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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노신 Dec 21. 2020

언제나 인격이다

운명은 현실적 선택지들의 범위를 결정하지만

언제부터 글을 읽으며 그 글의 호흡을 베끼고, 질감을 만지게 되었는지 잘 기억은 나지 않는다.

글을 읽다가 나와 호흡이 잘 맞고, 글의 어감이 아름다우며 ‘이것이 내 마음이야’라고 생각되는 글을 발견하면 마치 기도문을 옮겨 적듯 그 글을 옮겨적고 손바닥에 소중히 쥐고 다녔다.


복잡한 세상에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해 누군가의 손을 잡듯이

또 위험한 곳에 들어서며 있던 곳으로 돌아가기 위해 의지할 줄을 찾아 잡듯이

그렇게 나는 글의 손을 잡고 다녔다.




나 자신이 체스판 위에 올려진 말과 같은 존재로 느껴져,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서 무력하게 느껴질 때

그렇지 않다고, 우리는 여전히 숭고한 존재이며 자기 운명의 주인일 수 있다고 알려준 책의 구절이 있다.


우리의 선택, 우리의 생활 방식, 우리의 삶의 궤적을 합작하는 자율적인 요소로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운명'이다. 운명은 우리가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는 종류의 상황으로, 태어난 곳이나 부모의 사회적 위치, 태어난 시기처럼 우리의 행위와 관계없이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이다.
 
다른 하나는 인격이다. 우리는 적어도 원칙적으로는 우리의 인격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즉 우리는 인격을 형성하기 위해 노력하고 인격을 함양시킬 수 있다. '운명'은 현실적 선택지들의 범위를 결정하지만, 그 범위 내에서 우리의 선택을 결정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인격이다.

-지그문트 바우만,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p.39-40


상황은 좋지 않고, 세상은 나에게 유리하지 않고, 나는 참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느껴질 때

나는 이 구절을 다시 펼쳐보며 많은 용기를 얻고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우리의 선택지는 타의에 의해 결정되어버린 것만 같고,

내게 주어진 현실 가운데 스스로가 개입할 수 있는 영역은 아주 적다고 느껴질 때

한번 되뇌어 본다. '우리의 선택을 결정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인격이다'하고.


"무릇 지킬만한 것 가운데 네 마음을 지키라."라고 잠언은 말한다. 현대의 석학 지그문트 바우만의 말에 따르면 '마음' 곧 인격을 함양하는 것이 우리가 운명을 상대로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자 전부이다.

그리고 우리는 때로 인격으로 인해 운명이 바뀐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고 듣는다.


오늘도 바꿀 수 없는 현실적 선택지를 두고 고민하고 씨름하며 살아가지만

정작 내가 고민해야 할 것은 '현실적 선택지'이기보다는 나의 '인격'이 되어야 함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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