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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망원동 바히네 Jul 06. 2021

돈이 없으면 누군가 나타났다.

그리스 - 크레타, 낙소스, 그리고 파로스

스물 두 살에 떠난 4개월의 여행 경비는 장학금을 받은 것과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았다. 물론 넉넉하지 않을 걸 알고 있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아껴서 쓰면 되겠지 싶었다. 그 나이의 다른 배낭여행객들이 그렇듯 도미토리에서 자고, 유레일패스로 이동하고, 그 동네에서 제일 큰 케밥으로 끼니를 해결했다. 장기 여행에 쇼핑은 사치였고 술은 많이 안 마셨었다. 호스텔에서 만난 사람들과 친구가 되어 식재료를 같이 사서 요리를 해 먹는 날도 많았다. 생각보다 돈은 많이 들지 않았다.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1차로 예상치 못한 지출이 발생했다. 피렌체의 미친 야경에 취해 하루 종일 거리를 걸어 다니다, 호스텔에서 하루 한 캔 무료로 주는 맥주를 들고 사람들과 룰루랄라 야경을 보고 돌아왔다. 모든 것이 완벽한 그날이었다. 자는데 손이 아프기 시작했다. 저녁엔 손만 아팠는데 자다 보니 통증이 팔까지 올라왔다. 다른 사람들이 같이 자고 있어서 불도 못 켜고 혼자 끙끙 앓았다. 아침이 되고 밝은 데서 보니 손가락이 까맣게 변했고 원래 손가락보다 두배쯤 부어있었다. 통증이 있는 손가락을 만지면 안에 물이 가득 찬 것처럼 물컹한 느낌이었다. 손가락만 아픈 게 아니라 팔 전체가 아프니까 덜컥 겁이 났다. '아, 팔을 잘라야 하겠구나.' 


한국 가이드북을 뒤져 현지인 가이드에게 전화했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물었다. 다행히도 친절한 현지 가이드 분이 응급실이 있는 병원 위치며 병원에서 해야 할 일들을 알려줬다. 가이드북에도 쓰여 있었고, 가이드 분도 설명하시길 이탈리아는 교황이 있는 나라라 병원비가 무료라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믿고 일요일 아침 이른 시간 응급실로 향했다. 이탈리아어는 한 마디도 못하는 내가 간호사에게 영어로 말했다. 손이 너무 아프다고. 간호사는 나에게 저기 의자에 앉아 기다리라는 말만 반복했다. 30분을 넘게 기다려도 아무도 나에게 뭘 하라던가, 이리 오라는 말도 안 했다. 응급실에는 환자도 거의 없었다. 서러운 마음이 폭발했다.  다시 간호사에게 가서 울기 시작했다. 그러자 간호사가 내 손을 보더니 말했다. 

"나는 네가 왜 우는지 이해가 안 된다. 아파서 그러니?"

"아파서 그래요. 빨리 치료해주세요."

간호사는 별것도 아닌 걸로 호들갑을 떤다는 듯한 표정으로 어디론가 가더니 주삿바늘이 큰 주사기를 가져왔다. 부은 내 손가락에 주삿바늘을 찔렀다. 손가락에 찼던 물이 찍! 하고 빠졌다. 붕대를 감아 주고는 키오스크에서 병원비를 계산하고 처방전을 뽑아가라고 했다. 당연히 무료라고 생각했던 내 순진함인지 멍청함인지를 비웃듯 병원비는 100유로가 훌쩍 넘게 나왔다. 일요일이라 추가 비용이 발생한 것 같았다. 처방전을 뽑아 약국에 갔다. 두 가지 약을 사고 60유로를 내고 나왔다. 200유로가 조금 안 되는 돈을 순식간에 써버렸다. 지금은 200유로가 별 것 아닐지 모르는 돈이지만 그 당시에는 4-5일은 지낼 수 있는 돈이었다. 막막하고 허탈했다. 싼 호스텔에서 짐을 싸서 나와 한인민박으로 옮겼다. 호스텔보다 13유로 정도 더 비쌌지만, 한국 사람들 틈에 있고 싶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나는 '생인손'이라고 불리는, 알 수 없는 바이러스 감염으로 인해 손가락이 부었던 것이었다. 받아온 약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여 한 알 먹고 버렸다. 며칠 지나니 통증이 사라졌다. 손톱이 빠졌고, 나는 조금 징그러운 손가락으로 나머지 여행을 마쳐야 했다. 


두 번째 예상치 못한 지출은 포르투갈에서였다. 라고스라는 남부 해안도시를 여행할 때였다. 호스텔에 함께 묵던 사람들과 다 같이 카약을 하러 나갔다. 당시 동양인은 전체 마을에 나 하나뿐인 듯했고 호스텔에 있던 사람들은 대부분 호주나 캐나다에 온 내 또래 친구들이었다. 혼자 여행하는 나를 대부분의 친구들이 다정하게 챙겨줬다. 친구들이 카약을 하러 가자고 해서 따라나섰다. 별 것 아닌 것처럼 얘기하길래 선뜻 따라나섰는데 대서양을 오롯이 노 하나로 저어 나가는 게 너무 힘들었다. 더군다나 호주와 캐나다에서 온 키 크고 힘 좋은 친구들을 따라잡기엔 내 체력이 너무 바닥이었다. 결국 가이드분의 배에 내 배를 묶어 질질 끌려갔다. 오묘한 바다색을 구경하기 위해 동굴 속에 잠시 멈췄다. 신비로운 바다 색을 보며 모두가 감탄하고 있는 가운데 나는 혼자서 노를 젓지 못하고 민폐를 끼쳤다는 것에 속상해 의기소침해 있었다. 퀘벡에서 온 크리스틴이 굳이 나에게 카메라를 주면 내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했다. 큰 배를 타고 있는 것도 아니라 불안한 마음에 됐다고 했는데, 자꾸만 내 카메라를 달라고 했다. 당시 나는 사촌언니가 준 삼성 디지털카메라를 들고 여행을 하고 있었다. 이탈리아와 스페인을 거친 내 추억이 오롯이 그 카메라 안에 담겨있었다. 나는 몇 번이고 괜찮다고 했지만, 크리스틴은 한사코 내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했다. 찜찜한 마음으로 카메라를 건넸다. 

"하나, 둘, 셋"

구령과 함께 내 카메라는 바다에 빠졌다. 손 쓸 겨를도 없이 깊이깊이 빠졌다. 왜? 도대체 왜 그랬을까? 왜 싫다는데 굳이 내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한 걸까? 나는 영혼의 힘까지 끌어모아 그날 저녁 크리스틴에게 카메라 값으로 300유로를 요구했다, 현금이 없으니 내일 날 밝은 대로 찾아와 주겠다고 했다. 그녀는 밤 사이 체크아웃을 하고 떠나버렸다. 나는 스페인 세비야로 돌아와 그곳에서 카메라를 다시 구입할 수밖에 없었다. 여행은 아직도 두 달이 넘게 남았기 때문이었다. 고르고 골라 삼성 디지털카메라를 360유로 주고 샀다. 빈털터리가 된 느낌이 들었다. 


어쨌든 나는 예상치 못하게 560유로쯤을 썼다. 숨만 쉬어도 돈을 쓸 수밖에 없는 여행자답게 세비야와 발렌시아, 그라나다를 거쳐 그리스로 여행하면서 크고 작은 지출이 있었다. 여행 막바지에 이르자 정말 빈털터리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리스는 생각보다 배로 이동하는 비용이 컸다. 아테네에서 크레타로 이동해 일주일간 머물렀다. 크레타는 지금도 꼭 다시 한번 가고 싶은 여행지다. 섬의 크기가 매우 크기 때문에 제주도처럼 섬 곳곳에 서로 다른 매력이 가득하고, 파란 지붕에 하얀 집들이 아기자기한 매력보다는 진짜 그리스의 여러 신화가 온 섬에 흩뿌려져 있는, 거칠고도 풍부한 매력이 가득한 곳이다. 음식도 본토나 산토리니 같은 곳과 매우 다르다. 다만, 적도에 가까운 위치에 있어 몹시 덥고, 섬 크기가 정말 크기 때문에 여행하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다. 


돈도 없고 면허도 없는 나는 크레타 관광을 포기했다. 나는 해변이 가까운 호스텔 중에서 가장 싼 호스텔에서 일주일을 머물기로 했다. 호스텔에는 영국에서 온 올리와 프랑스에서 온 여자 친구 둘이 있었다. 그중에서 올리의 이름만 기억에 남는 데는 이유가 있다. 올리는 정해진 거처 없이 여행이 삶인 친구였다. 아직 어디에서 살고 싶은지 정하지 못해 발길 닿는 대로 머물러본다고 했다. 마음에 드는 곳이 생기면 평생 그곳에 자리 잡고 농사를 지으면 살 것이라고 했다. 이동경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올리는 여러 일들을 했다. 종합예술 인적인 면모가 있던 친구라 독일에서는 길에서 그림을 그려 돈을 벌었고, 그리스에 온 뒤로는 '포이'라고 하는 쥐불놀이와 비슷한, 공에 불을 붙여 돌리면서 퍼포먼스를 하는 것으로 돈을 벌고 있었다. '그게 뭐 얼마나 벌겠어?' 하는 예상과 달리 올리는 식당이나 바를 돌면서 공연을 하고 나면 내가 2주를 여행할 수 있는 돈을 버는 날도 있었다. 올리는 저녁에 공연을 해서 돈을 번 다음 꼭 돌아오는 길에 피자를 세 판씩 사 왔다. 아빠의 월급날을 기다렸던 아이들처럼 프랑스 친구들과 나는 올리가 오기만을 기다렸다가 피자를 순식간에 먹어치웠다. 피자를 먹고 밤이 되면 바다로 나갔다. 해변을 걷기만 해도 그렇게 즐거울 수 없었다. 올리와 나, 그리고 프랑스 친구들까지 우리 넷은 손을 나란히 잡고 강강술래를 하듯 해변을 걷고 또 걸었다. 밤이 어두워도 바다는 따뜻했다. 밤바다에서 수영을 하다 모래사장으로 나와 맥주를 마셨다. 낮동안 해를 너무 많이 쬐서일지, 그냥 그 젊은 날에만 할 수 있는 나른한 여행을 하고 있어선지 특별할 것 하나 없는 그 밤의 산책에도 우리는 흠뻑 취했다. 


상상을 초월하는 더위가 내려앉는 크레타에서의 낮 시간 동안 올리는 구슬과 끈을 꿰어 액세서리를 만들었다. 두 번째 발가락에 한쪽 끈을 잘 고정시킨 다음 순식간에 끈으로 레이스를 만들고 그 사이를 구슬로 채웠다. 나는 올리 옆에 앉아 올리에게 팔찌 만드는 법을 알려달라고 졸랐다. 착한 올리는 내 발가락에 끈을 감고 팔찌며 발찌 만드는 법을 가르쳐줬다. 우리는 에어컨도 없는 호스텔에서 콧잔등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는지도 모르고 매일같이 팔찌를 만들었다. 매번 밥을 사주는 올리에게 뭐든 해주고 싶다는 빚진 마음을 가득 담아 나는 빠른 속도로 팔찌를 만들어냈다. 다 만든 팔찌와 발찌는 올리가 저녁에 나가서 팔아왔다. 올리는 액세서리를 판 돈으로 나에게 기로스를 사줬다. 

글을 쓰다 생각이 나서 꺼내봤다. 빛이 다 바랬지만 아직도 짱짱한 내 팔찌. Made in Paros

크레타에서 낙소스로 이동했다. 크레타에 비해 크게 흥미진진하진 않았지만, 그리스 사람들이 휴양지로 많이 오는 곳답게 적절하게 아름다운 해변과 편안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호스텔 주인이 추천한 섬 투어를 가기로 했다. 생각보다 비용이 비싸지 않고, 낮동안의 심심한 시간을 보내기 좋아 보였다. 낙소스 근처의 작은 섬들을 돌아보고 오는 프로그램이었다. 배에 올라 경치를 감상하고 있는데 어떤 중년의 아주머니가 배 밖으로 오바이트를 하기 시작했다. 본능적으로 아주머니의 긴 곱슬머리를 잡아드렸다. 아주머니는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영어를 할 줄 아는 (그러나 멀미하는 와이프 머리를 잡아주러 나오지는 않은) 남편을 불렀다. 먼 곳에서 혼자 여행 온 나를 기특해하며, 섬에서 내려서 어디로 갈 거냐고 물었다. 나는 그냥 배로 한 바퀴를 돌아보는 건 줄 알았는데, 한 섬에서 2시간 자유시간을 준다고? 대답을 못하고 있는 나에게 부부는 같이 밥을 먹으러 가자고 했다.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우리는 한 섬에 내려 아기자기한 에게해가 내려다 보이는 한 식당으로 들어갔다. 


식당이라고 해서 식당인 줄 알았지, 그냥 허름한 가정집 같은 곳이었다. 테이블은 마당에 하나밖에 없었다. 주인아줌마는 우리에게 준비가 덜 되었으니 기다리라고 하더니, 한 상 가득 채소 요리와 빵들을 내왔다. 빵을 조금 먹고 있는데 아저씨가 빵으로 배를 채우지 말라고 했다. 차려내 온 음식을 먹지도 못하게 하다니 뭐 얼마나 대단한 음식이 나오려나 싶어 고픈 배를 참고 기다렸다. 어부 아저씨가 펄떡펄떡 뛰는 생선을 양 손 가득 통에 들고 들어왔다. 그곳은 어부 부부의 집이자, 아저씨가 잡아온 생선을 요리해 파는 가정집 식당이었던 것이었다. 어부 아저씨는 우리에게 오늘은 이런 걸 잡았다고 설명하고, 부부는 어떤 식으로 요리해달라고 주문했다. 우리나라 횟집에서 반찬, 신선한 해산물 모둠, 모둠 회, 초밥, 튀김, 조림, 탕이 나오는 것처럼 갓 잡아 올린 생선들로 여러 가지 요리가 만들어져 나왔다. 튀기거나 굽거나 찌거나 조렸다. 신선한 생선살은 입에서 단맛을 한껏 뿜으며 사르르 녹아 사라져 갔다. 로컬 화이트 와인도 한 병 나눠 마셨다. 밥값을 한사코 내주시겠다고 하신 아저씨는 나중에 당신 아들이 한국에 놀러 가면 밥 한 끼 사주라고 했다. 지켜지기 힘든 약속이라는 걸 서로 알면서도, 홀로 먼 곳에 여행 온 배낭여행객을 자식 보듯 보듬어주는 마음을 감사히 받았다. 


낙소스에서 파로스로 이동했을 때 '다음 주엔 정말 돈이 하나도 없을지도 모르겠군' 싶었다. 부모님이 비상금으로 쓰라고 챙겨준 돈과 카드가 있었지만 그건 정말 마지막 보루로 남겨두고 싶었다. 파로스 배 선착장에 내리니 같이 배를 탔던 관광객들과 그 관광객들을 모시고 가려는 호텔 직원들이 한데 어우러져 난리도 아니었다. 나는 피켓을 들고 있는 사람들 중 'Camping'이라는 사인을 들고 있는 사람에게 다가갔다. 

"캠핑하려고요? 우리 글램핑부터 1인 텐트까지 다 있어요. 텐트 없으면 우리 거 빌려줘요. 텐트도 쳐드려요."

"1인 텐트는 얼마예요?"

"1박에 2.5유로예요. 텐트 포함하면 3.5유로"

"저 5박 할 건데, 디스카운트 안될까요? 제가 장기여행 중이라 그래요."

"... 그럼 이렇게 할래요? 저 대신 내일부터 여기서 손님들을 픽업해와요. 그럼 내가 돈 안 받을게요."

그럴싸한 제안이었다. 캠핑장을 예약한 손님들을 찾아서 캠핑장으로 안내하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하루 두 번 배가 들어오는 시간만 맞추면 됐다. 나는 그렇게 하루에 두 번 파로스 항구에 나갔다. 


캠핑장에서 내가 배정받은 1인 텐트존에는 40대 싱글 언니,  그리고 두 명의 이탈리아 소년들이 있었다. 빼곡하게 쳐진 1인 텐트에 번데기처럼 들어가 잠을 자던 우리는 아침이 되면 빼꼼히 텐트를 열고 나와 이 더위에 다들 죽지 않고 살았는지 안부를 확인했다. 따뜻한 물은 세 시간마다 한 명이 샤워할 정도만 나오기 때문에 매너가 좋은 이탈리아 소년들은 40대 언니와 내가 먼저 샤워할 수 있게 배려해줬다. 항구에 사람들을 안내하러 갈 시간이 되면 이탈리아 소년들은 베스파에 나를 싣고 데려다줬다. 낮 시간에는 다 같이 해변이나 구시가로 밥을 먹으러 가거나 태닝을 하러 갔다. 점심은 무조건 기로스를 먹었다. 길에 있는 스탠드에서 2유로짜리 기로스를 사면 내 팔뚝만 기로스에 고기와 야채, 그리고 감자튀김과 요구르트 소스를 듬뿍 담아줬다. 기로스 하나를 먹고 나면 하루 종일 배가 고프지도 않았다. 소년들은 캠핑 배낭 안에 토마토 캔과 파스타면을 잔뜩 챙겨 왔다. 우리가 아프면 흰 죽을 먹듯, 그들은 컨디션이 좋지 않은 날 파스타 면만 소금물에 삶아 먹었다. 가끔은 나에게 토마토소스와 치즈만 넣은 간단한 파스타를 만들어주기도 했다. 옆 텐트에 있던 40대 싱글 언니는 가끔 나를 카페로 데려가 달고나 커피와 비슷한 그리스식 아이스커피나 아이스크림을 사주기도 했다. 5일 차가 되던 저녁, 캠핑장 주인은 나와 이탈리아 소년 둘, 40대 언니를 모두 데리고 나가 외식을 시켜줬다. 파로스에서 처음으로 한 상차림을 먹었다. 나는 올리와 함께 만든 팔찌와 발찌들을 모두에게 선물했다. 5일간 아침마다 생사를 물을 수밖에 없었던 텐트에서 지낸 사람들 치고는 깊은 우정이었다. 

나는 더 이상 탈 수 없을 만큼 까맣게 탔다. 피부가 짙어지는 만큼 집에 가고 싶은 마음도 사라졌다.


돈이 좀 부족하다고 해서 누구에게 의지하거나 할 생각은 없었는데, 그때마다 누군가 나타나주었다. 등가교환이 아닌 가치들이지만 가지고 있는 것들을 나누며 여행했다. 줄이고 또 줄인 여행경비 덕분에 만난 사람들. 그래서 생기는 에피소드들. 서른이 넘어 간 여행에서 이런 일이 잘 일어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내가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호텔에서 묵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기저에는 안전에 대한 경각심이 더 생겼고, 낯선 사람들과 예전처럼 허물없이 지내지 않고, 현생이 힘들고 도망치고 싶어 떠난 여행이라 누군가와 교류하기보다는 혼자 있는 편을 택하는 순간들이 많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서른 하나에 스페인으로 떠난 여행에서 나는 옛날 추억을 회상해보자는 마음으로 도미토리를 예약한 적이 있다. 플레이스테이션을 보유한 호스텔에서 남자 3명과 같이 쓰는 4인실이었다. 룸메이트 남자애들이 플레이스테이션을 하다가 나를 발견하고 '우리 방에 아시아 여자 왔다!!!'를 외치며 호들갑을 떠는 것을 듣고 그대로 짐을 싸서 나왔다. 바로 옆 작은 호텔에서 나만의 침대에 누웠을 때의 그 안정감. 그리고 동시에 느껴지는 '아 나는 절대로 과거로 돌아갈 순 없겠구나'하는 약간의 아쉬움이 묘하게 섞였다. 지금 돈 없는 배낭여행객으로 다시 여행을 떠날 수 있을까. 그러기에 내가 너무 나이를 먹었고, 사회는 흉흉해졌으며, 체력이 바닥나버린 것일까? 매일 쏟아지는 사회면의 기사들을 읽으며 인류애를 잃어가면서도 나는 왜 아직도 사람에게 기대고, 사람들을 통해 즐거움을 찾으려고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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