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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차리는 채식 밥상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 꺼내서 합체만 해도 근사하게 차려질 수 있다면?

by 망원동 바히네

요즘 가장 큰 낙은 지인의 부모님께서 지은 농작물을 나눔 받는 일이다. 농약을 치지 않아 생김새가 자기주장이 강하다. 대충 물에 한 번 헹궈 도마에 올리고 칼로 써는 순간, '와, 이래서 텃밭을 하는구나'싶다. 제철에 따라 시장에 나오는 농산물들도 물론 싱싱하지만, 농약의 힘을 빌리지 않고 자연의 힘으로 천천히 길러낸 농작물들은 차원이 다르다. 모두 익은 후에야 수확을 하니, 후숙을 하지 않아도 그 맛이 깊고 농후하다. 가지에서 가지 향이 나고, 호박에서 호박 향이 난다.


텃밭 작물로 많이 나눔 받은 품목은 단연 방울토마토와 가지다. 나는 농사를 지어본 적이 없어 잘 몰랐는데, 이 두 가지 작물과 오이, 애호박의 경우 자고 일어나면 또 주렁주렁 열려있는 것 같이 느껴질 만큼 빠르게 결실을 맺는다고 한다. 먹는다고 먹어도 또 냉장고 그득 가지와 방울토마토가 자리 잡았다. 막 수확해서 건네받은 작물들은 냉장고에 두어도 시드는 속도가 다르다. 가끔 다품종 소작을 하시는 농부님들께서 직접 작물을 판매하는 장터인 '마르쉐'에서 채소를 사 와 냉장고에 두었다가 한 달 동안 멀쩡히 살아있는 모습을 보며 놀라기도 한다. 물론 채소마다 보관법을 잘 숙지해두고 이를 따랐을 때의 이야기다.


방울토마토가 3kg쯤 생겼다. 삼분의 일은 그냥 생으로 먹고, 삼분의 일은 드라이드 토마토, 삼분의 일은 마리네이드를 했다. 채소는 그냥 생으로 먹을 때 영양분의 손실 없이 흡수할 수 있지만, 양이 많을 때는 저장이 용이하게 가공하는 것도 방법이다. 에어프라이어 겸용 오븐 트레이에 반으로 자른 방울토마토를 속이 위로 올라오게 펼쳐 깐다. 소금을 두 세알씩 토마토에 올린다. 110도 정도의 저온에서 한 시간 정도 말린다. 다 마른 토마토는 말린 허브와 함께 올리브오일에 절여둔다. 마늘이나 생 허브를 넣으면 발효가 되어 오래 보관이 어렵다. 일주일 내로 먹을 수 있다면 마늘 향을 더하는 것도 좋지만, 그렇지 않다면 마늘은 제외하는 것이 좋다. 나는 오레가노와 바질 말린 것을 조금 넣고 올리브오일을 토마토가 잠길만큼 부어두었다. 이 오일에는 토마토의 감칠맛이 베어 나오고, 말린 허브가 같이 들어있기 때문에 활용도가 높다.

썬드라이드는 아니지만 에프드라이드!


삼 분의 일쯤 되는 나머지 방울토마토는 열십자 칼집을 내어 뜨거운 물을 부어두었다가 찬물에 헹군다. 껍질을 곱게 까서 다른 볼에 모아 두고, 양파를 조금 다져 넣는다. 새콤달콤하게 양념을 하면 되는데, 한 여름에는 화이트 발사믹을, 찬바람이 불면 레드 발사믹을 활용한다. 발사믹 식초를 조금 두르고, 마스코바도를 한 스푼, 소금을 조금 넣은 뒤, 레몬즙을 짜낸다. 올리브유를 함께 섞어도 좋지만, 나는 먹을 때 그릇에 덜어 낸 다음 올리브유를 조금 뿌려먹는 것을 더 선호한다. 냉장고에 한 나절 넣어두면 안주로도, 샐러드 토핑으로도, 밥반찬으로도, 사이드디쉬로도 톡톡히 제 몫을 해내는 토마토 절임 완성이다.


토마토 마리네이드 두 병을 만들었다. 깐 껍질과 상처 난 토마토는 갈아서 주스로 마신다.



가지가 많이 생긴 김에 가지도 구워서 절인다. 이태리식 채소 저장 방법 중 하나인데, 가지, 파프리카, 쥬키니, 양파 같은 여름 채소들을 그릴 자국이 나게 구워내고 화이트 발사믹이나 화이트 와인 비네거를 뿌리고 기호에 따라 올리브와 케이퍼를 더해 절여둔다. 30분 이상 절이고 나면 그대로 건져 병에 옮긴 뒤 올리브 오일을 채워 보관하면 된다. 나는 이번 주 내에 모두 먹을 것을 목표로 하고 있기도 하고, 오일소비도 최소화하려고 노력 중이라 따로 오일 절임은 하지 않았다. 이미 그릴에 구울 때 가지가 오일을 많이 흡수하기도 해서, 풍미가 모자랄 것 같지는 않았다. 굽는 김에 자투리로 남은 적양파와 파프리카, 조선호박도 같이 구웠다.

굽기만 해도 아름다운 야채들. 하나하나 맛이 다 다르기도 하고, 여하튼 너무 맛있다.

당근 라페도 토마토 절임만큼이나 좋아하는 메뉴인지라 늘 당근은 냉장고에 있는 아이템이다. 채칼로 채 썬 당근에 소금을 뿌려 숨을 죽이고, 그때마다 원하는 양념으로 버무려두면 된다. 초여름 선물 받은 살구가 너무 많아서 딜, 프로세코 와인과 함께 끓여 저장해 둔 것이 있는데 당근과 잘 어울릴 것 같아 작은 숟가락으로 양념에 더했다. 화이트 발사믹과 레몬즙을 더해 간단히 양념을 하고 모자란 간을 디종머스터드 새끼손톱만큼 넣어 마무리했다. 꺼내서 올리브유를 뿌려먹어도 되고, 보관할때 올리브유를 같이 양념에 버무려도 된다.


시간이 날 때마다 해 두는 것 중 하나는 곡물과 콩을 삶아 소분 보관하는 것이다. 병아리콩은 하룻밤 불려서 삶고, 렌틸콩은 불리지 않고 삶는다. 콩을 삶을 때 소금을 조금 넣고 월계수 잎을 넣거나 유기농 채소 스톡을 하나 넣으면 풍미가 확 올라간다. 다 삶은 콩은 채반에 옮겨 물기를 모두 제거한 뒤에, 작은 유리병에 소분한다. 당장 먹을 한 병만 냉장고에 두고 나머지는 냉동한다. 귀리와 율무, 보리 같은 곡물들도 소금물에 삶아 물기를 뺀 뒤 같은 방법으로 보관한다.


냉장고 가득 저장 채소가 준비되었다면, 일주일간 밥상 차리기는 그야말로 너무 쉬워진다. 샐러드 채소는 찬물에 씻어 물기를 모두 제거한 뒤 키친타월이나 키친 크로스에 감싸고 밀폐용기에 담아 보관하면 열흘은 생생하다. 씻어둔 샐러드 채소를 담고, 절인 야채들을 차곡차곡 올리고, 삶아둔 곡물과 콩도 같이 곁들여 올리고 나면 샐러드가 완성된다. 발사믹과 레몬즙으로 절인 채소들이라 드레싱을 따로 하지 않아도 충분하다. 드라이드 토마토를 담가둔 오일을 반 스푼 정도 빌려 뿌리거나, 신선한 올리브 오일을 마무리로 뿌리면 금상첨화다. 냉동실에 차곡차곡 얼려둔 빵을 한 조각 해동해 굽고, 두부 크림을 듬뿍 발라 절인 채소를 올리면 금세 오픈 샌드위치를 만들 수 있다. 두부 크림은 부침용 두부를 물기를 꼭 짠 뒤 견과류 조금, 소금, 레몬즙을 넣고 블렌더에 갈기만 하면 끝난다. 주말에 잔뜩 만들어둔 검은콩 패티나 렌틸라구, 냉동식품으로 구매한 <이노센트 팔라펠> 같은 것들을 곁들이거나, 두부를 두껍게 썰어 소금, 후추, 원하는 향신료를 듬뿍 뿌려 에어프라이어에 구워 곁들이면 더없이 든든한 한 끼가 된다. 일주일째 비슷한 식단이지만 질리지 않는다. 속은 편안하고, 몸은 가벼워진다. 도시락을 싸기도 너무 편하다. 합체만 하면 뚝딱 완성되는 샐러드. 무엇보다 불 앞에 있는 시간이 거의 없으니 더운 날씨에 지치지 않는다.


내 몸을 위해 최선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다 채식 지향을 시작했다. 혼자 하긴 무서우니 모임을 만들어 같이 독려하고 의견과 정보를 나누고 있다. 동료들이 있으니 든든하고 지치지 않는다. 모임에는 서로 다른 목적의 비건 지향을 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누군가는 동물권을 위해, 누군가는 환경을 위해, 나는 건강을 위해 채식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우리 중 극소수만 완전 비건식을 하고 있고 대부분이 불완전한 비건이다. 누구도 오늘 고기를 먹었다고 해서 비난하지 않고, 한 끼 더 채식으로 바꾸는 도전에 박수를 보낼 뿐이다. 서로의 관심과 목적에 따른 이야기들을 공유하다 보면 어느새 세 가지 목적은 한 방향으로 뒤섞이고 합쳐진다. 동물에게 나쁜 것이 환경에게 좋을 리 없고, 사람에게 좋을 리는 더욱 없다. 내 도전이 얼마나 지속될지 나도 모르겠다. 이러다 또 바빠지고 백신을 모두 맞고 나면 외식이 잦아질까? 그럴 때마다 내 도전이 실패로 끝났다며 좌절하고 도전을 멈추는 일이 없기를. 그럴 때마다 이 글들과 사진들을 꺼내보며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기를.


미국 다음으로 고기를 많이 먹는 나라였던 호주의 고기 소비량이 25년 만에 최저점을 찍었다고 한다.* 보고서에서는 이 변화의 동력으로 환경에 대한 인식 변화를 꼽는다. 큰 산불이 나고, 이로 인해 사람들이 직접적인 피해를 입고, 대자연을 가진 국가의 정체성을 실제로 위협받는 것을 보고 나면 생각이 바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미 늦은 것 아니냐고, 이제 와서 개인이 고기 좀 덜 먹는다고 뭐가 바뀌겠냐고 하던 사람이 바로 몇 년 전의 나였다. 지금도 문득 '이젠 정말 너무 늦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고, 그럴 때마다 좌절감과 허탈감이 밀려오기도 한다. 그래서 계속 '나는 내 몸을 위해 채식을 좀 더 하려고'라는 발 뺄 곳을 잔뜩 둔 문장으로 안전망을 쳐둔 것일지 모른다. 바다에 아이가 빠져 허우적대고 있는데, 어차피 나는 수영도 못하고 구할 수 없으니 그냥 방관하면서 파티를 즐길 것인지, 나뭇가지라도 구해 손을 뻗어볼 것인지. 어쩌면 우리에게 이 두 가지의 옵션이 있는 것은 아닐까.


* https://www.peta.org.au/news/australian-meat-consumption-shrinks/


쉽고, 빠르고, 건강하고, 맛있는 채식밥상 차리기. 몰아서 준비할 때 일이 많아보여도 막상 해보면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 하루 열심히 해 두면 일주일이 든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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