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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노신 Dec 16. 2020

상사가 준 청바지를 쓰레기통에 버렸다

생각 없음에 대한 분노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으로 다녔던 회사에서의 일이다.

상사는 자취생인 나를 이모저모로 챙겨주고 싶어 했다.

아침에 간단한 유부초밥이며 과일을 가져다 주기도 하고, 부서에서 간식이 남으면 내 몫을 챙겨서 가져가라고 했다.

그녀는 나에게 옷도 주었다.

인터넷 쇼핑에 실패했다며 본인에게 맞지 않는 티셔츠, 경량 패딩, 원피스 등을 가져와 마음에 들면 가지라고 건네곤 했다. 감사하다고 하면서 종종 받아 입었다.


2019년 2월, 암 말기로 투병 중인 외할아버지를 위해 매일 병원으로 퇴근을 하던 즈음이었다.

그 회사에서 2월은 다음 분기 운영 준비와 행사 등으로 1년 중 가장 바쁜 시기였다.

일이 많았지만, 마음 한켠은 외할아버지의 병실에 가 있었다. 병세는 하루가 다르게 나빠지고 있었고, 의료진으로부터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말도 이미 들었다. 일을 하다가도 연락이 오면 급히 가야 할 것 같아 미리 말을 해두어야 했다.


상사에게 사정을 설명하며 그러한 고로 근무 중에 급히 가게 될 수도 있다는  말을 했다.


그런데 상사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이렇게 바쁜데 왜 지금 아프시다니?”

웃으면서 특유의 명랑함을 섞어 아휴 참, 아무튼 알겠어, 했다.


나보다 한참이나 나이가 많은 그녀는 이런 일을 많이 겪어왔을 것이다.

조부를 여읜지도 오래이고 주변의 여러 사람들을 떠나보내며 시간이 많이 흘렀기에 슬픔에 무뎌졌는지도.

또 분위기를 무겁지 않게 하려고 일부러 별 것 아닌 듯 말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화가 났다.


그날도 그녀는 나에게 옷을 주었다.

“우리 딸이 산 건데 한 번을 안 입더라고. 자기 맞으면 입어.”

거의 새것인 청바지였다.

청바지가 든 가방을 퇴근할 때 가지고 나왔다.


집에 도착하여 곧장 쓰레기 분리수거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청바지가 든 가방을 바닥에 힘껏 내동댕이쳤다.

그녀의 악의 없는 해맑음을 이해하기 싫었다.

상사인 그녀에게 한마디도 하지 못한 나는 죄 없는 청바지에게 앙갚음을 하고 있었다.


바닥에 떨어진 청바지를 주워 쓰레기통에 던져 넣자,

조금은 속이 후련했다.


그녀는 나의 분노를 알까. 아마 그 말을 하는 순간도, 하고 나서도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생각해본 적 없겠지만 그녀가 나에게 준 청바지는 그 생각 없음의 희생양이 되어 말없이 쓰레기통으로 들어갔다.


때로 사람보다 말 없는 사물이 더 나은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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