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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망원동 바히네 Mar 03. 2023

집 앞 놀이터

해바라기 할머니들과 해바라기

 집 앞에 놀이터가 있다. 규모가 그래도 작지 않은, 큰 미끄럼틀이 달린 중심이 되는 기구와 시소, 그네, 그리고 운동기구들이 놀이터 가장자리에 둘러져 있다. 놀이터는 정말 집 바로 앞에 있고, 우리 집 거실의 창을 열면 바로 내려다 보인다. 한 겨울이 아닌 계절에 거실 문을 열어두면, 하루 종일 놀이터에 누가 와서 어떤 시간을 보내는지 가늠할 수 있다. 그 소리는 생각보다 생생하게 들리는데, 한 번은 창을 열어두고 화상 미팅을 하는데 사람들이 내가 테라스가 있는 카페 같은데 있거나 키즈 카페에 있는 줄 알았다고 한 적이 있을 정도다. 나는 놀이터에서 들리는 소리들이 한 번도 시끄럽다고 느껴본 적이 없다. 종종 우리 집을 방문하는 사람들 중에는 '이렇게 시끄러워서 어떻게 사냐'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가...' 혼자 사는 나는 밖에서 들리는 소리, 그리고 그것이 주로는 어린아이들이 뛰어노는 소리라는 점에서 더욱 반갑게 느껴왔다.


 놀이터의 입구에 있는 그네는 놀이터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놀이기구다. 어린이들도 그네를 좋아하지만, 그들은 그네를 조금 타다가 이내 미끄럼틀로 옮겨가는 편이다. 그네는 어린이들부터 교복을 입은 학생들, 데이트를 하는 연인들, 중년을 넘은 나이의 어른들까지 애용하는 편이다. 그네에 앉으면 아주 커다란 감나무가 보인다. 가을이 되면 감나무에 주렁주렁 열린 감을 보면서 그네를 탈 수 있고, 봄엔 그 옆에 있는 목련 나무의 꽃을 보며 그네를 탈 수 있다. 언젠가 퇴근길에 집으로 바로 가지 않고 그네에 앉아 있었던 적이 있다. 그때 '뭐 해?'라고 온 연락에 '그네 타고 있다'라고 답장을 했더니, 그네를 뒤로 굴릴 때 숨을 들이쉬고 앞으로 나갈 때 숨을 내쉬어 보라고 했던 이가 있었다. 한참이 지나고서야 나는 한창 괴로워하던 그때의 나에게 숨쉬기 명상을 알려주려고 했었다는 것을 이해했다.


 놀이터의 귀여운 점 중 하나는 놀이터 가장자리에 있는 운동기구 사이마다 각기각색의 의자들이 놓여있다는 점이다. 해를 등진 부분에는 의자가 놓여있지 않고, 해를 마주하는 곳에만 의자가 놓여있다. 편의점에 있을법한 빨간색 플라스틱 의자도 있고, 80년대에 만들어진 것 같은 디자인의 나무 의자도 있다. 요즘 유행하는 카페의 것 같은 의자도 있다. 이 의자 컬렉션은 때로는 업데이트되기도 하고, 몇 개의 의자가 사라졌다 등장하기도 한다. 누가 이 의자들을 가져다 놓았는지, 그리고 또 누가 이 의자들을 없애버리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공공시설'로 등록된 이 놀이터에 주인이 없는 물건이 랜덤 하게 놓여있더라도 한 번에 구청이나 환경미화를 하시는 분들이 버리지 않고 그냥 둔다는 점이 재미있었다.

 이 의자들의 용도는 어르신들의 '해바라기'용도다. 해바라기는 엄마가 알려준 말이다. 엄마가 잠깐 집에 머물렀던 때에 놀이터에 놓인 의자들마다 어르신들이 앉아서 아무 말 없이 해를 쬐고 있는 모습을 보고 했던 말이다.

"아이고, 할머니들 해바라기 하시네."

 나는 해바라기가 동사로 사용되는 점도 재미있고, 정말 각자 의자에 앉아 말없이 해만 보고 있는 모습이 한 송이, 한송이의 해바라기 같기도 해서 그 말을 깊이 기억하게 됐다. '해바라기' 용도이기 때문에 해를 등진 곳에는 의자가 놓여있지 않다는 점도 그때 깨달았다. 해를 등진 곳에는 정자도 있고 벤치도 있기도 하지만, 좀처럼 이곳에는 어르신들 보다는 젊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편이다.


 많이 바쁘고 힘든 몇 주를 보내다 문득 정말 이제 겨울이 가고 있다는 것을 느낀 날이었다. 전 날 읽었던 책의 제일 첫 장에 있던 시를 보고 우습다며 친구들과 공유했었던 시의 구절을 떠올리며 잠깐 '멈춤'을 누르고 밖으로 나가 젤라토 샵에서 소르베 두 가지를 담아왔다. '배 오렌지'와 '파인애플 바질'. 나는 채식을 하기 전에도 소르베를 좋아했었지. 젤라토를 사러 나온 것은 아니었고, 잠시 산책을 하러 나온 터라 집에서 숟가락을 챙기지 못했지만 이 작은 플라스틱 숟가락을 하나 쓰는 것에 대해 오늘은 박하게 굴지 말아야지 생각했다. '배 오렌지' 맛과 '파인애플 바질'맛을 번갈아가며 입에 넣으며 이렇게 달고 맛있는 것들을 따뜻한 해를 받으며 먹고 있으니 곧 끝날 프로젝트 같은 것들로 무겁게 찼던 머리에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이 햇살을 조금만 더 쬐고 싶다는 생각에 놀이터로 갔다. 할머니들의 해바라기 전용석이 비어있었다. 나는 해바라기를 하며 남은 소르베를 마저 먹었다. 소르베를 다 먹고도 집으로 올라가고 싶지 않아 노이즈 캔슬링 헤드폰으로 '정화 명상' 가이드를 들으며 눈을 감고 있었다. 싱잉볼 소리들을 들으면서 해를 마음껏 쬐었다. 평소에도 선크림을 바르지 않지만, 해만 보면 '선크림'을 떠올리며 불안해하지 않아도 되는 성격에 감사했다. 새까맣게 타거나 주근깨가 몇 개 더 생기면 훌라를 출 때 더 어울리는 얼굴이 되고야 말겠지.

 몇 주간 머리가 너무 무거워 요가를 가는 길엔 '이렇게 머리가 무거운데 머리 서기가 안 되는 게 아이러니'라고 생각을 할 정도였다. 20분 정도 소르베를 먹으며 해바라기를 한 덕에 내 머리는 한 결 가벼워졌다. 여전히 머리서기는 안된다. 그래도 상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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