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만장 자폐인 - 5 : 2008년, 대학에 와서 사람 구별 어려울 때
2023년 4월 23일, 내 집, 점심을 먹고 있는 와중에 프로야구 경기 중계방송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와중에 배우 김건우가 시구에 등장했습니다. 그 와중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나 : 저기 그 시구가 손건우라는데?
누나 : 누구야?
나 : <더 글로리>에 나온 그 뭐시냐… (나는 <더 글로리>를 글로만 봤다)
(자막이 나오고 ‘배우 김건우’라고 적혀있었다)
누나 : 아, 그 손명오 역으로 나온 김건우야!
나 : 뭐요? (시구 장면이 방송되고) 아!
이런 일은 자주 벌어지는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내가 가진, 또 어떻게 보면 자폐인의 특성이라 할 수 있는 일 중 하나일 것입니다. 바로 사람들을 잘 구별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더 심해진 것은 대학시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대학시절, 대학에는 매우 많은 학생들이 오가고 있었고 내가 다닌 학교는 6천 명 정도가 다니고 있었기에 누가 누군지를 잘 구분하지 못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게다가 학과의 눈치를 살피지 않고 생활하는 자들도 있다 보니 누가 누구인지를 잘 구분하는 것은 더 어려웠습니다. 특히 신입생들이 들어오는 3월이 되면 대면식이다 뭐다 해서 구분을 겨우 하기도 하지만, 워낙 인상이라거나 행적이 독특한 이가 아니면 잘 구분하기는 어렵습니다. 심지어 이름이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들의 경우까지 되어야 겨우 구분하지만 이번에는 얼굴과 이름을 매치시키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자주 선배들이 지적하는 것이 인사를 잘 안 하는 것, 누구인지 잘 몰라하는 것 자체가 대학생활에서 의외의 고충이었습니다. 누가 누구였는지를 잘 구분하지 못하니 지적을 자주 받는 것이겠지요. 대학시절 사람 구분을 제일 못해서 사달이 난 사건은 하나 있는데, 대학 1학년때 총장님(당시에는 이현청 총장이었습니다.)이 학과 회식에 격려차 방문해 주셨는데 저는 총장님을 모르고 ‘쟤 총장이야?’라고 발언했다가 한동안 회자되었습니다. 나중에 학교에서 총장님을 뵌 적이 있었는데, 그때 정식으로 사과드린 사건이 있었을 정도입니다.
직장은 그나마 낫기도 하지만, 직장은 빠지는 날 없이 매일 같이 얼굴을 봐야 하는 점도 있고, 또한 몇몇 직장은 명찰을 패용하고 있다 보니 이름을 딱 보고 이름 장난을 친 적도 있을 정도입니다. 예를 들어 일전에 다닌 직장에 ‘임관규’라는 직원이 있었는데, 야구선수 중에 ‘임찬규’가 있다 보니 이름 장난을 친 적도 살짝 있었습니다. 공교롭게도 임찬규는 LG 트윈스 선수인데 그 당시 다니던 직장이 LG전자의 자회사였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직장이라지만 사람 구분을 못 하는 경우는 더 있습니다. 특히 객원으로 오는 사람들은 더 심해서, 처음에 인상이 좋았던 사람이 회의차 온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고 놀라기도 했습니다. 처음에는 모델이 온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회의 때문에 온 사람이었습니다. 다행히 지금도 그 분과 연락이 좀 되어서 비공식 호칭이 그 시점의 유명한 모델이었던 ‘미란다 커’에서 유래한 별명을 쓰고 있습니다. 물론 그분께서는 그러지 말라고 하고 있지만 모델 같은 인상은 지워지지 않습니다. 게다가 사진을 전공한 저로서는 모델 보는 시선이 어쨌든 있는 것은 사실이니까요.
그런 것은 연예인으로 가면 더 심해집니다. 연예인들은 누가 누군지를 전혀 구분하지 못하는 사례가 더 많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연예인들은 콘셉트 때문에 촬영하는 캐릭터와 정체를 구분하기 더 어려울 정도입니다.
심지어 저는 나중에 찾아보고 나서야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우영우 변호사와 <스토브리그>의 이세영 팀장이 같은 배우인 박은빈이라는 사실은 검색을 하고 나서야 알았습니다. 물론 그때에 가서야 제대로 알게 되었지만 박은빈은 연기를 워낙 잘해서 캐릭터 소화력이 그만큼 대단했다는 의미이기도 했지만 어쨌든 같은 배우임을 나중에야 알았으니 얼마나 사람 구분하는 것이 워낙 어렵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또 다른 사건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돌의 경우에는 전혀 누가 누구인지 구분할 수 없습니다. 일전에 아이돌들의 외모가 다양하지 않다는 비판이 있었을 때, 저는 솔직히 이해가 되었습니다. 특히 걸그룹은 콘셉트가 과거와 달리 거의 비슷한 콘셉트를 채용하고 있다 보니 저는 아이돌 사진만 주고 누가 어느 그룹의 누구인지 맞추라는 퀴즈를 주면, 0점을 맞을 것입니다. 점수가 나와도 거의 찍어서 맞춘 것에 가까울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구분이 잘 되고 좋아하는 연예인이 과거 <미녀들의 수다>의 영향도 남아있어서 그런 것도 있다 보니 저는 한국에서 활동하는 외국인 여자 연예인들에 더 눈이 갈 정도입니다. 그들은 최소한 구분이 될 수 있거든요. 그저 인상이 조금 다르기 때문에 구분이 되는 것입니다. 다만 TV를 잘 안 봐서 그런지, 미녀들의 수다 이후 외국인 여자 연예인들은 조금 구분이 어렵기도 합니다. 믿거나 말거나라고 해도 사주를 봐도 외국인 여자가 더 잘 맞는다는 이야기까지 있으니 외국 여자가 더 눈에 잘 들어오는 것 같습니다. 역설적으로 TV를 안 보는 이유 중 하나가 어떻게 보면 ‘연예인들이 누가 누구인지 전혀 구분할 수 없어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름도 구분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이름이 비슷한 경우는 당연히 헷갈리고, 이름이 똑같으면 그 인물의 특징으로 구분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대학 시절에 같은 이름을 가진 학생이 있었는데 학교에서는 A, B로 구분해서 불렀다고 하는데, 나중에 ‘A’가 이름을 바꿨다고 해서 지금은 해결된 문제입니다. 그래서 저는 명찰을 패용하는 사람들은 겨우 구분이 되지만 이렇지 않으면 전혀 구분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외국인 같은 경우에는 이름으로만 부르면 더 헷갈리기 쉽기 때문에 성씨까지 더 붙여야 헷갈리지 않습니다. 일례로 ‘에바’라는 이름으로는 전혀 한국 방송계에서 활동하는 ‘에바’가 딱 떠오르지 않습니다. 한국 방송계에서 ‘에바’라는 이름의 외국인 방송인이 2명(영국인 에바 포피엘, 러시아인 이에바 또는 에바 코노노바)이나 있어서 저는 반드시 성씨를 꼭 붙여서 호칭하거나 글을 써야 하는 실정입니다.
다른 자폐인들에게도 물어봤습니다. 자신들도 사람들을 구분하는 것이 쉬운지 어려운지 말입니다. 한번 물어봤는데, 다들 똑같이 사람 구분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고 토로했습니다. 심지어 어떤 자폐인은 ‘나는 아는 사람들도 헷갈릴 정도다’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어떤 자폐인은 ‘나는 쉴 때 사람들이 나오는 것을 보지 않는다’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 제가 좋아하는 것들이 대체로 사람들이 나오더라도 뉴스나 스포츠 중계, 특히 야구 중계처럼 사람들 이름이 아예 적혀 나올 때가 아니면 잘 보지 않습니다. 야구 같은 경우에는 화면에 나오는 유니폼에 선수 이름이 적혀있으며 자막으로도 선수 이름이 나오고, 경기장에서도 전광판에 이름이 적혀있고 심지어 선수가 나올 때마다 방송으로 호명한 뒤에 등장하기 때문에 그나마 누가 나왔는지를 구분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특정 행사 때 유니폼에 박는 이름을 통일해서 출전하는 날 같은 경우에는 자막이나 호명을 잘 보고 들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제가 정작 자주 보는 프로그램은 그래서인지 사람들도 중요하지만 사람이 아닌 개념이 더 중요한 프로그램들을 더 좋아합니다. 여행지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은 여행자가 중심이 아니라 여행지의 풍광이 더 중심이라거나, 다큐멘터리에서 사람들의 역할은 주로 ‘해설자’ 역할을 하기 때문에 더 집중해서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제가 자주, 그리고 잘 찍는 사진의 종류도 대체로 다큐멘터리 사진이거나, 아니면 사람이 중립적으로 나오는 뉴스사진 같은 경우가 많으니, 그런 것이 어떻게 보면 사진적 특성이 자폐의 영향을 받지 않았나 싶습니다.
저는 아무래도 사람들 구분하는 것이 앞으로의 사회생활에서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또 어려운 일이라는 느낌이 지워지지 않습니다. 그래서인지 저는 언제나 소원이 ‘사원증을 패용하고 일하는 직장에 다니는 것’이라고 농담 같은 진담을 하기도 합니다. 저는 직장생활에서 도움이 되는 것을 하나만 꼽으라면 의외로 ‘사원증’을 꼽고 싶습니다. 이름이 다 적혀있으니 사람들 구분이 되기 때문에 사람 구분 실수를 하지 않아도 되니 다행일 뿐입니다. 자폐인들이 많이 힘들어하는 사람들에 대한 문제 때문에, 어떤 이들은 아예 쉬는 날에는 사람을 만나지 않거나 사람들이 나오는 것을 보지 않는다는 사례도 있으니 그럴만합니다. 내가 직장에 잘 다니려면 의외로 ‘사원증’이 필요한가 봅니다.
나에게 사원증을 달라! 그래야 내가 직장에 잘 다닐 터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