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만장 자폐인 - 7 : 2006년, 고2, 내가 겪은 학교폭력의 절정
나는 솔직히 넷플릭스 오리지널 <더 글로리>를 글로만 봤습니다. 사실 몇몇 장면은 보지 않는 것이 제 정신에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특히 발단 부분에서의 학교폭력 피해 장면은 모양은 다르더라도 결국 매한가지의 결말을 안았던, 그런 제 역사에 비춰봤었을 때 보지 않았던 것이 더 나았을 것입니다. 그 일이 끝나고 살아남은 시간이 그 시간보다 더 길어졌음에도, 그 시절의 ‘전쟁 트라우마’는 아직도 남아있는 것입니다. 거의 죽음을 앞두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던 시절도 분명히 존재했었습니다. 실제로 죽음으로 가는 길을 걷지는 않았지만, 실제로 나는 그 죽음이라는 것이 탈출구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가장 험난한 시간이었습니다.
세상은 이러한 문제를 ‘학교폭력’이라고 부릅니다. 오죽하면 이제 한국에서도 저와 똑같은 자폐인들의 학교폭력 피해를 연구하는 프로젝트에 들어갔을 정도입니다. 대단히 충격적이었던 ‘전쟁이라면 전쟁’이었습니다. ‘유린당했다’라는 말도 이상하지 않은 그런 전쟁이었던 것입니다. 과거 내가 학교폭력을 당했던 상황의 사진을 보고 중학교 선생님은 오죽했으면 당시 이라크 전쟁 와중이라 말이 많았던 아부 그레이브 교도소의 포로 학대 사진 같은 느낌이 든다고 말했을 정도였습니다.
한국에서 장애학생에 대한 폭력 피해는 거의 대다수가 겪을 정도로 크나큰 문제입니다. 학교폭력을 당하지 않은 장애학생이라면 대체로 특수학교 출신이거나, 뒤에 무엇이든 간에 ‘빽’이 있다거나, 아니면 ‘객체화’되어 다른 학생 그룹에서 사실상 제외된 존재일 것입니다. 최근 학설에서는 자폐인 학생의 경우 사회적 활동 능력과 학교폭력 피해 비율은 정비례 관계라는 주장도 제기될 정도입니다. ENA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제4회에 나온 우영우의 고등학생 시절 이야기는 사실 자폐인 학생 중 사회적 활동 역량이나 학업 역량이 있다면 상세한 내용만 다르지 실제로는 결국 똑같이 겪는 문제라는 것입니다.
조금은 다르다고 생각하면 한국 학교에서는 무엇이든 명분을 붙여서 차별로 이어지는 구조입니다. 한국 학교에서 다르다고 차별을 못 하는 경우는 그 학생의 학력이 좋다거나, 부모가 부유층이거나, 고위층 또는 유력 인사이거나하는 등 ‘이 문제가 부모 싸움이 되면 일방적으로 지는 존재’의 경우만 적용될 뿐입니다. 어떻게 보면 한국 학교의 학생 ‘성분’은 자신의 ‘학력’과 함께 부모의 ‘신분’에 따라 달라질 것입니다. 제가 그나마 학교폭력의 피해가 상대적으로 적었던 이유 중 하나가 사실 중학교 3학년부터 고등학교 3학년까지 교사의 기록에서도 반드시 기록해야 했던 절대적인 내용인 그 분야에서는 학교 내 최강자로 손꼽히는 사회와 한국사 성적 때문이기도 했으니까요. 다른 학생들이 내 학업 성적을 학교폭력의 명분으로 삼을 수 없었던 절대적인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내가 겪은 학교폭력의 기억 중 유일하게 다행이었던 부분이 이것이었습니다. 게다가 내가 자란 지역은 학생시절 중소노동자층이 많았던지라 투표율까지 낮은 지역이라 상대적으로 경제적 수준으로 따지기엔 ‘도토리 키재기’식 경제적 수준이었습니다.
내가 경험한 학교폭력은 <더 글로리>보다는 ‘순한 맛’이지만 당사자의 고통으로선, 그리고 그 이후의 고통까지 합치면 거의 ‘약간 매운맛’ 같은 느낌입니다. 게다가 당시에는 국가인권위원회가 갓 생긴 시점이라, 대중들이 국가인권위원회를 잘 몰라서 이 시점에는 국가인권위원회가 인권 해설 문화 콘텐츠인 영화 <여섯 개의 시선>, 만화집 <십시일反> 등을 대거 제작한 시점이기도 해서 그랬습니다. 교육청 등의 학교폭력 정책은 그제야 조금씩 만들어졌고, 당시의 사회적 경각심은 지금보다 훨씬 낮았던 시절이었습니다. 학교폭력에 대한 사회적 경각심이 높아진 시점은 거의 2010년대 후반에 가서야 본격적으로 학교폭력이 거의 옛날 말로 ‘호적에 빨간 줄’ 수준의 인식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는 2000년대에 학교를 다녔습니다. 그러니 학교폭력을 견제할 정책이 부족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어느 정도 인식만 하던 시대라, 그 시절에는 단순 폭행보다는 변칙적인 공격 위주였습니다. 특히 소지품에 대한 공격이 제일 큰 문제였습니다. 몇몇 소지품은 분실되어 다시 사야 했거나, 아니면 훼손되고 나서도 영영 수리할 수 없었을 수준이었습니다. 특히 모욕적인 것 중 하나는 합법적인 쓰레기통이 있음에도 내 자리가 쓰레기통 대용으로 쓰인 전례도 있었습니다. 나중에 사진을 찍어야 했을 정도로 교복에 피가 묻는 사태까지 발생했고, 심지어 폭행 피해로 실핏줄이 터지고 인대가 늘어나는 바람에 깁스를 하고 등교한 날도 있었을 정도입니다. 이 와중에 깁스까지 할 정도로 학교폭력 피해를 입었음에도 그들은 ‘진짜로 장애인이 되었다’라고 또 ‘2차 가해’를 했습니다.
심지어 사고방식도 학교폭력의 공격 명분이었습니다. 나는 기독교 신자로, 그 당시에는 잠시 냉담했던 시절이었지만 그래도 있던 기독교적인 사고관념 때문에 불교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그야말로 고문이었습니다. 학교에서 불교 이야기를 해도 화를 안 내던 것이 수업시간에 불교문화유산이나 고등학교 <윤리와 사상>에서 동양윤리에 대한 설명이라면서 불교 사상 이론을 소개할 때 정도뿐이었습니다. 심지어 고등학교 때도 한국사 과목에서 은근히 어렵게 느껴진 부분이 바로 불교 관련 내용이었을 정도입니다. 그런 트라우마 때문에, 고등학생시절부터 벼르고 있었던 가톨릭이나 성공회로 넘어가는 프로젝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여 학교폭력이 끝난 8년 뒤인 2016년에야 성공회에 입교할 정도로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폭행 같은 경우도 있었는데, 고등학교 때는 아예 ‘때릴 명분’의 ‘합리화’를 이유로 내가 복도에서 지나가다가 일부 패거리들이 뒤에 밀고, 실제로 때리려는 학생들이 ‘너 왜 밀쳐?’ 라는 명분으로 폭행을 자행한 적도 있었을 정도입니다. 이들의 특징은 절대로 내 시야에는 때리려는 학생 말고는 없게끔 만들고 폭행을 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진정 두려워하는 것은 학교 내 처벌이었습니다. 특히 2020년대 이후 이랬다면 그들이 진정 꿈꾼 세상은 ‘봉쇄’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2020년대 이후 학교폭력 전과는 생활기록부 기재라는 규정 때문에 결과적으로 대학입시 자격에서 탈락되니 곧 ‘한국사회 경쟁 면허 취득 불가’ 판정을 받는, 평생 꼬리표가 붙어 다니는 문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한국 사회가 하나의 종교라면 학교폭력은 2020년대 이후 ‘입교 자격이 상실되는 결격 사유’가 되었습니다.
한국에서 경쟁이라는 것은 거의 ‘국가 종교의 핵심 교리’ 일 것입니다. 한국 사회의 논쟁의 뿌리는 결국 한 곳으로 모인다면 그것은 ‘경쟁’ 일 것입니다. ‘공정’조차 진정한 의미의 ‘공정’이 아닌 ‘동일한 경쟁방식에 따른 승자독식’이라고 해야 정확할 정도니까요. 한국사회가 숭상하는 것은 ‘균일한 경쟁 룰에 의한 단일 경쟁체제에 의한 사회구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수능’입니다. 한국에서 수능 시험일에 시위를 할 수 있는 집단은 ‘수능을 거부하는 자’ 이외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일부러 그런 집단을 빼면 수능 시험일은 한국 사회의 ‘공정’을 위해 ‘시험 보는 자’를 위해 ‘이미 시험 본 자’나 ‘수능 이전의 사람들’이라거나 ‘수능이 남의 집 잔치’인 사람들이 모두 숨을 죽여야 하는 국가의 ‘제삿날’ 같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한국 학교에서 경쟁을 치러내기 위해서는 가장 ‘좋은 방식’이 바로 ‘상대방을 제거하는 방식’입니다. 그래서인지 한국 게임 중에서 히트한 작품인 ‘배틀그라운드’가 바로 상대방을 제거하되 협력이란 없고 수단 방법은 가릴 필요가 없는 무제한 경쟁 방식인데, 살아남은 최후의 1인만 승리자가 되어 ‘치킨’을 획득하는 구조가 어떻게 보면 그런 한국사회의 경쟁 방식을 압축한 장면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내가 학교 다닐 때 들었던 욕설 중 하나가 그런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는데, 그 욕설은 ‘너는 꽃동네로 가라!’였습니다. ‘꽃동네’라는 의미 자체가 “너는 장애인이니까 이 세상에 살 자격이 없고 넌 우리의 ‘사랑’ ‘얻어먹을 힘’으로 살아”라는 말이었으니 모욕적인 말이었습니다. 장애인 같은 집단은 그냥 ‘수용소’에 몰아넣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게 한국사회니까요. 이것이 최근에야 장애계의 ‘탈시설화’ 구호로 점점 해체되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도 트라우마는 여전합니다. 대학병원으로 정신과를 옮길 때도 의사 후보를 다 추렸음에도 선택이 재빠르고, 그 결과는 서울 중앙대학교병원으로 간다라는 결정 자체가 된 것도 그 학교폭력의 트라우마 때문입니다. 다른 경쟁 후보가 있었던 대학병원의 소유 대학이 하필 학교폭력 가해자가 나중에 다닌 대학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가해자의 결혼 소식을 들었을 때, 저는 정신적으로 쓰러진 상태였을 정도입니다. 육체는 안 쓰러져도 정신은 쓰러진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진단명을 들어보니 ‘쇼크에 가까운 공황 증세’라는 진단이었다고 합니다.
학교를 떠난 지 몇 년 지났음에도 뭔가 아침만 되면 ‘오늘 학교 안 가고 싶다’라는 말이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옵니다. 아직도 그때의 공포와 지금의 경쟁이라는 것이 같이 겹쳐지면 그런 무의식을 느끼게 되는 것 같습니다. 한국사회에서 ‘경쟁’이 ‘지배적 종교’가 된 이상 이것을 깨는 것은 엄청난 뒤의 일일 것입니다. 그런 ‘경쟁’이 무너지는 날에 한국의 자폐인들은 그 ‘희생 제단’의 제물이 되었고 그 분량이 산처럼 쌓인 뒤인 ‘시산’(屍山)이 된 뒤의 일일 것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국가 지도자인 프랑스의 샤를 드 골이 1944년 파리가 해방되었을 때 연설로 선언한 것을 제 방식으로 비틀면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자폐인들은 상처 입었습니다, 자폐인들은 파괴되었습니다, 자폐인은 고문받았습니다, 하지만 자폐인은 해방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