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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노신 Jul 05. 2020

[신간]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

세상 속의 자신을 '나쁘다'말하는 소년

혜화동을 걷다가 서점 '위트 앤 시니컬'을 발견했다.

그동안 SNS를 통해 그곳의 존재를 알고 있었을 뿐 방문하기는 처음이었다.

이곳 서점 2층은 시집 전용으로 운영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다는 광화문 교보문고보다도 보유한 시집이 더 많아 보였다. 창비시선의 1호 시집 신경림의 '농무'도 처음 구경했다. 다른 대형 서점에서도 잘 볼 수 없었던 시집, 오래된 시집들도 많아서 오랜만에 어린아이처럼 신이 났었다.


이렇게 많은 시집들 중에서 허연 시인의 신간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를 구입했다.

허연 시인은 내가 최근 3-4년간 가장 많이 읽고 좋아했던 시인이다.

시를 읽고 쓰는 일이 한낮의 한가한 꿈은 아닐까 생각하며 현실감 위에 안착하기 위하여 발버둥을 치던 무렵에 허연 시인의 단단하고 날렵한 문장들이 힘이 됐었다.


"불빛이 누구를 위해 타고 있다는 설은 철없는 음유 시인들의 장난이다. 불빛은 그저 자기가 타고 있을 뿐이다. 불빛이 내 것이었던 적이 있는가. 내가 불빛이었던 적이 있는가.


가끔씩 누군가 나 대신 죽지 않을 것이라는 걸. 나 대신 지하도를 건너지 않고, 대학 병원 복도를 서성이지도 않고, 잡지를 뒤적이지도 않을 것이라는 걸. 그 사실이 겨울날 새벽보다도 시원한 순간이 있다. 직립 이후 중력과 싸워온 나에게 남겨진 고독이라는 거. 그게 정말 다행인 순간이 있다."


시인의 2008년 시집 <나쁜 소년이 서 있다>에 실린 '안에 있는 자는 이미 밖에 있던 자다'중 일부이다.

이 시집의 自序(서문)에서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결국, 범인(凡人)으로 늙어 간다. 다행이다."


내가 경험한 바 시를 쓰는 행위는 내밀한 자기표현인 동시에 엄격한 자기 검열이 뒤따르는 일이었다. 그 과정에서 자칫 균형을 잃으면 감정에 치우쳐 자기 연민에 빠지거나 자신을 가혹하게 바라보기도 한다. 이런 일이 정신적으로나 감정적으로 소모가 큰 일이기 때문에 고통을 받다 보면 자연히 스스로를 '다른 사람들과 다른' 존재로 인식하게 되기 쉽다.

희구하는 것에 닿기 위해 고통스러워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스스로의 모습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통합된 자아를 찾고 균형 있게 살아가는 데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 혼란스러워하고 있던 때에 스스로를 범인(凡人)이라 칭하며 '다행이다'라고 말하는 시인의 말을 듣고 비로소 자아비판을 멈추고 마음을 내려놓게 됐다.

나는 범인(凡人)이다. 그래서 다행이다.

그렇게 되뇔 때면 머리가 차가워지며 마음은 단단해졌다.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일이 힘에 부친다고 생각이 들 때면 나는 허연의 시집을 펼쳐 들었다.


"무엇이 되든 근사하지 않은가 / 선을 넘을 수만 있다면" -허연, '오늘도 선을 넘지 못했다-국경 2'


"그는 기대가 어긋나도 흥분하지 않는다. 늙은 바다코끼리가 다시 기운을 차리고 몸을 일으켜 먼바다로 나아갈 때. 그는 실패를 순순히 받아들인다. // 다시 살아난 바다코끼리도, 사흘 밤낮을 기다린 그도, 배를 곯고 있는 새끼들도, 모든 걸 지켜본 일각고래도 이곳에서는 하나의 '자세'일뿐이다. // 기다림의 자세에서 극을 본다." -허연, '자세'


스스로를 범인이라 말하며 현실에 두 발을 딛고 살면서도 여전히 먼 세상을 내다보며 자기만의 언어를 읊조리는 시인의 자세가, 숱한 흔들림이 나이테처럼 붙박인 그 단단함이, 삶이란 무엇인지를 일깨우고 타의로 가득한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마음을 위로한다.


시인은 세속을 살아가며 때로 세속 아닌 것을 꿈꾸는 자신을 '나쁜 소년'이라고 말한 것 같았지만(두 번째 시집, '나쁜 소년이 서 있다') 나는 그러한 자기 고백이 시인과 타자 간에 허용 가능한 절충 지대를 만들어 서로를 보호해 주었다고 생각한다. 이해와 합리로 이루어진 사회에서 시인은 수용 불가능한 개체, 고로 스스로 판단하기에 '불량'이 되어버린 '나쁜 소년'일지 모르지만, 그것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시점에서 그는 스스로에게도 타인에게도 '나쁘지'않은 것이다.


시를 쓰면서 가장 어려운 일이 자기 자신에게 잡아먹히지 않는 일인데 (아니, 실은 가장 어려운 일은 먹고사는 일이다. 그보다 무겁고 중요한 일은 없다. '실존'다음에 논하자면) 허연 시인은 창작을 위해 자기 자신을 쉽게 미끼로 내던지지 않고, 연민을 발동시켜 자신을 부수려는 허튼 욕망에도 흔들리지 않으니, 사랑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렇게 구입한 시집의 첫 장을 넘겨보는 중이다.


"자꾸 오르게 되니까 / 또 최선을 다해 떨어질 테니까 / 떨어질 처지라는 걸 아니까 // 트램펄린에 날 던지면서 말한다 / "말해줘 가능하다면 내가 세상을 고르고 싶어"

// 생각이 있으면 말해주리라 믿었지만 / 트램펄린은 그냥 / 나를 떨어뜨리고 / 미워하지도 않으면서 나를 떨어뜨리고 / 그러면 내 처지도 최선을 다해 떨어지고 " -허연, '트램펄린'중에서


여전히 '미워하지도 않으면서 나를 떨어뜨리'는 세상을 살면서, '최선을 다해 떨어지'는 와중에도 세상을 미워하지 않는 시인이 보인다.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 시인은 묻는다.

우리는 언제 노래가 될까. 받아서 되뇐다.


시집을 사이에 두고 시인과 주고받는 질문 속에 희미한 음률이 그려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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