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덕후의 만들어 먹는 이야기
'자취생'이란 말이 나는 참 애매하다. 맞는 말이긴 한데, 어쩐지 늘 쓰임이 뭔가 조금 불쌍하다던가, 좋거나 호화스러운 것을 가지면 안 될 사람들처럼 지칭하는 것 같아 내심 불편했다. 특히 요리를 좋아하고 먹는데 늘 최선을 다하는 나에게 '자취생이...'란 말은, 대충 시켜먹거나 엄마가 보내준 반찬에 밥이나 먹지 뭣하러 그렇게 오버를 하냐는 식의 말로 들린다. 내가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는 건가 싶기도 하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은가?
지금 사는 집에 이사 올 때, 이전 집에 비해 그래도 주방의 크기가 꽤 커졌다. 아주 작은 주방을 가진 집에서도 나는 최선을 다해 요리들을 만들어 먹었지만, 아무래도 불편함이 많았다. 나름 만족할만한 크기의 주방을 가지게 되면서 나는 그동안 가지지 못했던 냄비와 도마, 커틀러리, 접시 등을 차곡차곡 사서 모았다. 냉장고도 욕심을 내서 나의 이탈리아 앓이를 조금이나마 채워줄 `smeg'를 구매했다. 냉장고가 너무 예뻐서 주방이 아닌 거실 한가운데 두었다. 그리고 거실에 소파나 tv를 두는 대신 큰 테이블을 두었다. 재택근무를 할 때도 책상을 대신해 사용하고, 친구들과 6명까지는 파티도 할 수 있다. 코로나로 여행을 가지 못한 대신, 나는 나만의 이태리를 집으로 들이기로 했다.
이 집으로 이사한 이후 친구들이 방문했다. 그중 사회생활 초기부터 친하게 지냈던 한 선배는 이 집을 둘러보자마자 감탄과 함께 잊을 수 없는 말을 남겼다.
"이제 남편만 있으면 완벽하네!"
세상에. 내가 정성스럽게 나 자신을 위해 채우고 꾸며진 공간이 완벽하지 않은 공간으로 정의됐다. 남편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혼자 사는 1인 가구 '자취생'이었기 때문이다. 결혼을 몇 달 앞둔, 신부가 될 사람이어서 그랬을까? 남편이 생기는 본인의 삶을 '완벽한 삶'으로 정의하고 싶었던 마음이 문득 입 밖으로 내뱉어진 것일지도 모른다.
"무슨 소리야. 남편이 없어도 지금 완벽한데?"
자취생이라는 단어 자체에는 '학생'의 개념이 포함돼있다. 자취생이라고 부르지 않고 '자취하는 사람'이라고 명명한다 하더라도 이 불완전해 보이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성인이 되면 각자 인생은 본인이 책임지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나는, 그 안에 스스로의 '식'을 책임지는 것이 그 중 가장 기본이라고 생각한다. 시켜먹던, 데워먹던, 만들어먹던, 얻어먹던, 어쨌건 내 입으로 들어가는 것들을 본인이 책임지는 것. 그것이 성인 삶의 기본이 아닌가? 그런데, 굳이 1인 가구에게만 '자취생'이라는 꼬리표가 붙는다.
어쨌든 스무살 이후로 쭉 혼자 살아온 나는, 독립을 한 이후 밥을 해 먹는 일에 늘 진심이었다. 1인 살림에 가장 적합한 한 그릇 음식부터, 육개장이나 시래기국같은 오래 끓여야 맛있는 한식 요리들도 망설임 없이 해 먹었다. 재료가 남아 상하는 것을 걱정해서 엄두를 내지 않는 것보다는 어떻게 하면 정량의 재료를 구매할지, 그 재료들을 어떻게 잘 활용해서 기한 내에 다 먹을지, 다 못 먹으면 어떻게 보관하는 것이 좋을지를 생각했다. 그러다 20대 후반부터 이태리 여행을 하면서 현지에서 요리수업들을 듣고, 한국에서도 이탈리아 요리를 배우러 다니면서 우리 집에는 좋은 올리브유, 발사믹, 좋은 파스타면들, 케이퍼나 올리브 같은 절임류들, 유리병에 병입 된 토마토 파사타 같은 것들이 늘 상비되어있다. 지난해부터는 앤초비도 직접 담가 먹기 시작했다. (아... 앤초비! 앤초비에 대해서는 별도로 한 번 글을 써봐야지...) 아직 만족스럽지 않지만, 생면 파스타도 열심히 연습하고 있다.
지금 집으로 이사 오고 나서, 코로나와 집들이를 핑계로 소규모 홈파티를 참 많이도 했다. 손이 큰 엄마를 닮아 우리 집에 온 손님들 배를 찢어지기 직전까지 불리지 않으면 뭔가 잘못한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식탁 가득히 음식을 차려낸다. 보통 나를 포함한 4명의 그룹이 모이면, 3가지의 전채, 1가지의 파스타, 1가지의 메인 요리를 낸다. 계절의 재료를 충분히 담으려고 하고, 시도해보고 싶은 요리나 수업에서 배운 것들을 복습하기 위해 친구들을 부르는 경우도 많다.
혼자 간단히 저녁을 대신해 와인과 안주를 먹을 때도 기본적인 재료를 구비해두면 15분 안에 근사한 안주를 만들 수 있다. 배가 고파 식사를 차려낸다 하더라도 정성을 다하려고 노력한다. 분명 나도 김밥을 포장해오거나 라면을 끓여먹는 날도 (나는 라면을 무척 좋아하니까), 피자나 떡볶이 같은 것들을 시켜먹는 날도 많다. 그래도 되도록이면 냉장고의 재료들을 활용해 만들어 먹으려고 한다. 멸치를 견과류랑 볶고 나물을 무쳐 밥이랑 먹는 날도, 휘리릭 파스타를 먹는 날도, 쑥떡을 구워 꿀과 콩가루와 함께 먹는 날들도 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스콘이 먹고 싶으면, 스콘을 구워 먹는다. (나는 보통 너무 일찍 일어나는 편이라 가능한 일이다.)
인생에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이 몇이나 되겠는가? 그중에서도 요리를 해서 먹는 일들은 내가 나를 위해 할 수 있는 것 중에, 가장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이다. 밖에서 아무리 억울하고 서러운 일이 있었더라도, 좋아하는 남자가 나에게 반하게 하고 싶을 때도, 친한 친구들에게 내 마음을 표현할 때도 요리를 하면 다 해결이 됐다. 회사에서 진행하던 프로젝트가 망하더라도 가스불에 팬을 올리고 올리브 오일에 앤초비를 익히는 그 순간, 코 끝에 감칠맛이 훅 들어오는 그 순간 내 머릿속에는 오직 이 요리를 잘 마무리해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가득 찬다. 세상만사 근심 걱정은 온 데 간데없다. 아스파라거스를 살짝 데쳐 향긋한 오일에 볶아내면 맛있게 완성될 것이라는 것도, 앤초비를 오일에 풀어 생선을 익히면 감칠맛이 폭발할 것이라는 것도 내가 생각해서 실행에 옮기면 그대로 결과물이 나왔다. 세상만사 이렇게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서 잘 되는 일이 나에겐 요리밖에 없다.
혼자 사는 1인 가구도 멋들어지게 먹고살 수 있다는 것을 굳이 강조하는 것도 말이 안 된다. 2인, 4인 가구보다 멋이 없게 먹어야 할 이유도 없다. 혼자 사니까 커틀러리나 접시를 많이 가지는 것이 이상한 일도 아니다. 구구절절 설명할 의무가 없으니 설명하려 하지 말고, 무례한 질문을 던지지도 말자. 최선을 다해 살고 있는 사람을 본다면 '와! 너무 맛있겠다!'정도의 코멘트면 충분하다. 혹시라도 나처럼 요리로 삶을 풍부하게 하는 사람이라면, 아니면 본인의 인생을 주체적으로 풍부하게 사는 방법을 나에게 나눠줄 의향이 있다면 언제든 함께 즐겨줄 준비가 됐으니 슬쩍 얘기해줘도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