 인스피레이션 포르노 (Inspiration porn) 문제에서 그런 것입니다. 감동 찔찔 짜게 만드는 스토리 이런 것을 말하는 것이죠. 장애인의 삶을 보고 감동 스토리 그런 거 생각하지 말라 이런 이야기입니다. 아예 특별 챕터로 '이러한 인식으로 책을 읽기에는 여러분에게 감동 줄 만한 스토리 없어요!'라고 '셀프디스'를 하는 대목이 들어갈 예정입니다. 오히려 제가 적을 수 있는 수준에서 '흑역사'인 사건도 서술했을 정도니까 그런 것입니다. (2008년에 터지고 2013년에야 마침표를 찍은 알비스 최대의 흑역사 사건, 2009년 최악의 위기 등)


실제 해당 부분의 원고 일부를 사전 공개하면 이렇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힐링 메시지를 전달하라거나 힐링이니 감동이니를 전달해달라는 말을 하기는 어렵다. 나중에 사람들이 내게서 희망을 찾았다고 말할지, 힐링이 된다거나 감동을 받는다는 지는 독자의 판단이니 내가 쉬이 왈가왈부는 할 수 없지만 내가 의도한 바는 아니라는 것이다. 아직도 장애인 중 연사로 나서는 자들이 ‘동기부여강사’로 불리는 것도 살짝은 불만이 있다. 나는 어떠한 동기도 부여해줄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오히려 자폐인의 존재를 대중적으로 알리고, 자폐인의 존재를 ‘그 딴 데’에서나 보지 않고 예상외로 가까운데 있는, 이상하게도 낯설지 않은 존재라는 것을 알리는 활동에 더 집중하고 싶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나 자신부터 힐링, 감동, 동기부여 이런 것을 할 자격이 없는, 고난 많은 삶이나 격정적인 삶, 흑역사까지 겪었던 그런 삶의 시간이 이것을 대신 말해주고 있다. 내가 구직에 안간힘을 써도 탈락 1순위라는 사실을, 공공분야 채용시험에 그렇게 낙방을 했던 그런 사람이었음을, 그래도 도전한다고 아등바등하는 그런 존재로는 설명할 수 있겠지만, 내가 남을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나도 치유받고 싶은, 과도하게 쫓겨온 것 같은 삶을 나도 이렇게, 책을 통해 힘들었던 삶에 대한 녹취를 남겨놓는 방법으로 나를 치유하고 싶은 마음에 이런 이야기를 통해 내 삶을 증언하고, ‘이제는 말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 내 속마음이다.

(중략)

내가 진정 감동하는 것은 정작 SSG 랜더스 야구선수들이 안타와 홈런을 치고(점수가 나면 더 좋다!), 두둑한 금액이 찍혀 나온 월급명세서와, 맛 좋은 치킨 한 마리와, 외국인 미녀 스타들의 매력적인 모습, 영어 한마디 더 제대로 써보기, 웃긴 TV 프로그램이나 넷플릭스 오리지널을 보고 까르르 웃는 그런 것에서나 그렇다. 그리고, 내가 극복한 이야기를 하나 해달라고 한다면 한 가지 전제조건은 있다. 제발 좀 나를 대기업이나 공공기관, 그것도 필기시험도 치는 공채 시험에 면접까지 붙여주고 발령받아 일한 뒤에 실컷 떠들어주겠다. 내가 구르고 깨졌던 직장 입사시험과 그 똑같은 이야기 물어보는 그런 면접 뒷담화나 실컷 떠들어주겠다. 그 과정에서는 여러분은 실컷 극복에 대한 희망, 힐링, 동기부여 이런 것을 느끼셔도 내가 오히려 느끼라고 떠밀고 싶은 심정이니 말이다!


그 외에는 작은 소제목들이 더 재미있는 제목으로 바뀔 것 등도 있는데, 이는 편집 과정에서 결정될 것입니다. 나름, 재편집을 해본 뒤 새로운 재미있는 제목으로 바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제가 전에 공약한 '2022년 설 명절 이전 계약 합의 완료'는 이루지 못하게 되어서 이를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다만, 출판사 측은 출간에 대한 의지가 확고하다고 연락이 와서 이것을 신뢰하고 작업에 적극적으로 나설 것이니, 알을 깨고 나오는 것이 대단히 어렵다는 것을 보여드립니다.


좀 더 기다려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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