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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놀라는 감사를 싣고

금바지를입고 그래놀라를 배달했다.

by 망원동 바히네

감사해야 할 사람들이 많아졌다. 회복기간 동안 응원의 말을 건네준 사람들, 집으로 먹을거리나 읽을거리들을 보내준 친구들, 그리고 집으로 찾아와 내가 잘 지내는지 들여다 봐준 사람들이 있었다. 폭풍우가 휘몰아치고 이제 폭풍의 잔재를 걷어치우는 일만 남은 나에게, 이 사람들에게 적절히 감사의 인사를 건네는 일은 중요한 하나의 과제였다. 나는 나만의 방법으로 감사의 인사를 전하기로 했다. 그래놀라를 열심히 구워 선물하는 것으로 말이다.


이전에도 그래놀라를 지인들에게 종종 선물했었다. 보통은 자주 사 먹는 요거트를 다 먹고 빈 병을 깨끗이 소독해 그 병에 담아 주었다. 막상 한꺼번에 꽤 여러 명에게 선물하려고 마음을 먹고 나니 패키징을 달리하고 싶었다. 뭔가 더 본격적이고 정성이 가득 담겨있다는 것을 패키지로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마음을 먹었을 때 실행하지 않으면 일을 진척시키기 어려운 것을 아는 나는, 그래놀라의 브랜드명을 정해 보기로 했다.


작년에 앤초비 2kg을 담가 지인들에게 선물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친구가 내 앤초비의 브랜드명 겸 별명을 <처비처비 앤초비(Chubby chubby anchovy)>라고 지어줬다. 내 이름을 담은 <지혜로운 앤초비> 안과 박빙이었지만, <처비처비 앤초비>가 더 내 이미지와 어울리는 듯했다. 앤초비는 올해도 2kg을 염장해 두었기 때문에 앤초비 라벨도 함께 만들기로 했다. 그리고 버리기 아까운 아이디어인 <지혜로운>은 앞으로 얼마나 만들지 모르는 상품들을 아우르는 회사명처럼 쓰기로 했다. 그리고 앤초비 브랜드명과 같은 라인으로 그래놀라의 브랜드명을 <훌라훌라 그래놀라(Hula hula granola)>라고 지었다. 역시 지인들에게 아이디어를 빌렸다. 이렇게 두 가지 상품의 이름을 정하고 나니 놀랍게도 내 정체성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Chubby와 Hula라니. 세상 이런 네이밍 천재들 같으니라고.


네이밍이 정해지고 나는 바로 지인에게 패키지 디자인을 부탁했다. 앤초비의 라벨은 지중해의 느낌이 묻어나는 빈티지한 라벨로, 그래놀라의 라벨은 훌라를 추고 있는 내 모습을 담아달라고 했다. 한 번도 같이 작업을 안 해봤던 지인이었지만, 심지어 그 디자이너도 상품 라벨 디자인의 경험은 없었던 분이지만 우리 둘은 그냥 신이 났다. 시안이 도착했다. 수정할 것도 없이 그냥 내 라벨이었다. 특히 그래놀라의 라벨에는 내가 후광을 뿜으며 춤을 추고 각종 견과류가 나를 중심으로 원형을 그리고 있어 특히 마음에 들었다. 태국 음식을 할 때 필요한 조미료를 사러 가면 가장 유명한 브랜드에 공통적으로 어떤 중년 여성의 사진이 박혀있는 제품들이 있다. 예전에 태국에서 쿠킹클래스를 들을 때 선생님이 그 브랜드의 제품을 자주 쓴다고, 화학조미료가 많이 들지 않은 제품들이 있다고 설명했던 기억이 났다. 나는 마치 그 태국 조미료계의 김수미 선생님 같은 사람이나 된냥 신이 났다. 훌라춤을 추고 있는 내 사진이 붙어있는 <훌라훌라 그래놀라>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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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성된 두 가지 제품의 라벨.


라벨을 제작하고 나니 그래놀라도 조금 더 업데이트를 하고 싶어 졌다. 늘 비슷하게 시나몬과 오렌지를 이용해 구웠었는데, 당과 들어가는 부재료들을 조금씩 바꿔서 세 가지 맛으로 만들어보기로 했다. 테스트를 하면서 모든 재료를 계량해 레시피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 세 가지 맛 제품에 각각 이름을 붙여보기로도. 깔끔한 플레인 맛에 크랜베리를 더한 <sweet like you>, 오렌지와 감귤, 그리고 꿀을 이용한 <siglover> (시그럽다는 경상도 사투리에서 착안), 피칸과 시나몬, 메이플시럽을 이용한 <naughty nutty>가 완성됐다. 각 재료의 양과 굽는 시간, 뒤집는 시간도 다시 테스트를 통해 재정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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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주방에서, 작은 오븐으로 열심히 구웠다. 복잡할 것이 없는 과정인데 막상 대량생산을 하려고 하니 몸살이 나는 것 같았다.


대체적으로 내가 만든 것들에 대해 많이 관대한 편이기도 하지만, 세 가지 맛 그래놀라는 지금까지 만들었던 그래놀라 중에 제일 마음에 들었다. 라벨을 봉투에 붙이고 그래놀라를 담고 나니 정말 그럴싸한 패키지가 됐다.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포스팅하자 구매 문의도 생각보다 많이 들어왔다. 워낙 만들어 먹는 것을, 그중에서도 함께 나눠 먹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나를 잘 알아온 지인들은 '얘가 또 집에서 뭘 열심히 하네' 하면서도 '아 이번엔 너무 본격적이네?'라는 반응이었다. 이 정도면 선물을 받는 이도 함께 하하하 하고 웃으며 그래놀라를 즐겨주지 않을까 싶었다. 본인 사진을, 그것도 춤을 추고 있는 사진을 떡하니 박아 넣은 그래놀라라니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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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벨을 디자인한 비용, 출력하는 비용, 그리고 봉투를 구매하는 비용과 재료비까지 비용이 적게 들지는 않았다. 할 일이 많아 피곤했던 날 저녁, 누워서 넷플릭스를 보고 싶은 마음을 참으며 봉투에 스티커를 붙이고 그래놀라를 담았다. 워낙 초저녁 잠이 많은 사람이 밤 9시가 넘도록 그래놀라를 포장하고 있는 것을 자각하고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났다. 남들이 아이돌 덕질을 하는 것을 보고 한편 부러운 마음이 든 적이 많았다. 누군가를 그렇게 조건 없이 좋아할 수 있는 마음은 정말 순수하다고 생각했다. 친구 중에는 아이돌 덕질의 방법으로 퇴근 후 밤늦게까지 그들의 영상을 만들어 커뮤니티에 공유하는 일을 자원해서 해 오다 영상 편집자로 직업을 전향한 이도 있다. 고되게 회사생활을 열심히 해서 번 돈으로 BTS의 미국 공연을 비즈니스석을 타고 보러 갔다 오는 사람도 있다. '나는 왜 누군가를 저렇게 좋아해 본 적이 없지?'라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그날 밤, 그래놀라를 포장하면서 '아... 나는 나를, 그리고 집에서 만드는 요리를 덕질하는 것이었구나' 싶었다.


첫 대량생산의 결과물은 홍콩에 사는 친구에게 보냈다. 우리는 서로의 아픈 손가락이라고 생각하고 살고 있는데, 내 아픈 손가락이 밥은 안 먹히고 내 그래놀라만 먹고 있다고 하니 안 보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과장이 잔뜩 섞인 말이었겠지만, 그래도 친구가 잘 챙겨 먹었으면 하는 마음을 담았다. 두 번째 대량생산의 결과물은 내 회복기간 동안 집에 찾아오거나 집으로 뭔가를 보내주며 응원해준 지인들에게 보냈다. 대부분은 택배로 보내고, 성수동에 갈 일이 생겨 뚝섬에서 와인바를 하는 친구들에게는 직접 전하기로 했다. 몇 달 동안 집에만 있다가 오랜만에 외출을 하게 되니 신이 났다. 성수동에 가는 날 나는 옷장 깊숙이 묻어두고 한 동안 입지 않았던 '금바지'를 꺼내 입었다. 폴리네시안 춤을 추는 복장으로 가기에는 친구 업장에 민폐인 것 같아 그다음으로 가장 나다운 옷을 꺼내 입은 것이었다. 4년 전쯤 산 이 금바지는 진짜 번쩍거리는 금색이다. 너무 튀나 싶었지만 가지고 있던 상의와 매치가 되는 것 같아 구매했다. 그 이후 남들이 뭐라건 잘 입고 다니던 옷이었는데 코로나 이후로 한 번도 입지 못했다. 손가락에는 새로 산 반지를 꼈다. 'Ciao(안녕)'이라는 글씨를 모티브로 만든 반지다. 오랜만에 꺼내 입은 옷 때문이었는지, 새로 산 반지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자기애를 가득 담은 그래놀라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오랜만에 한껏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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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아주 썩 맘에 든다. 심지어 내 탄생석인 진주가 박힌 반지라니! 작고 까맣고 통통한 내 손에 찰떡이야! (우)금바지는 진짜 금바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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