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을 함께한 내 주근깨에 대한 이야기
내가 다니던 유치원에는 ‘마당놀이’ 시간이 있었다. 말 그대로 원생들이 유치원 교실이 아닌 원내‘마당’이라 불리는 놀이터에서 자유롭게 놀 수 있게 하는 시간이었다. 원생들이 놀이터 모래를 파고 놀 때 아무것도 나오지 않으면 흥미를 잃을까 봐 정기적으로 모래에 예쁜 조개껍데기며 조약돌을 정성스레 파묻어주는, 그야말로 ‘마당놀이’에 진심인 유치원이었다. 마당 옆에는 작은 규모의 동물원도 있었다. 원숭이, 공작새, 닭 등이 있는 꽤나 근사한 동물원이었다.
대부분의 어린이들은 마당놀이 시간을 하루 수업 일과 중 가장 기대했다. 서로 싸우지 말 것, 마당 밖으로 나가지 말 것과 같은 느슨한 규칙만 있고, 영어나 숫자를 공부할 필요도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렇지 않았다. 마당놀이 시간만 되면 극도로 우울하고 불안해졌다. 나는 마당놀이가 싫은 만큼이나 마당놀이를 하기 싫다고 선생님께 말하는 것도 정말 싫었다. 그 이유를 말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용기를 내 선생님께 교실에 남아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말했지만, 그때마다 선생님은 나를 달래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마지못해 밖으로 나간 나는 스케치북과 크레파스를 가지고 나가 큰 나무 그늘 밑에 자리를 잡고 그림을 그렸다. 해가 움직여 나무의 그림자가 따라 움직이면, 나도 따라 움직였다. 선생님은 처음에 내가 친구들과 지내는 것을 힘들어하는 줄 걱정하셨지만, 나는 꽤나 골목대장 기질을 가진 아이였다. 다만 그 공간이 ‘마당’이라면 얘기가 달랐다. 주근깨 때문이었다.
엄마의 양 볼에는 주근깨가 있었다. 농사를 지은 것도 아닌데 피부색은 살짝 그을린, 요즘으로 말하자면 태닝을 한 듯 한 피부였다. 엄마의 주근깨는 구태여 신경 써 보지 않으면 의식을 못할 수도 있는 정도였다. 그러나 엄마는 주근깨를 꽤나 성가시고 불필요한 존재로 생각하셨다. 뽀얀 피부에 크고 동그란 눈, 마늘 같은 코, 앵두 같은 입술이 전형적인 미인상이던 시절을 살아왔기에 당연한 생각이었을 터. 특히 ‘잡티’로만 생각되는 주근깨는 당시 레이저로 지워버릴 수도 없고, ‘화운데이션’을 덧발라 흐리게 만들어도 몇 시간이 지나면 다시 드러나는 골칫덩어리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지혜야, 너는 햇빛에 나가면 큰일 나. 엄마처럼 주근깨 생겨. 선크림을 꼭 발라야 하지만, 선크림을 발라도 햇빛에 오래 나가면 큰일 나.” 나는 이 말을 내가 주근깨라는 글씨를 알기도 전부터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다.
나는 창이 크고 레이스 꽃이 달린, 영국 왕실에서나 쓸법한 모자를 쓰고 유치원에 가기 시작했다. 당시 원복에 포함돼 있던 모자가 있었지만 창이 거의 없어 무시무시한 주근깨의 위협으로부터 나를 보호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친구들이 놀리는 것쯤은 문제 되지 않았다. 엄마의 말처럼 주근깨가 생기면 정말 큰일이 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안타깝게도 내 피부는 엄마를 닮았다. 아무리 피해봐도 내 피부엔 주근깨가 하나 둘 생겨났다. 그 누구도 내 주근깨로 나를 놀리거나 비난하지 않았지만, 나는 저렴한 화장품 브랜드에서 컬러로션을 살 때부터 컨실러를 함께 구매해 주근깨를 가렸다. 솜털은 보송했지만 화장은 두꺼워 어색했다. 지금 대학교 신입생 때의 사진을 보면 이불을 차고 싶어 진다. 그래도 난 주근깨가 보이느니 그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스물둘에 나는 학교를 잠시 쉬고 여행을 떠났다. 혼자 뭐라도 해 보고 싶은 마음이 컸고, 유학을 가고 싶었지만 겁이 났다. 유학을 결심하기 전에 외국 생활을 잠시 해보고 싶었다. 주말엔 카페에서 커피를 만들고 주중에는 국가 소속기관에서 사무보조 아르바이트를 해 돈을 모았다. 장학금도 받았다. 공부가 그렇게 싫다가 목표가 생기니 성과를 만들어 냈다. 그렇게 준비해 4개월의 여행자금을 모았다. 이탈리아 로마로 입국해 스페인, 그리스, 포르투갈과 북부 아프리카를 여행했다. 우물 안 개구리로 살아온 내가 다른 나라 사람들 사이에서도 잘 지낼 수 있을지를 시험해보고 싶어 떠난 여행이었지만, 나는 여행을 가서도 소소한 골목대장 기질을 발휘했다. 여행 온 여행객들, 동네에 사는 사람들 할 것 없이 친구가 됐고 밥을 같이 먹고 함께 여행했다.
그중에서도 꽤 오랜 기간을 같이 여행한 캐나다 친구가 있었다. 몬트리올에서 온 줄리엔은 프랑스 문화권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특히 로맨틱하고 다정했다. 우리는 함께 3주 동안 세비아, 발렌시아, 바르셀로나를 여행했다. 길거리를 걷고 시장에서 재료를 사 와 호스텔에서 간단히 요리를 해 먹었다. 낮엔 해변으로 갔다.
유럽 여느 해변처럼 사람들은 지글지글 끓는 태양 아래 최소한의 수영복만 - 실제로 여성들도 상의를 입지 않은 경우가 많다-입고 그 태양을 고스란히 즐기고 있었다. 큰 우산이나 파라솔로 그늘을 만드는 경우도 있었지만 드물었고, 대부분은 비치타월을 깔고 그 위에 그냥 눕거나 앉아 무료한 시간을 있는 그대로 즐겼다. 나에게는 매우 생소한 광경이었다. ‘이 사람들은 태양이 무섭지 않은가? 주근깨가 생기면 어쩌려고...’
“지혜, 볼에 태양의 키스마크가 있네.”
“키스마크? 그게 뭐야. 주근깨가 있다고 날 놀리는 거야?”
“아니. 진심이야. 태양이 널 아껴서 니 볼에 키스마크를 남긴 거야. 여기도, 여기도, 그리고 여기도, 그리고 여기도.”
줄리엔은 내 주근깨 하나하나를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새로운 발상이었다. 저런 말을 할 줄 아는 건 정말 유전적으로 타고나는 것일까 생각했다. 단언컨대 나는 줄리엔 이전과 이후에 그 어떤 사람도 나에게 저렇게까지 다정하게 말을 해주는 이는 없었다. 주근깨가 생길까 평생을 전전긍긍했던 나에게 태양이 날 사랑한 증거라고 말해주다니!
그 뒤로 나는 내 주근깨를 가리느라 아침마다 고생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 주근깨 때문에 내 외모를 나쁘게 평가할 사람은 적어도 지금 당장은 없다는 안전함을 느꼈다. 여행 기간이 길어질수록 내 피부는 점점 더 짙은 갈색으로 변해갔고, 주근깨 수도 늘어갔지만, 나는 그게 썩 마음에 들기도 했다. 내 피부가 더 짙어지고 주근깨 수가 늘어갈수록, 나는 더 활기가 넘치는 것 같았다. 늘 웃고 있었고, 아무에게나 인사를 건넸고, 음식을 나눠먹었다. 내일은 어딜 갈지, 어떻게 가야 할지, 그리고 여행 후 무엇을 해야 할지는 하나도 걱정되지 않았다. 타고나기를 계획을 잘 못 세우고 순발력이 있는 편이었지만, 늘 불안했었다. 그런데 그 불안만 쏙 태양이 빼 간 느낌이었다. 그리고 내 옆에는 내 볼에 자리 잡은 태양의 키스마크가 예쁘다 말해주는 친구가 있었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정확하게 기억할 수는 없지만, 어린 시절부터 내 볼에 자리 잡은 태양의 키스마크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나는 거울을 보며 적어도 태양만큼은 나를 찐하게 사랑했었구나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 내가 그 태양 아래에서 얼마나 열정적이고 행복했었는지 기억할 것이다. 주근깨가 가득한 할머니로 늙고 싶다. 약간 그을린 피부로 주근깨가 가득한 채로 해변에 느긋이 누워 탄산이 잔잔한 와인을 마시며 태양이 주는 에너지로 하루하루를 살아나가는 할머니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