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검다리 연휴를 맞아 예정에 없던 정선 여행을 떠났습니다.
일기예보에선 비가 내릴 거라고 했지요. 하늘이 영 심상치 않다 싶더니 머지않아 앞이 흐려질 만큼 빗방울이 쏟아졌습니다. 때마침 아이들이 잠들었어요. 운전 중인 남편과 소곤소곤 대화하던 것도 잠시, 능선을 넘나드는 물안개에 마음을 뺏겨 창밖을 바라보는 시간이 길어졌습니다.
여행 중에 비가 내리면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귀찮네, 위험하게, 망했다, 어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만 빼고 세상 모든 것이 우산을 썼다'고 생각하는 나 같은 사람도 있을 겁니다. 익숙했던 생각이 더 이상 익숙하지 않다는 건 '잊고 있음'이 떠오르기 아주 적당한 시간이지요.
엉뚱한 믿음과 빗소리가 어우러져 나는 아무런 대책 없이 한 시절을 마주쳤습니다.
그해 봄, 작업했던 에세이가 책으로 나왔을 때 퇴사를 했어요. 글쓰기와 병행하기 위한 서비스직이었고, 그곳에서 일하는 동안 내부 원고를 쓴 책만 해도 일곱 권이 넘었습니다. 무슨 뾰족한 수가 있다거나 삶이 달라진 건 아니었어요. 다만, 입사할 때 내가 나와 했던 약속. 글을 쓰는 동안 성과라고 할 만한 무언가가 있기 전까진 이리저리 자리를 옮기지 않겠다던 그 약속을 이 정도면 지킨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그 약속이 뭐라고 세상 다 지긋지긋할 만큼 버텼을까. 행복하고 후련하기만 할 시점에 왜 다 놔버리고만 싶었을까. 있는 대로 쪼그라든 마음만 남아 몇 날 몇 달을 잠에 취해서 보냈지요. 아무렇게나 잠들었다가 또 아무렇게나 일어나, 밥 한 끼에 커피도 마실 겸 밖으로 나가는 하루가 이어졌습니다.
그러다 여름이 오기 전, 한 채용 공고를 발견했어요. 내용인즉슨 도시 재생 연구원에서 작가를 뽑는다는 거였죠. 어딘가 모르게 일반적이지 않았던 건 대표님을 만나고서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사업 용역 수행을 위한 제안서를 새로운 컨셉과 내용으로 채워나가고 싶어서, 그래서 도시 계획 기사가 아닌 작가라는 직종을 채용하는 모험을 했다'고 말씀하셨으니까요. 회사에서도 분명 평범하지 않은 상황이었고, 그렇게 나와 동기들은 눈뜬장님처럼 일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회사에서는 누누이 이야기를 했지요. 인턴 기간이 끝나면 모두가 살아남을 수는 없다. 우리는 무엇을 보여줘야 할지도 모른 채 불안에 떨며 평가를 기다리는 입장이 되었습니다. 숫자와 관련된 일이라면 뭐든 더디기만 한 내가 기어코 열심히 해나간 건 재미있기 때문이었어요. 다정한 팀원들이 있어서, 무엇보다 새로운 일이, 회사다운 회사를 다니는 기분까지 그냥…. 그냥 다요.
우리 팀을 이끌었던 건 실장님이셨어요.
혼자 일하다 덜컥 네 명의 신입을 맡게 된 실장님은 수더분하게 웃으셨지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른다는 얼굴로. '너무 걱정하지 마시구요. 불안해하지 않아도 돼요. 배우는 대로 잘 따라오면 됩니다. 모르면 아무거나 물어보세요.' 결국은 그런 종류였던 말들 대신 실장님의 모습을 기억합니다. 와이셔츠 소매를 걷어붙인 채 몇 초간 침묵. 그후 말을 이어가던 조용하고도 잔잔한 음성이요. 우리는 한 코너의 구석에 등을 대고 마주 앉았습니다. 일을 하다 보면 등 뒤에서 실장님이 전자식 키보드를 치는 소리가 들렸어요. 따각따각 얼마나 요란한지. 키보드가 그렇게 시끄러울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고 얘기했다면, 실장님은 과연 웃었을까요.
시간이 조금 흘렀습니다. 그 사이 저는 가장 먼저 출근해서 가장 늦게 퇴근하는 일이 익숙해졌고, 누구보다 눈에 띄었습니다. 일을 잘해서가 아닌 열심히여서요. 실장님의 쌍둥이 동생 실장님이 함께 무주로 출장을 다녀오던 날, 좋은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어요. 나를 보면서 처음 일할 때 생각이 많이 나는 요즘이라고. 이렇게 하다 보면 내년엔 누구보다 승진도 평가도 좋을 수밖에 없다고. 허전하면서도 만족스러웠어요. 글을 떠나 보통의 삶을 사는 것만 같았거든요.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지만 이곳이 바로 내가 꿈꾸던 낙원은 아닐까. 앞으로도 이 일을 한다면, 언제까지고 쓰지 않는 사람으로 남을 수 있을 것만 같았어요. 퇴근 후 역까지 한 정거장이고 세 정거장이고 걸어가다 보면 마음 놓고 길을 잃기도 했습니다.
우리, 첫 회식을 회사 근처 치킨집에서 했지요.
2층 다락 공간에 옹기종기 모여 맥주잔을 기울였습니다. 쌍둥이 동생 실장님도 함께요. 팀원들과는 간단하게 한잔하고 헤어졌지만 실장님은 동생 실장님, 다른 실장님과 함께 자리를 옮기는 듯했습니다. 그렇게 금요일 밤이 지나고 다음 날 실장님이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 그 주말이 채 다 가기 전에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 함께였던 마지막 순간이 선명했습니다. 하나뿐인 아이에 대해 묻자 실장님은 웃으며 사진을 보여주셨지요. 네 살 꼬맹이의 얼굴을 눈으로 조목조목 짚으며 "아유, 꼴통이에요." 하던 그 웃음.
저는 그 웃음이 못내 남아 이토록 긴 서두를 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실장님이 떠나고는 한동안 비가 이어졌어요. 모두가 슬픔에 잠겨서 출근을 하던 아침, 장례식으로 향하던 오후, 종로 어딘가를 정처 없이 헤매던 밤. 그해 여름은 정말 이상했어요. 결혼을 약속했던 사람과, 내 삶의 하나뿐인 언니와, 세 번을 만났다 세 번을 헤어진 친구와도 영영 멀어졌습니다.
인사를 할 수 있는 작별이란 얼마나 운이 좋아야 하는지. 영원함이 뭔지도 모르면서 그 말에 너무도 쉽게 기댔음을, 실장님이 떠나는 길에 느꼈다면 너무 이기적일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그 한 시절을 지금 돌이켜봐도 이상한 건, 우리 삶이 원래 이상하기 때문이겠죠.
약속이나 한 듯 그대로 두었던 실장님의 자리를 정리하던 날, 쌍둥이 동생 실장님께서 실장님의 키보드를 저에게 줬습니다. 쓴다면 형이 정말 기뻐할 거라고. 그러니 받아달라고. 저는 그 키보드로 실장님이 그랬던 것처럼 타자를 치고 일을 했습니다. 문득 실장님을 떠올렸습니다. 회사 짐을 정리하면서 이걸 가져가야 하는지 잠시 고민했던 건, 그러다 결국 책상 위에 두고 나온 건 실장님이 싫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없었어요. 내가 계속 떠올려도 되는 자격을 가진 사람인지. 우리가 그곳에서 그럴 만한 인연이었는지. 아무리 짐작해도 답을 내릴 수가 없었습니다. 실장님의 첫 기일에, 쌍둥이 동생 실장님에게 용기를 내어 연락을 남겼어요.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고.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여기.
조금 울 것만 같은 기분으로 빗소리에 귀 기울입니다. 그 시절의 비와 오늘의 비가 참 닮았구나. 물이 돌고 돌아 비의 모양으로 다시 나를 찾아왔구나. 구인사라는 안내 표지를 본 순간, 나는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그곳 대신 어쩔 수 없이 실장님을 생각했습니다. 실장님의 이름 두 글자가 들어간 '구인사'를 보고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지나칠 수 있을까요. 이제는 바라봅니다. 어떤 떠남은 인연보다 긴 인연을 만든다는 것을요. 이제야 바라봅니다. 엄마라는 수상한 시간 안에서, 해가 거듭되어도 어떤 안부는 계속된다는 것을요.
실장님, 저는 그렇게 다시 쓰는 사람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