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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이 있는 날, 그래놀라 굽기

만나면 반갑다고 그래놀라

by 망원동 바히네

그래놀라를 처음 본건 대학교를 졸업하기 한 일 년 전쯤, 한남동 브런치 레스토랑 '로즈베이커리'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때다. 유명한 브랜드 쇼룸의 1층에 있었던 로즈베이커리는 지금은 없어졌지만, 당시만 해도 프랑스 파리에 본점을 둔 레스토랑의 서울지점이라는 점에서, 신선하고 좋은 재료를 아낌없이 사용해서 건강한 음식을 만들어 낸다는 입소문으로도 유명했다. 나는 그 레스토랑의 주말 오픈 홀 아르바이트생이었다.


로즈베이커리에는 요리를 만드시는 셰프님들과 베이커리를 담당하는 파티쉐분들이 각각 두 분씩 계셨다. 나는 그냥 주말 홀 아르바이트생이었지만, 주방에서 만들어내는 디저트와 요리들에 매번 매료되었다. 대학로에서 대학생활을 하던 나는 특별한 날이면 삼청동에 가서 크림 스파게티와 토마토 해산물 파스타를 즐기긴 했지만, 그래놀라며, 당근 라페, 연어스테이크, 깜빠뉴 빵에 버터와 무화과잼을 턱 하니 내어주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다. 느끼하거나 자극적이지도 않은데, 모르긴 몰라도 굉장히 고급스러운 것도 같았다. 재료를 발주하고 배달되어 온 재료를 정리하다 보면, 식당에서 이렇게 고급스럽고 비싼 식자재들을 사용한다는 것에도 매번 놀랐다. 착즙 주스를 만들어내기 위한 사과도, 낙과나 질이 떨어지는 것을 쓴 적이 없었다. 앵커 버터나 이즈니 버터, 고메 버터 같은 것들도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처음으로 알게 됐다.


그중에서도 나는 파티쉐 언니들이 그래놀라를 굽는 날이면 제일 신이 났다. 오트밀과 견과류, 마른 과일들이 양념되어 구워진 이 간단한 것이 오븐에서 구워져 나오면 레스토랑 가득 향긋함이 채워졌다. 요거트 위에 올려먹어도, 우유에 시리얼을 대신해 담가 먹어도, 샐러드 위에 토핑으로 올려 먹어도 다 잘 어울렸다. 시리얼처럼 너무 달거나 불량스러운 맛은 아닌데, 그렇다고 오트밀을 그냥 먹는 것과는 비교하기 어려울 그 사이 어디쯤의 맛. 특히, 이 레스토랑 그래놀라는 특히 시나몬과 오렌지를 더해 익숙하지만 이국적이고 고급스러운 맛이 났다.


세월이 한참 지나 대학을 졸업한 지 십 년이 되었지만, 나는 그래놀라를 아직도 좋아한다. 그 사이 서울에는 그래놀라만 전문적으로 하는 가게가 생길 정도로 외식업이 발달했다. 나는 여의도에서 회사를 다닐 때 IFC mall지하에 있는 그래놀라 전문점에서 그래놀라를 사다 야근할 때 시리얼을 대신해 먹기도 했다. 다크 초콜릿 맛, 바닐라맛, 코코넛 맛 등 종류는 더 다양했지만 나는 그때도 내가 아르바이트를 하던 가게의 그래놀라 맛을 잊지 못했다. 재료가 크게 다른 것 같지 않은데 이상하게도 내 입엔 스물넷에 먹어봤던 그래놀라가 최고였다. 로즈베이커리의 음식들은 레시피북으로 발행이 되어있어 레시피를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었다. 그때의 그래놀라 맛이 그리웠던 나는 로즈베이커리 그래놀라의 레시피대로 한번 만들어보자고 마음먹었다.


기본적으로 그래놀라는 오트밀과 각종 견과류들을 달달한 꿀이나 설탕 등에 소금, 오일과 함께 버무려 오븐에 구워낸 뒤 말린 과일과 섞어 완성한다. 로즈베이커리의 레시피에는 시나몬가루와 오렌지주스, 오렌지 제스트가 추가된다. 견과류는 집에 있는 것들로 대체해 호두와 아몬드, 피스타치오, 마카다미아, 참깨, 헴프씨드를 넣었다. 호박씨가 있다면 더욱 오리지널 레시피에 가까웠겠지만, 이미 집에 넘치게 다양한 견과류가 있어서 추가로 구매하지 않았다. 오렌지 즙을 짜고 여기에 소금 조금, 메이플 시럽, 해바라기씨유 넉넉히, 바닐라빈 조금, 시나몬가루를 넣어 섞었다. 마른 재료들을 모두 넣고 양념을 고루 입혀 얇게 오븐 트레이에 깔아준 뒤, 160도에서 15분을 구웠다. 꺼내서 한번 뒤적여 골고루 섞고, 오렌지 제스트를 넣은 뒤 다시 7분쯤 더 구웠다.


FC404B49-63E6-4A95-A009-19D346078E2C.jpeg 오븐에서 꺼낸 그래놀라. 아직 말린 과일을 섞기 전이다.


오븐 문을 열고 그래놀라가 담긴 트레이를 꺼내는 순간 집안 전체에 그리웠던 향이 퍼졌다. 고소하고 달달한 가운데 시나몬 향이 스며든... 그러다 오렌지 향이 반짝! 하고 나타났다. 그래놀라를 굽는 날이면 파티쉐 언니들이 오븐 트레이를 차곡차곡 걸어두고 한나절 동안 건들지 말라고 주의를 줬던 기억이 난다. 오븐에서 구운 그래놀라가 정말 바삭해지려면 완전히 식을 때까지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코 끝으로 스미는 향을 뒤로하고 나도 그래놀라가 완전히 식을 때까지 기다렸다. 그래놀라를 펼쳐둔 쟁반을 주방 한쪽에 잘 두고 한 나절이 지나서 병에 담았다. 손으로 스치기만 해도 바삭거림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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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도가 아주 짙은 그릭요거트에 그래놀라를 조금 담고, 블루베리와 산딸기를 더했다. 달콤 쌉살 한 밤꿀을 조금 얹었다. 빈혈로 고민이 많던 때라 빈혈에 좋다는 비트와 사과, 당근을 간 주스도 함께 곁들였다. 이보다 더 한 아침 밥상이 있을까? 차리는데 십 분도 안 들었지만, 원하는 영양소를 고루 갖추고 있고 보기에도 너무 예쁘다. 예쁘게 차려 먹고 나니 하루를 보낼 힘이 난다.


오늘 아침에도 나는 나한테 잘해줬다.


한 번 그래놀라 굽기에 성공하고 나니 나는 자신감이 생겼다. 무엇보다 재료를 늘 구비만 해 둔다면, 만드는 과정 자체가 어렵지 않은 점이 제일 마음에 들었다. 그 뒤로 나는 사람들을 만날 일이 생기면 그 전날이나 당일 아침 일찍 그래놀라를 굽기 시작했다. 견과류 알러지가 없는 지인들에게 그래놀라를 구워 유리병에 정성스럽게 담아 선물하면 받는 사람도 주는 나도 마음이 향긋해졌다. 지난 4월에만 나는 10판의 그래놀라를 구웠다. 병간호를 정성스럽게 해 준 오빠에게도, 홍콩에 나가 사는 친구에게도, 처음 알게 된 사람들에게도 나는 그래놀라를 만들어 선물했다. 내가 구운 그래놀라가 전국 각지로, 그리고 아시아로 진출했다. 파는 것보다 맛이 덜할지 몰라도 나는 내 그래놀라를 선물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받는 이들도 함께 즐겨주면 더 할 수 없이 기쁘겠다.


점점 다양한 맛을 담아보려고 노력도 했다. 작년에 담아두었던 무화과 시럽을 이용해 보기도 하고, 천혜향이 제철일 때는 천혜향을 오렌지 대신 사용하기도 했다. 지난겨울 담가두었던 유자청을 사용하기도 했는데, 향은 제일 좋았지만 유자 껍질을 구우니 딱딱해져서 실패한 레시피로 남았다. 기가 막힌 그래놀라 레시피를 아시는 분이 혹시 이 글을 보신다면, 함께 나눠주시길. 이 간단하고도 근사한 음식을 어떻게든 나누어 좀 더 따뜻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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