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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도 용서도 할 줄을 몰라서

미안하다고 해도 괜찮아. 괜찮다고 해도 괜찮아.

by 망원동 바히네

미안하다고 말하는 건 언제나 어렵다. 요즘은 특히 그렇다. '니 잘못이 아니야. 사회 또는 상대가 잘못한 거지.'라는 메시지가 여기저기서 강조된다. 물론 내 잘못이 아닌 것을 온통 끌어안고 괴로워하는 이들을 위한 메시지겠지만, 스스로의 잘못을 마주하는 일보다 회피하며 괴로움을 더는 것이 조금 더 우선시 되는 것 같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나가떨어지지 않기 위해 내 잘못이 아닌 일에 선을 긋는 것을 훈련받는 동안, 내 잘못을 겸허히 인정하고 시의적절하게 사과하는 방법을 자꾸만 잊고 살게 된다. 별 일 아닌 일에 '죄송하다'는 말을 습관처럼 내뱉는 것은 지양해야 하지만, 미안할 일에 미안하다 말했는데 굳이 이를 만류할 필요도 없지 않은가?


삼성서울병원이 메르스의 집단 전파자 역할을 했다는 비판에 대한 이재용 부회장의 대국민 사과문은 지금까지 위기관리 사과방식의 정석으로 남아 회자된다. 사태의 핵심을 제대로 파악하고 인정했는지, 책임을 어떻게 질 것인지 계획이 있는지, 피해를 입은 자들과 공감하는지, 그리고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 사과를 했는지 등 그동안 위기관리론에서 언급해오던 '바른 사과'의 조건을 모두 갖춘 사과였다는 평이다. 그때 당시 다니던 회사는 대외 커뮤니케이션과 컨설팅을 하던 회사였고, 따로 시간을 내어 직원들에게 해당 사과문을 놓고 위기관리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교육을 해주기도 했다. 당시 우리는 고객사를 상대로 일을 하는 대행사였기 때문에 회사는 언제나 우리에게 '사과하지 말 것'을 교육받기도 했다. 법적 책임 소지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이슈가 생겼을 때 즉시 사과하지 말라는 것이다. 실수는 직원이 하더라도 사태에 대한 책임 소지와 해결방안이 준비된 이후에 임원이 사과하게 하라는 것이다. 메르스 사태에 대해서 이재용 부회장이 사과하듯, 업무에 있어서 생긴 문제는 회사차원에서 사과를 하는 것이다. 직원을 보호하는 방법이기도 했고, 장기적으로 회사를 보호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그러나 직원 입장에서 사과하지 않는 것은 사과하는 것만큼이나 익숙하지 않은 일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사소한 실수여서 죄송하다고 한 마디 하고 넘어가면 될 일인데, '함부로 사과하지 말라'는 가르침은 내재화되어 가볍게 문제를 넘기지 못하게 만들 때도 있었다. '죄송하다'는 말 대신 '내일까지 다시 하겠습니다' 또는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만 남발했다. 누가 봐도 '죄송하다'는 말이 괄호 안에 들어가 있었지만, 내뱉지 못했다. 말하는 이도 듣는 이도 어색하고 애매하기만 했다. 연차가 차면서 내 선에서 '죄송하다' 사과하고 사태를 빠르게 수습하는 경우는 늘어났지만, 여전히 잘못을 인지한 즉시 사과하는 일은 하면서도 찝찝한 어떤 그 무언가가 되어버렸다.


나는 올해 초 누군가에게 진심을 다해 사과한 적이 있다. 이미 끝난 인연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상대에게 상처를 준 것에 대해 용기를 내 사과했다. 상처를 준 말들에 대해 인정하고, 그렇게 못나게 굴었던 상황을 설명하고, 상대가 받았을 상처에 대해 공감하고 사과했다. 상대의 용서를 바라지도 않았고, 상대와 인연을 다시 잘 이어갈 수 있을 것이란 주제넘은 생각은 더욱 하지 않았다. 대차게 욕이나 먹지 않으면 감사할 일이었다. 잘한 게 하나도 없어서 눈물 콧물 다 뽑으며 사과했는데, 상대는 보란 듯이 나를 용서했다. 내가 뱉은 말에 상처는 받았지만, 그때의 내 사정을 이해했고, 앞으로 서로 조심하자고 했다. 용서하는 동안 내가 얼마나 나쁜 말을 했었는지, 내가 얼마나 나쁜 사람이었는지는 조금도 언급하지 않았다. 인상 깊은 용서였다.


나는 올해 사과를 요구했지만 대차게 거절당한 일도 있다. 사과를 요구하는 일조차도 나에겐 큰 용기가 필요했다. 나는 상대의 사과를 통해 무엇을 얻고자 하는지 구체화하지 못했다. 정작 사과를 한다고 해서 내 기분이 조금이라도 나아지지 않을 것 같았고, 내 몸에 상처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돈 몇 푼이 사과를 대신할 수도 없었다. 분명 나는 돈 보다 사과를 원하는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과가 내 기분을 나아지게 할 것이라는 확신이 없었다. 나는 용서할 준비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사과할 생각이 없는 상대에게 용서할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이 사과를 요구하니, 이 계약이 성사될 리 만무했다. 결국 시간이 흐르고 기억의 재구성 능력은 언제나처럼 괴로웠던 기억만 싹 걷어가 버렸다.


사과하는 일만큼이나 용서하는 일은 용기가 필요하다. 용서는 상대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선택이다. 상대를 미워하거나 무관심의 영역에 두거나 또는 상대에게 똑같이 되갚아줄 권리를 자진해서 포기하는 일이다. 대신 나는 미래의 고통을 없앨 수 있는 기회 취하는 교환의 작업이다. 나란히 교환한 그 가치 덕분에 나는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앞으로 나갈 수 있다. 어찌 보면 용서는 이 사태의 책임이 상대에게 있다는 것을, 잘못을 상대가 저질렀다는 것을, 나는 오롯이 피해자라는 것을 전제해야 성립한다. 잘못된 사태를 해결하는 방법이라기보다는 내가 상대를 어떻게 대할지, 감정을 풀어내는 일이다. 말도 어렵지만 행동은 더 어렵다. 시기를 놓치지 않는 것도 필요하다.


'이건 내 잘못이 아니야'라고 단호하게 선을 긋는 일만큼이나 내가 내 잘못을 마주하는 일에 재빠르길, 분노를 거둬내고 앞으로 나가아는 일에 적극적으로 살 수 있기를. 여자라서, 성격 탓에 괜히 더 미안해하는 것과 용기 있게 상황을 마주하고 인정하는 일을 구분할 수 있는 통찰력을 가질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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