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리와 숨바 여행기 1. 어느 날 숨바가 나타났다.
'여성성'에 대한 이해는 한 번에 되지 않았다. 친구들과 칼 융의 책을 열심히 읽던 시절, 가장 소화가 안 됐던 부분은 역시나 '아니마'와 '아니무스'였다. '보수적인 기독교 집안에서 자란 백인 옛날 사람'이 표현하는 여성성과 남성성의 개념은 자꾸만 내 목에서 탁, 탁 걸렸다.
시간이 많이 지나고 나서, 칼 융이 아닌 다른 학자들, 특히나 여성 학자들과 작가들, 그리고 영성 유튜버들이 해석해 주는 여성성과 남성성의 개념을 접하고 난 뒤에야 나는 흐릿하게 이 개념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이 개념을 받아들이면서 '남성'과 '여성'으로 이분화하고, 모든 일들을 성적 프레임으로 판단하고 서로를 비판하기를 자연스럽게 멈추게 되었다.
시간이 한 참 흘러 즐겨 보던 영성 유튜버가 한국에서 '여성성 워크숍'을 연다고 해서 친구와 함께 찾았다. 여러 가지 이야기 중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여신의 모닝 루틴'이었다. 고도로 발달하고 안정화된 여성 에너지를 가지고 살아가기 위해서, 즉 내 안의 '여신'으로서 살아가기 위해서 제안한 아침 루틴이었다. 여러 가지 중에서도 아침의 에너지를 가지고 2번 차크라, 골반을 움직이는 춤을 추라는 부분이 눈에 띄었다. 2번 차크라는 여성에게 매우 중요한 차크라다. 자궁이 있는 위치의 에너지 장에서는 창조의 힘이 발현된다고 한다. 여성이 가진 가장 중요한 힘이다.
"내 루틴이잖아!!"
친구와 나는 키득거렸다. 영 저녁엔 에너지가 없는 나는 주로 아침에 훌라 연습을 한다. 골반을 좌 우로, 그리고 앞 뒤로, 원으로도, 8 자 모양으로도 다양하게 움직이는 것이 기본 동작인 훌라. 나는 이 춤을 종종 아침에 추면서 나도 모르게 여신의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일까?
1년 전 발리에서 만났던 사람이 '숨바'섬에 대한 이야기를 한 것이 불현듯 생각났다. 아직까지 자연이 보존되어 있는 곳, 관광객이 발리처럼 아주 많지 않고 바다도 계곡도 산도 아름답다고 했던 곳이었다. 갑자기 그 말이 떠올라 구글에 숨바를 검색했다.
숨바를 검색했더니 춤추는 나무의 사진이 나타났다. 바닷속에서 자라난 나무는 기둥과 가지가 구불구불하게 자라나 마치 자유롭게 춤을 추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아마도 덜 유명한 숨바 섬의 명소 중에서는 가장 유명한 모양이었다.
그때 즈음 나는 오리 타히티(타히티의 전통 춤) 수업에서 '춤추는 코코넛 나무'에 대한 곡을 배우고 있었다. 코코넛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모양이 꼭 아름다운 여인 같기도, 춤을 추는 여인 같기도 하다는 곡이었다. 아낌없이 모든 것을 내어주는 '생명의 나무'는 아름다운 여인처럼 바람에 흔들흔들 흔들리고 있다는 가사에 맞춰 천천히 코코넛 나무 잎이 흔들리는 것을 표현하는 곡이었다.
나는 이 곡이 좋았다. 노래도, 가사도, 안무도 좋았다. 흔들리는 코코넛 나무 잎을 표현할 때 온몸을 오른쪽으로, 그리고 왼쪽으로 기울여 흔들리는 나무를 표현하는 것도, 바람에 날리는 코코넛 나뭇잎이 아름다운 여인 같다는 표현을 할 때 머리를 한쪽으로 넘겨 쓸어내리는 안무도 좋았다. 빠르고 강렬한 곡보다 이런 서정적이고 느리지만 섬세한 표현을 요하는 곡들을 좋아한다.
지체 없이 숨바여행을 예약했다. 순식간이었다. 홀린 듯이 숨바행 티켓을 끊었다. 발리에서 작은 비행기를 타고 한 시간 반. 로컬 가이드가 필요했다. 두 개 업체에 연락을 했고, 그중 하나로 정했다. 춤추는 나무 말고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했다. 무엇이 있던지 나는 거기서 춤추는 나무에 대한 춤을 추겠다는 생각이었다.
아니 그런데 내가 무슨 프로 댄서도 아니고, 그렇게 먼 곳까지 가서 굳이 춤을 출 이유가 있는가?라고 물으면 딱히 속시원히 답해줄 말은 없었다. 한편으로는 그런 질문에 꼭 답이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닌 것 같았다. 언제나 내가 내리는 결정들은 '그냥!' 이상의 답이 없는 것이 훨씬 더 많았다. 숨바행 여행은 '그냥'이라고 답할 수밖에 없지만, 그보다는 조금 더, 말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뭔가 강하게 이끌린 것이 있었다는 정도였다. 그게 무엇이냐 묻는다면 아주 명확하게 답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숨바 여행을 한, 두 달쯤 앞두고 집에서 유튜브로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었다. 하와이 코나섬에 이주해 자급자족의 삶을 사는 미국인 커플에 대한 이야기였다. 뉴욕에서 바쁘게 살던 이 커플은 코나섬으로 삶의 터전을 옮기고 모든 것을 자급자족으로, 자연스럽게 살고 있었다.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 둘도 마찬가지였다. 학교가 끝나고 집에 돌아오면 제일 먼저 아빠의 일터로 가서 나무를 다듬는 일을 도왔다. 그게 그 아이들에겐 놀이였다. 그 다큐멘터리에서 아빠 되는 사람이 '현대 문명에서 떨어져서 아이들을 키우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묻는 PD의 말에 이렇게 답했다.
"나는 아이들에게 배우고, 아이들은 나에게서 배우는 게 있어요. 우리는 서로에게 선생님이 되는 겁니다. 그뿐만이 아니에요. 아이들은 자연에서 엄청난 것들을 배웁니다. 예를 들어 저 코코넛 나무를 보세요. 바람에 유연하게 흔들리는 저 나무요.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저렇게 바람에 유연하게 흔들리는 나무를 보고 자라면서, 위기가 닥쳤을 때 부러지지 않고 그 위기를 이용해 유연하게 대처하는 법을 배우게 되는 겁니다."
부러지지 않고 유연하게 흐르는 것. 옳고 그름을 나누고 판단하지 않고 수용하고 포용하는 것, 내가 가진 것을 내어주며 보듬고 보살피는 것. 나무는 여성을 닮아 있었다.
이제 벌써 4년 전, 자궁 수술을 하고 나서 회복한 뒤로 나는 훌라와 오리 타히티를 어느 때보다 열심히 추게 됐다. 이전에도 추던 춤이지만 이제 그 두 춤은 나에게 다른 의미로 다가왔고, 시간이 있을 때 추는 춤이 아닌 시간을 내서 추는 춤이 되었다. 내 삶의 중심을 차지한 그 춤들은 내 안에서 나에게 정답을 알려준 방법이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상처받은 여성성의 바탕 위에 다시 건강하고 아름다운 여성성을 길러 나가라고. 그렇게 내 안의 나는 나에게 춤을, 춤추는 나무를, 그리고 여신을 안내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