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글쓰기를 망설인다.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일기 쓰기를 싫어했다. 일기 쓰기는 언제나 숙제였고 내가 쓴 일기에 선생님이 '참 잘했어요'를 비롯한 각종 의견을 달아주는 것이 무척 부담스러웠다. 어린 나이였지만 누군가 내 일기를 보고 평가를 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선생님-가끔은 부모님일 때도!-이라는 사실은 순수하게 오늘 있었던 일과 내 속마음을 쓰는 것을 불가능하게 했다. 일기로 보여지는 내 일상은 언제나 즐겁고 씩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친구랑 싸워서 화해를 못한 날에도 '내일은 먼저 친구에게 미안하다고 해야겠다'와 같은 마음에 없는 소리들만 나열했어야 했다. 누가 그러라고 시킨 건 아니지만, 날 때부터 내 핏속에 흐르던 '인정 욕구'가 일기 쓰기 과제에서 증폭됐으리라.
그 이후로 일기는 물론 어떠한 개인적인 글쓰기도 하지 않았다. 이제 일기를 써도 누가 평가하는 것도 아닌데 내가 내 얘기를 쓴다는 것 자체가 어색하고 불편한 일이 됐다. 해가 바뀔 때 일기장을 사서 뭐라도 기록해보자 결심한 날들도 있었지만, 일기에 쓸 거리가 없는 지루한 일상들로 며칠을 보내고 나면 결국 일기장은 해야 할 일을 나열하는 수첩 정도로 역할을 달리 하고 있었다. 평범하고 지루한 하루를 보냈다 하더라도 그 속에서 일기에 쓸만한 소재를 발견해서 예쁘게 포장을 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은 나를 글쓰기에서 점점 더 멀어지게 했다. 설령 몇 줄이라도 애써 포장해 쓰고 나면 영락없이 그 문장들은 보잘것없고 유치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 문장들을 두꺼운 펜으로 그어버리거나 그 페이지를 찢어 없앤 다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척했다.
일기를 쓰지 않아도, 블로그를 쓰지 않아도, 브런치 작가가 되지 않아도 내 삶은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어떤 날은 지루했지만 또 어떤 날은 '오늘 하루의 기억으로 난 평생을 살겠다' 싶었다. 그래도 글을 쓰진 않았다. 글로 쓰면 어쩐지 이 벅차고 뿌듯한 기분이 유치하고 허접하게 남을 것 같았다. 사진을 찍어 인스타그램에 올리면서도 별 다른 코멘트를 많이 쓰진 않았다. 어쩌다 주절주절 남기면 어느 순간 꼭 이불을 발로 차며 그 부분만 삭제를 하거나 게시물 전체를 감춰버렸다. 내 일기를 보는 사람이 나 밖에 없대도, 내 포스팅을 보는 것이 내 친구들 뿐이라고 하더라도 나는 담백하고, 쿨하고, 멋있고 싶었다. 기록하지 않으면 그 순간을 보낸 나를 덜 기억할지 모르지만, 부끄럽거나 평가당할 일은 없었다.
완벽할 수 없는 것이 완벽하길 바라는 마음은 내 글쓰기뿐 아니라 짝사랑도 가로막았다. 나는 짝사랑의 경험이 없다. 호감 가는 누군가 생기면 그 사람도 나를 좋아할지부터 따졌다. 그리고 만약 그럴 가능성이 없다면 나는 그대로 단념했다. 사랑하지 않으면 거절당할 일도, 마음이 아플 일도, 나중에 이불을 찰 일도 없다고 생각했다. 상대가 내 마음을 알지만 받아줄 마음이 없는데도 계속되는 일방향의 연애의 감정은 민폐고 일종의 폭력이라고도 생각했다. 이 연애의 감정에 승산이 있다 싶으면 그때부터 베팅을 시작했다. 원금보장 무손실 펀드에만 투자하는 안정형 개미의 연애는 백전백승이었다. 그런데 어쩐지 많이 찜찜한...
내가 언젠가 내 순정을 다하는 짝사랑을 할 일이 생길까. 연애의 끝은 늘 이별일 뿐이라는 걸 인정하게 된 지금은 조금 다를지도 모르겠다. 살면서 많은 거절을 겪어왔고, 거절을 인정하고 회복한 경험이 쌓이면서 조금 용기가 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단념한다고 해서 내 감정이 없던 일이 되는 건 아니라는 걸 인정할 수 있게 됐다. 당장 내일 짝사랑의 대상을 찾아 나설일은 없지만, 언젠가 나도 모르게 스며든 감정에 원금 보장 여부와 손실 리스크부터 계산하진 않을 수 있을까? 신변잡기를 있는 대로 일단 써 보고 마는 요즘의 내 글쓰기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