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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너무 맛있고 고단한 한식!

묵나물은 왜 불리고, 끓이고, 물에 담가 두고, 볶아야 맛이 나는 걸까?

by 망원동 바히네

가지의 맛을 알고도 남아버린 나이가 됐다. 몇 년 전부터는 힘없이 몸이 축 처지면 나물이 한 상 가득한 엄마 밥이 먹고 싶어 졌다. 메인 요리가 무엇이든 간에 기본 4가지 이상의 나물들은 항상 냉장고 안에 구비되어 있는 엄마의 부엌. 새순부터 묵나물까지 종류도 다양한, 계절에 먹을 수 있는 최선의 것들을 가볍게 조리한 나물들은 언제나 '집밥'을 상징하는 메뉴였다. 그게 얼마나 가치 있고 맛있는 것인지는 다 크고 나서야 알게 됐지만.


혼자 살기 시작한 이후, 힘이 닿는 한 집에서 밥을 열심히 해 먹으려고 노력했다. 그래도 매번 나물을 3-4가지씩 해 두고 먹는 것은 정말 불가능한 일이었다. 주말에 하루 날을 잡고 열심히 다듬고 씻고 조리한다 해도, 외식이 잦은 한 주를 보내고 나면 어김없이 냉장고 속 나물은 상해있기 십상이었다. 나물거리를 사는 데는 3천 원이 들었지만, 그걸 가져와 씻고, 다듬고, 데치고, 양념을 하는 데는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 시장에서 나물을 사면 꼭 "저 혼자 살아서 많이 필요 없으니, 조금만 주세요"라는 말을 덧붙이는데 그래도 검은 봉지 한 가득 나물이 담겨 온다. 데쳐서 얼려둘 수는 있지만, 향이 핵심인 나물 요리에는 별로 좋은 전략은 아니다. 결국 3천 원어치의 풀을 사던, 완제품으로 1만 원어치를 반찬가게에서 사던, 다 못 먹고 맛이 빠져버리거나 상해버리기 때문에 오히려 나물 요리는 1인 가구에게 '럭셔리'라고 할 수 있다.


주말에 친구의 부모님 댁에 다녀왔다. 농사가 본업이 아닌 것 치고는 꽤 큰 규모의 밭농사를 지으시는 부모님을 둔 친구 덕에, 종종 좋은 작물들을 구해 먹을 수 있었다. 양파며 마늘, 단호박, 가지를 여름 내내 받아먹고, 부모님 댁에도 보내드렸다. 식구들 먹일 것을 거두는데 더 큰 목적이 있으신 분들이라, 좋은 비료와 약한 약을 가끔 치는 대신 생산 효율성에 대한 욕심은 내려놓으셨다고 한다. 단호박은 달디달고, 양파는 알이 꽉 차 단단했다. 무엇보다 100m를 5초 정도에 뛰는 날쌘돌이 강아지가 살고 있는 곳. 나는 고추 따는 일을 돕겠다는 핑계로 무작정 얼굴 한번 못 본 친구 부모님 댁에 '쳐들어' 갔다. 고추는 한 시간도 안 따고, 강아지 산책시키고 근처 수덕사 관광하고, 더덕구이 산채정식을 신나게 먹었다. 그런데도 직접 만드신 쑥 미숫가루며 맛간장, 밭에서 딴 작물들, 말린 무, 호박고지, 말린 토란대, 고춧가루, 단호박 죽과 단호박 식혜까지 잔뜩 챙겨주셨다. 밥값을 못해도 단단히 못한 느낌이다.

30분만 따도 수북한 고추와 조선호박. 알뜰살뜰 챙겨주신 꾸러미들을 펼쳐놓고 나니, 마음이 벅차오른다.

가끔 계절에 나오는 생 채소를 사다 나물로 요리해 먹긴 했지만, 묵나물은 정말 혼자 살면서 잘 안 해 먹었던 메뉴다. 같은 호박 나물이지만 말리지 않은 호박을 지져먹는 것과 한번 말렸던 것을 볶아먹는 것은 맛의 차이가 크다. 말린 나물은 식감이 오독오독 살아나고 맛의 깊이는 한 층 더 깊어진다. 싸주신 무말랭이와 애호박을 채수를 끓여 불렸다. 토란대는 한번 삶아야 해서 생수에 불렸다. 한 줌을 불려도 세네 배로 불어나기 때문에 처음부터 욕심을 내면 안 된다. 불린 애호박은 팬에 맛간장, 다진 마늘, 다진 파만 넣고 조물조물 해 두었다가 불을 올려 뜸 들이듯 익힌다. 다 익고 나면 불을 끄고 들깻가루로 간을 했다. 채수에 불려둔 무말랭이는 물기를 꼭 짜 다른 볼에 담아 두고, 두 주먹 가득 따온 고춧잎을 쪘다. 말린 고춧잎을 보통 쓰지만, 비가 와서 당장 말릴 수 없으니 찌기만 해 넣어본다. 무말랭이를 불렸던 채수에 다진 마늘, 다진 생강, 고춧가루, 멸치 진젓, 매실청, 맛간장, 꿀을 넣어 고춧가루를 불렸다. 올리고당이나 물엿을 넣지 않아도 매실청으로 충분한 단맛이 난다. 고춧잎과 무말랭이, 잣, 썰어둔 쪽파를 넣고 양념장을 모두 넣어 섞었다. 엄마가 해주던 그 무말랭이와 비슷한 모습이다. ASMR에 적절한 사운드를 뿜으며 무말랭이를 완성했다. 오독오독한 식감에 매콤 달콤한 양념, 가뜩이나 솟구치는 입맛을 더 돋운다.

무말랭이는 처음 해봤는데, 그럴싸한 맛이 난다. 엄마에게 무말랭이 독립선언을 했더니 몹시 섭섭해 했다.


문제는 토란대였다. 섬유질이 질기기도 하고 생으로 먹으면 탈이 나기도 해서 전처리를 잘해야 하는 나물이다. 끓였다 식힌 물에 한 시간쯤 담가 두었다가 냄비에 쌀가루를 조금 넣고 삶는다. 쌀뜨물이 있으면 좋지만 없으니 쌀가루를 넣어 아린 맛을 빼본다. 적당히 익으면 물에 담가 다시 한 시간이 넘게 기다린다. 겉껍질을 다 정리하고 말린 토란대라 연하고 아린 맛이 덜해 전처리 시간이 적게 걸린 편이다. 보통은 삶는데 한 시간, 또 그 이후에 담가 두는데도 세 시간이 넘게 걸리기도 하니, 먹기 하루 전부터 작업을 하는 편이 낫다. 물기를 꼭 짜고 호박고지 나물과 비슷한 방법으로 들깨가루를 더 넉넉히 넣고 볶아 마무리한다. 한 그릇에 딱 들어가는 이 작은 양의 나물을 하겠다고, 불리고 삶고 물에 담갔다 볶는 과정을 거치고 나니 머리가 아득해진다. '진짜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마음이 절로 든다. 괜히 호박고지 나물과 같은 양념으로 요리했나 싶은데, 맛을 보니 또 두 나물은 다른 맛이 난다.

"한식이 젤 어려워."

엄마에게 괜히 투덜거려본다.

"손이 많이 가지. 그래도 몸에 좋잖아. 맛있고."

틀린 말을 하는 법이 없다. 이렇게 손이 많이 가는 음식들을 한 상가득 차려 내놓는데 대한 가치평가가 너무 평가절하돼 있어 속상하다. 엄마 밥은 물론이고 밖에서 사 먹는 밥도 그렇다. 친구 부모님께서 사주신 수덕사 근처의 더덕구이 산채정식집은 인당 가격이 1만 5천 원이었다. 나물이 한 10가지쯤, 버섯구이, 된장찌개, 불고기에 더해 인당 한 마리의 굴비구이가 큼직하게 나오는데도 말이다. 작물을 키워내는 것부터 채소를 다듬고 처리해 요리하기까지 걸리는 시간과 수고를 생각하면 터무니없는 가격이다.

토란을 심고 길러 수확하고 껍질을 벗겨 볕에 말리고, 불렸다 삶았다 또 불리고 볶는 과정을 거쳐야 이 한 그릇이 완성된다. 도대체 왜!!


삶아둔 토란대의 반은 나물로 볶고, 나머지 반은 냉동해둘까 하다가 채개장을 끓여본다. 한 주먹 정도의 토란대가 남아서 채개장을 끓이기 시작한 건데, 결국 6L짜리 냄비 하나에 찰랑찰랑할 정도로 양이 늘어났다. 무, 양파, 표고버섯, 느타리버섯, 새송이버섯, 팽이버섯, 배추, 숙주, 부추, 쪽파가 들어갔다. 고춧가루와 참기름, 마늘, 생강, 간장, 후추, 소금을 섞고 야채에 미리 양념을 버무려 두었다가 한번 볶은 뒤 채수를 부어 끓인다. 한 시간 정도 푹 익혀 마무리했다. 중간에 맛을 보면 '역시 뭔가 빈 것 같은 맛이다' 싶지만, 한참을 끓여 모든 야채의 풀이 죽고 나면 어김없이 깊은 맛이 난다. 채소만으로도 충분하고 남는다. 하루가 지나야 더 맛이 난다는 사실이 허무하긴 하지만, 지금도 이렇게 맛있는데 내일은 어떻겠냐며 기대감이 부풀어 오른다.

절대 딱 한 냄비만 끓일 수 없는 채개장. 고추기름을 꼭 내지 않아도 맛이 풍성하다.

채개장이 끓고 있는 동안 주방을 정리하고, 깻잎을 데친다. 데치고 나니 한 줌밖에 안돼서 '더 뜯어올걸'하는 욕심이 든다. 모든 작물이 그렇지만 깻잎은 특히 잎을 톡 하고 따는 순간 향이 알싸하게 번지는데, 그 찰나의 느낌이 몹시 인상 깊게 남는다. '일꾼'을 빙자한 게으른 관광객은 잎 하나 따고 향 한번 맡고, 잎 하나 따고 향 한 번 맡느라 손이 느렸다. 담가 둔 양파장아찌 간장물에 맛간장을 조금 더해 달이고, 찐 깻잎은 식혔다가 간장물을 부어둔다. 간장에도 깻잎 향이 확 퍼진다. 감식초와 엄마 간장에 절여뒀던 양파 장아찌 물엔 매운 청양고추와 양파의 단맛이 베어 들어있다.

이 사진은 4D입니다. 향기가 느껴지시나요?


아침부터 분주하게 움직인 것 같은데 벌써 점심시간이 다 됐다. 종아리 뒤가 뻐근하게 당기고 허리가 지끈하다. 네 가지의 반찬과 한 솥의 국을 보고 있으니 진짜 능력자가 된 기분이 든다. 무말랭이에 액젓을 넣은 것 빼고는 모두 식물성 재료다. 꼭 비건 반찬을 만들어야겠다고 결심을 하고 만든 것도 아닌데, 원래 자연식물식에 가까운 한식 요리들이다. 고추를 먹기 위해 고추를 심었지만 고춧잎도 활용하고, 호박을 심어놓고 호박잎을 쪄먹고, 고구마를 심고 고구마순을 김치로도 담가먹는 '제로 웨이스트' 정신도 이미 한식엔 오래전부터 있었다. 신기하게도 고춧잎을 찌면 고추 향이 나고 호박잎을 찌면 호박 향이 난다. 온갖 비타민을 포함한 무기질과 섬유질도 풍부한 작물의 잎과 줄기들. 안 먹고 버리기엔 여간 아까운 게 아니다. 그러니 먹을게 귀했던 예전엔 이런 식재료들도 빠짐없이 알뜰하게 먹어왔겠지.


40년 만에 유래 없는 기근으로 마다가스카르의 사람들이 8개월째 선인장 잎과 곤충을 먹으며 버티고 있다는 기사를 읽었다. (https://www.newspenguin.com/news/articleView.html?idxno=5292 ) 마다가스카르산 바닐라빈 가격이 오른다는 뉴스에만 관심을 뒀던 것이 한층 더 부끄러워진다. 마다가스카르 사람들은 기후위기에 기여한 바가 없다. 석탄연료를 쓰지 않고, 자연의 뜻에 따라 살아온 사람들이다. 아프리카이기 때문에, 기술과 자본으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 피해를 고스란히 맞고 있다. 미국에서 성인 전연령을 대상으로 주요 백신의 부스터 샷 접종을 허가했다는 뉴스를 보며 '자본의 이기심'에 치를 떨었던 것과 다를 바 없는, 오히려 더 잔인하고 심각한 상황을 보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에 얻어맞은 뒤통수가 아파온다. 내가 채식 지향을 한다고 마다가스카르의 식량위기가 금방 극복될 수 있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영영 이 위기를 해결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강 건너 불 보듯 손 놓고 샴페인을 터트리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비관하고 좌절하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하는 것도 에너지가 많이 필요하다. 실천하는 이들에게 서로 독려하고 칭찬하는 일을 빼놓지 않아야 한다. 한끼라도 동물을 안먹고, 한 번이라도 텀블러를 쓸 때 서로 외쳐주자.


"와! 진짜 너무 멋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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