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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망원동 바히네 Jun 23. 2021

사려니에만 비가 억수같이 내렸다.

내리는 비를 어쩌겠는가. 맞는수밖에.중요한 건 그다음이지.

제주도는 비가 참 많이 온다. 작지 않은 섬이고, 가운데 높은 산이 있기 때문에 어느 한쪽에 비가 퍼붓더라도 다른 쪽엔 해가 쨍쨍한 경우도 많다. 비가 많이 온다는 건 뉴스를 보고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후자를 알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2019년 여름이었다. 회사를 같이 다녔던 친한 친구와 제주도에 여행을 갔다. 친구가 곧 외국으로 가 일을 하게 돼서 나름 이별여행인 셈이었다. 이유가 뭐가 됐든 나는 그 친구랑 제주도를 간다는 게 더 중요했다. 긴 여름휴가는 2주간 멀리 다녀오기로 이미 해둔 터라, 제주도는 그야말로 마음 가볍고 짧게 놀다 오는 것이 목표였다. ENFP인 데다 근력이 없는 나는 여행 시 짐을 들고 다니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반면, ISFJ-T인 친구는 매사에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여행 짐이 많은 편이다. 제주도 여행은 1박 2일로 정말 짧게, 에코백 하나 들고 가보자고 졸랐다. 수영복에 속옷, 잠옷에 와인 한 병이면 되지 않겠냐는 내 막무가내에 친구는 못 이기는 척 따라줬다.


금능에 숙소를 잡고 택시와 도보로만 이동하며 여행했다. 멀리 가지도 않고 동네를 걷다가 커피집이 보이면 커피를 사 먹고, 아로마 테리피 용품을 파는 가게를 발견해 무작정 들어갔다가 롤온 제품을 만드는 클래스에 참여했다. 비양도가 바로 보이는 금능 바다에서 하루 종일 수영을 했다가 햇볕에 몸을 말리고, 프린트가 화려한 로브를 하나씩 걸치고 온 동네를 걸어 다녔다. 하루 종일 수영복에 반바지를 입었다 벗었다 하다 하루가 끝나는 유럽이나 동남아 여행 때와 다를 바 없는 차림이었다.

"정말 이러고 돌아다녀도 되는 거니 우리."

"뭐 어때. 지금 지나가던 사람들 뭐 입었었는지 기억나는 거 있어? 없지. 사람들도 우리 뭐 입었는지 관심 없어."

"그런가."

"기억해 봤자지 뭐. 올 누드도 아니고."

달라도 너무 다른 우리는 내가 가져간 두 개의 로브를 나란히 나눠 입고 미지근한 바다에서 한참을 놀다, 또 그렇게 금능 골목을 한참을 쏘 다녔다.


월급을 받은 어느 날, 우리는 같은 브랜드에서 컬러풀한 원피스를 한 벌씩 샀다. 드라이클리닝이 필수인 리넨 실크 소재의, 결코 가벼운 금액이 아닌 원피스였다. 우리는 그 가벼운 짐가방에 그 원피스 한 벌씩은 챙겼다. 금능 근처에서 사진관을 하는 지인에게 찾아가 우정사진을 찍었다. 나는 빨간색 원피스를, 친구는 짙은 초록색 원피스를 입었다. 이미 소녀에서 멀어진 지 한참이 되었지만 최대한 소녀같이 찍어달라고 주문했다.

"둘은 언제부터 친구야?"

"음...? 2018년에 입사했으니까 1년 됐네."

"나는 이별여행씩이나 왔다고 해서 둘이 뭐 한 20년 지기는 되는 줄 알았네. 두 분 3년까지는 우정 한번 지속해보시길 응원할게요."

생각해보니 그랬다. 매일 얼굴을 봤고, 회사에서 잘 맞는 친구를 만나기 어렵다는 선입견의 장벽을 깼기 때문인지 몰라도 우리의 밀도 높은 우정 때문에 나는 우리가 고작 1년밖에 안된 사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나중에 사진 결과물을 우편과 이메일로 받으면서, 작가님은 한번 더 우리의 3년 우정을 응원했다. 사진을 꺼내보면 '꺄르르르르'하다가 '푸하하하'하며 목젖을 보이고 마는 그때의 우리가 선명해진다. 우리의 우정은 지난달 3주년이 되었다.

원피스는 Alysi제품. 30대의 싱그러움을 담아내면서도 이태리 휴양지의 감성을 잃지 않았다. Photo by 강연욱 사진관




다음날, 역시나 우리에게 계획은 없었다. 짧은 1박 2일 여행이니 한 번 더 협재같이 가까운 바다에 가서 누웠다 올까도 싶었지만, 그래도 안 해본 걸 해보고 싶었다. 무엇보다 첫 날 보다 날씨가 살짝 흐렸다. 해수욕을 하는데 무리는 없었지만, 그래도 아주 화창하지 않은 바다보다는 다른 곳을 가보는 것도 좋겠다 싶었다. 친구는 사려니 숲을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고 했다. 금능에서 사려니숲은 거리가 꽤 멀지만, 그게 큰 장벽은 아니었다. 사려니 숲을 한 번도 안 가봤다는데, 한 시간 반 차 타고 이동하는 게 뭐 그리 대수겠냐 싶었다. 숙소 체크아웃을 하고 짐을 모두 에코백에 넣은 채로 택시를 타고 사려니숲에 갔다.


사려니 숲 입구에 끝없이 이어지는 쭉 뻗은 편백나무가 숨통을 트이게 했다. 걷기에 날씨도 너무 좋았다. 나무들 사이로 뜨겁지 않은 햇볕이 기분 좋게 내려 꽂혔다. 무겁지 않은 짐을 어깨에 달랑달랑 매고 우리는 연신 감탄을 뱉으며 숲길을 걸었다. 이 좋은 사려니숲길을 처음 걸어보다니! 나는 친구를 이곳에 데려온 게 꽤나 뿌듯했다. 외국에 나가기 전에 이 좋은 공기를 마음껏 마시라며, 나는 연신 으스대며 숲길을 안내했다.


분명 시작은 화창했다.


한 이십 분쯤 걸었을까? 초입을 막 지났을 때부터 갑자기 생일파티에서 케이크를 내 올 것처럼 암전이 되듯 어두워졌다. 분명 주말 동안 제주에 비 예보는 없었는데... 이러다 말겠지 싶었다. 후둑 후둑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소나기야 잠깐 내리다 마는 거니까 금방 그치겠지 싶었다. 우리 앞에 전진만 있고 후퇴는 없었다. 기상만 놓고 본다면 거의 전장에 나간 10대 후반의 군인의 그것이었다. 비 오는 숲길 끝에 뭐가 있는지 생각하지 않았다. 아마 내 친구는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미쳐 그 생각을 내뱉기 전에 그냥 발이 직진을 하고 있었을 뿐인지도. 어쨌든 우리는 한참을 더 걸어 들어갔다. 후둑후둑 내리던 비는 억수가 된 지 오래였다. 비 맞은 생쥐꼴을 하고 사고를 멈춘 우리는 어쩔 줄을 모른 채 직진했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사려니숲을 폐쇄한다고 했다. 갑자기 내린 엄청난 양의 비는 몹시 위험하기 때문이란다. 한 시간 반 길을 돌아 걸어 나왔다.


온몸은 물론이고 1박 2일 여정의 짐이 든 짐가방도 흠뻑 젖었다. 다른 건 다 괜찮은데 리넨 실크 원피스가 걱정이었다. 그리고 저녁 무렵 비행기를 탈 것도 걱정이 됐다. 제주 공항에 샤워시설은 이용이 가능한 것인가? 지금 돌아 나가서 그다음 저녁 비행기 시간까지 뭘 해야 할까? 갑자기 동시다발적으로 여러 생각이 드는 순간 고개를 들어 친구를 봤다. 사려니숲 첫 도전에 나름의 설렘을 표현해내던 친구는 그야말로 비에 젖은 생쥐꼴이었다. 아무 생각이, 정말로 아무 생각이 없는 듯 고개를 푹 숙이고 에코백을 들고 걷고 있었다. 인생이 곧 계획이고 매사를 대비하는 친구에게 퍼붓는 비와 계획 없는 여행이 얼마나 당황스러웠을까. 당황스러웠기만 하면 다행이고, '그러게 왜 이 먼 사려니를 오자고 해서. 내가 우산 챙긴다니까 네가 비 안 온다며.'로 시작되는 육탄전이 이어지면 어떡하지. 생각이 꼬리를 무는데 친구와 눈이 마주쳤다. 웃음이 터졌다. 그냥 웃겼다. 퍼붓는 비를 맞으며 우리 둘은 한참을 목젖이 떨어져라 고개를 젖히고 웃었다. 아무리 걸어도 입구가 나오지 않았다. 들어올 때는 가뿐하게 들어온 것 같았는데, 나가는 길은 구만리였다. 그래도 그냥 헛웃음인지 찐 웃음인지 모를 웃음만 터져 나왔다.


얼굴을 공개하기 좀 그래서 짧게 잘랐지만, 이 뒤에 이어지는 친구의 실성한듯한 웃음은 요즘도 가끔 꺼내보는 힐링포인트.


사려니 입구에서 택시를 불렀다. 택시가 안 올 수도 있겠다 생각했는데 또 택시가 잡혔다. 매번 이렇게 운이 따라주니 내가 계획을 안 세우는구나 싶었다. 물을 뚝뚝 흘리며 택시에 타서는 일단 제주시로 가달라고 했다. 차 시트가 다 젖는다고 험한 말을 하던 기사님께 우리는 아무 말을 할 수 없었다. 제주시 공항 근처에 있는 라마다 제주 호텔에 전화를 했다. 이전에 호텔 스파에서 마사지를 받은 기억이 있었다.

"한 시간 뒤에 두 명 예약되나요?"

또 예약이 됐다. 당일 예약이 이렇게 쉽게 되는 호텔 스파라니. 뭐에 홀린 건가 싶었다.

"호텔에 갈 거니까 어떻게든 시트 다 닦아드릴게요."

쉴 새 없이 차 시트 망가진다고 욕을 하던 기사님께 기세 등등하게 말했다. 호텔에 내려 로비 직원에게 수건을 빌렸다. 꼼꼼하게 차 시트를 닦고, 택시비를 지불했다. 욕은 많이 들었지만 어쨌든 그 비를 뚫고 사려니에서 우리를 구출해준 귀한 기사님이었다.

"제주는 날씨가 지역별로 다 달라서 그렇게 전체 날씨만 보고 움직이면 안 돼요! 제주 도민일보나 제주도 지역 뉴스를 봐야지. 오늘 중산간에 비 온다고 어제부터 그렇게 떠들어댔는데 그걸 안 듣고 또 사려니까지 뭐하러 올라갔어!"

기사님 말대로 사려니에서 조금만 차를 타고 내려오니 언제 그랬냐는 듯 날이 맑았다. 금능에 사는 사진작가 오빠에게 전화가 왔다. 금능이면 나와서 같이 놀자고 했다. 사려니에 왔다가 비를 쫄딱 맞고 제주시로 왔다고 했다.

"거길 왜 갔어! 오늘 거기 비 온다고 했는데!!"

우리 빼고 사려니에 그날 비가 온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었던 눈치였다.


라마다 호텔 꼭대기층에 올라갔다. 마사지를 받긴 할 건데, 비에 쫄딱 젖었으니 먼저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싶고, 우리가 샤워를 하는 동안 빨래를 건조해줄 수 있냐고 물었다. 비용은 지불하겠다고 했다. 아뿔싸. 스파에 탈수기는 있지만 건조는 자연건조를 한다고 했다.  일단 최대한 탈수를 해서 널어놓는 동안 샤워를 하라고 했다. 마사지는 안 받아도 된다고, 일단 감기에 걸리지 않게 뜨거운 물에 샤워를 하고 있으면 탈수기를 돌려놓겠다고 했다. 우리는 일단 샤워를 하고 드라이기로 우선 입을 옷만 대충 말렸다. 제일 얇은 옷이 하필 사진을 찍기 위해 가져온 원피스들이었다. 샴푸로 조물조물 빨고 손으로 꽉 짜 드라이기로 말렸다. 얇은 리넨이라 금방 말랐다. 가뿐한 몸으로 나왔다. 탈수만 한 짐들을 챙겼다. 비용을 지불하려고 하는데 스파 직원이 돈을 받지 않았다.

"샤워만 하는 비용이 책정되어 있지도 않고, 오셨던 고객님이 난처한 상황에서 그냥 샤워실을 쓰게 해 드린 건데 돈을 받긴 좀 그렇죠. 다음에 마사지 예약하고 오세요."

"아니 그래도..."

우리는 스파 업체 측의 호의를 담뿍 앉고 탈수된 짐을 챙겨 나왔다.


"어디로 가지?" 한 바탕 폭풍우가 몰아치고 겨우 진정한 친구의 얼굴을 보니 살이 빠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배도 고플 대로 고팠다. 지도 앱을 켜고 빨래방을 검색했다.

"우진 해장국 먹어봤어? 고사리 육개장?"

"아니."

"우진 해장국 옆에 빨래방이 있네. 거기 건조기 돌리고 우진 해장국 먹자."

결국 우리는 빨래방 건조기에 모든 짐을 넣고 건조를 돌려놓고 우진 해장국으로 가서 고사리육개장과 몸국, 그리고 소주 한 병을 시켰다. 뜨거운 육개장에 소주를 털어 넣고, 매운 청양고추를 씹으니 온 몸에 열기가 돌았다.

"하루가 길다."

"너는 근데 여기서 라마다 스파를 갈 생각을 어떻게 하고, 빨래방은 어떻게 생각해냈니."

"너도 계획 없이 살아봐. 느는 건 잔머리뿐이여."

"이거 되게 맛있다. 고사리 육개장 처음 먹어봐."

"맛있지. 진짜 맛있지. 밥 말아서 먹어봐."

밥 한입, 국 한 숟가락, 김치 한입, 소주 한 잔 짠-을 반복하며 식사를 마무리했다.


제주를 한 두 번 간 것도 아니고, 사려니 숲길을 한 두 번 걸은 것도 아니었으며, 무엇보다 우진 해장국을 한 두 번 먹은 것도 아니다. 사는 게 힘들 때 잠깐이라도 짬이 나면 나는 제주행 비행기표를 샀다. 달랑달랑 에코백을 가지고 내려가 숲을 걷거나 바다에서 수영을 하고 올라오는 길에 해장국을 먹고 왔다. 글을 쓰려고 아이폰 앨범을 뒤지다 보니 사려니 숲길을 걷는 내 사진은 우비를 입고 찍은 사진이 많다. 매번 내가 갈 때만 비가 오는 것인지, 중산간이 비가 자주 오는데 매번 확인을 안 하고 가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비 오는 사려니숲길 끝엔 목젖이 찢어져라 웃는 둘만 남았다. 우리가 어디서 만났고 얼마나 알고 지냈는지가 중요한가. 너무 계획이 없는 나와 너무 모든 게 걱정인 친구는 항상 각자의 성향이 극단으로 치달아 위태로울 때 서로의 목덜미를 끄집어 중간 어디 즈음에 놓아주고 있다.


이 글을 한참 쓰고 있는데, 우리 사진을 찍은 사진작가 오빠에게 안부를 묻는 전화가 왔다. 이런 말도 안 되고도 무서운 우연의 일치라니! 코로나 때문에 여행을 자제하고 지냈는데 (특히 제주는!) 친구가 한국에 들어오면 냅다 목덜미를 잡아 제주나 데려갈까 보다. 아직도 싱그러운지 사진을 찍어서 증명해 보여야지. 왠지 한번 더 사진을 찍으면 3년 우정밖에 안됐냐며, 7년쯤은 응원하겠다고 해주지 않을까? 같이 지낸 시간은 중요한게 아니고, 인연을 유지하는동안 뭘 나누었냐만 그저 중요한 나지만, 그래도 괜히 그 작가님의 응원을 받으면 더 재밌게 지낼 것 같다. 아니면, 그 핑계로 제주도에 놀러를 가고 싶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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