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에 투입되는 우리의 '매몰 에너지'
2011년 상경해 지금까지 회기동에 줄곧 살면서 10년 가까이 이 동네의 변화상을 눈으로 보아왔다.
많은 대학가와 주요 상권이 그렇듯이 특정한 아이템이 유행을 하면 우후죽순으로 들어섰다가, 반년만에 우르르 폐업을 하고 다른 업종으로 옮겨간다.
개강과 함께 학생들의 유입으로 반짝 성공을 맛보았다가 2-3달이 채 가지 못해 하나 둘 스러지는 가게들을 보며 어쩐지 마음이 쓸쓸해 지곤 했었다.
그런 가게들의 탄생과 소멸의 주기를 지켜보며 나도 한 살 한 살을 먹고 어엿한 사회인이 된 것이다.
가장 최근에 목격한 ‘유행’은 작년에 있었던 ‘흑당 버블티’ 전문점이지 싶다.
경희대 정문 쪽 상권에서만 3개의 ‘흑당 버블티’ 프랜차이즈가 생겼고 골목 구석구석까지 합하면 심심치 않게 눈에 띄었다.
하지만 예전의 가게들이 그랬듯 2개월을 채 버티지 못한 채 폐업하거나 업종을 바꾼 곳이 대다수다.
그런 회기동에 요즘 다시 한 업종이 자주 눈에 띄기 시작했다.
바로 스터디 카페이다.
이 추세는 실은 1-2년 전부터 시작되었었다.
정문 쪽 상가 2층 자리에 유명 빙수집이 나가고 스터디 카페가 들어온 게 2년 전이다.
그 무렵 회기역 근처와 경희대 근처에 4-5개 정도 스터디 카페가 생겼다.
‘유행’에 가까운 잠식의 조짐이 보인 건 2019년이었다.
정문 바로 앞 상가 꼭대기층에 있던 오래된 당구장이 나가고 대형 ‘스터디 카페’가 들어선 것이다.
대학시절 우리 과 복학생 선배들의 아지트였던 그곳이 다른 것도 아니고 스터디 카페로 바뀌다니,
이제 정말 ‘노는 대학생’은 멸종되어 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대학생들은 입학과 동시에 취업을 준비하느라 바쁘니, 새내기 시절의 낭만을 기대하기란 어렵지 싶다.
올해 들어서, 특히 최근 2-3개월 사이 회기 상권에 스터디 카페의 등장이 더 공공연해졌다.
정문 앞 ‘미스터피자’가 나가고 스터디 카페가 들어섰고, 바로 옆 블록의 오래된 라멘집도 나가고 스터디 카페로 바뀌었다. 경희대 메인 상권으로 향하는 회기로에도 몇 개가 더 생겼다.
지금까지 주로 유행으로 밀려왔다 밀려나간 업종들은 주로 먹고 노는 것과 관련된 것들이었다. 버블티, 대만 카스텔라, 핫도그, 빙수..
하지만 이제는 ‘스터디 카페’가 들어와서 자리를 잡았다. 이들은 다른 업종들처럼 가볍게 휩쓸려 나가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 안심이 되기보다 오히려 가슴이 답답해진다.
모두들 공부를 하고 있다.
내 주변에 있는 친구들, 어떤 전공을 하였든, 음악을 했든 미술을 했든 영화를 했든 간에
지금은 공부를 하고 있다.
밥벌이를 위한 노동을 하듯이 나인 투 식스, 재능과 상관없이 삶의 목표에 상관없이 공부를 한다. 아니, 재능을 발휘하고 삶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공부를 한다. 공부만 한다.
공부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다…
사회가 상상하는 '노동'의 범주가 협소하고, 그에 따라 주어지는 노동의 기회가 적고
그 기회라도 잡지 못하면 어떻게 인생을 꾸려가야 할지 대안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모두 기약 없는 ‘준비’를 하면서 유예된 청춘을 보내고 있다.
경제학에서 '매몰 비용'이란 '어떤 선택의 번복 여부와 무관하게 회수할 수 없는 비용'을 가리킨다.
지금의 20대가 생업을 갖기 위해 들이는 노력들을 나는 '매몰 에너지'라 부르고 싶다.
자기 계발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직장에서의 직무 수행과도 큰 관련이 없는
단지 경쟁에서 우위에 서기 위한 공부를 하고 스펙을 쌓는 일에 대부분의 에너지를 쓰고 있다.
이건 분명 기이한 현상이다.
모두들 생업을 시작할 자격을 얻기 위해서 건장한 젊은 육체를 작은 가능성 안에 구겨 넣으며 어떻게든 규격화된 존재가치를 입증하려 한다.
나도 그중 하나이다.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는 스터디 카페는 공부밖에 할 수 없는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오늘날 대학가의 풍경은 그런 것이다.
내가 고등학생일 때만 해도 선생님과 부모님은 ‘대학 가면 하고 싶은 거 다 해’라는 말을 공공연히 했고 우리는 모두 공공연히 믿었다.
지금도 그런 말을 하는 선생님과 부모님들이 있는지, 아이들은 그 말을 믿기나 하는지 의문이다.
대학은 취업을 위한 관문이 되었다.
나는 대학시절 영화 제작 동아리에서 활동했다. ‘영화연구회 그림자놀이’라는 이름을 듣고 처음에는 영화 감상 동아리인 줄 알고 가입했다. 그곳에서 선배들에게 시나리오 작성, 촬영, 편집을 배웠고 주말마다 회기동 일대와 서울 곳곳을 쏘다니며 영화를 찍었다. 편집을 하고 상영회를 열었다. 다른 무엇과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추억이다.
80년대에 생겨났던 우리 동아리가 재작년 기수를 마지막으로 작년에 폐회되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영화를 만들고, 시를 쓰고, 여행을 다니던 한가로운 대학시절이 사치가 된 것일까.
다른 업종에 비해 단지 수익성이 괜찮다는 이유에서 많은 스터디 카페들이 들어선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렇다면 더욱 나쁘게만 느껴지는 우리 동네의 새로운 유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