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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6개월 차,쓰지 않았더라면

눈물 닦으면 다 에피소드, 쓰고 나면 다 회복 탄력의 자양분!

by 망원동 바히네

병원에 가는 일은 언제나 괴롭다. 외근으로 가도 괴로웠지만 환자로 가는 것은 200배 정도 더 괴로운 일이다. 검사를 하러 가도, 검사 결과를 들으러 가도, 따지러 가도, 질문을 잔뜩 안고 가도, 치료를 받으러 가도, 수술을 받으러 가도 다 괴로운 일들 뿐이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면서 웬만한 일을 대충 즐겁게 받아들이는 훈련이 됐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병원 가는 발걸음은 어렵고 무겁고 괴롭다. 어제도 예외는 아니었다.


병원에 가는 일을 즐겁게 하기 위해 갈 때는 지하철을 타지만 오는 길에 따릉이를 타고 불광천을 달려보기로 했다. 나는 병원을 가는 게 아니라 입추가 지난여름의 끝자락에 따릉이를 타러 가는 거라고 생각하면 한 결 가벼웠다. 올해 초에 처음으로 자전거 타기를 독학한 이후 내 따릉이 사랑은 불타올랐지만, 한 여름 내리쬐는 태양은 내 열정을 앗아가 버렸다. 열심히 탈 때는 매일 따릉이 어플을 켜서 내가 얼마나 많이 자전거를 탔는지, 얼마나 많은 칼로리를 소모했는지, 그리고 얼마나 많이 탄소를 절감했는지를 보며 뿌듯해했다. 나에게 내 두 다리 말고 약간의 기동력을 더해줄 수단이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짜릿했다. 어제 따릉이를 타려고 어플을 켜니 등록된 사용권이 없다고 했다. 내 관심 밖에 난지 두 달 여. 따릉이가 그렇게 멀어져 있었다.


지하철을 타고 병원에 갔다. 평일 낮시간, 내리는 지하철역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문이 열리고 내리려는데, 내가 내리기도 전에 나를 밀치고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내리는 이도, 타는 이도 거의 없는 역에서 굳이 내리기도 전에 타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인지 용기가 났다. 큰 소리로 "내리고 탑시다. 사람이 내린 뒤에 타야 해요."라고 말했다. 상대는 내 눈을 보고 머쓱한 얼굴로 지나갔다. 회사를 다닐 때 나는 매일 아침마다 이 전쟁을 치렀었지, 새삼스러워졌다. 나는 그럴 때마다 '헬조선은 우리 모두가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모두가 예민한 아침 출근시간, 먼저 내리고 타겠다고 어깨를 밀치고 미간을 세우는 일들. 발을 밟고도 미안하단 소리 없이 나지막이 욕을 뱉어버리는 사람들. 매일 아침 나는 이런 것들에 지쳐 택시를 타고 출근했었던 적이 많았다.


병원에서 선생님을 뵙고 나오는 길. 애써 참았던 눈물이 터졌다. 친절하고 다정한 선생님 앞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 꾹꾹 참다 병원 건물을 나와 터져 버렸다. 선생님은 나에게 아무런 잘못도 한 게 없는데, 나도 선생님께 아무런 잘못을 한 게 없는데 이놈의 눈물은 왜 눈치를 못 챙기는지 모르겠다. 잘 모르는 동네에서 바보같이 눈물을 흘리는 내가 어이없어 따릉이 어플을 켜고 주변 따릉이를 찾았다. 도로를 얼마 달리지 않아 불광천으로 들어섰다. 하늘에 구름이 지브리 애니메이션에 나올 것처럼 예쁘게 떠 있었다. 평소 같으면 잠깐 멈추고 사진을 찍었겠지만, 어젠 그 마저도 귀찮았다. 나름 멋 부린다고 신고 나온 딱딱한 샌들에 신축성이 하나도 없는 바지를 입고 자전거를 타는 내가 웃겼다. 몇 달 전만 해도 자전거 타는 법을 몰라 두 시간 동안 안장에 앉아 한강을 바라보기만 했던 사람은 어디로 갔는지,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쌩쌩 페달을 밟고 있었다.


평일 낮 불광천엔 사람이 별로 없다. 더위를 피하려 다리 밑에 앉아 쉬는 할아버지들과 땡볕에 걷기를 마다 앉는 사람들이 보인다. 앞에도 뒤에도 내 느린 자전거 속도를 탓하는 사람 하나 없어 나는 자유롭게 페달을 밟아 나갔다. 하늘은 파랗고, 뭉게구름은 몽글하고, 공기는 맑았으며, 내가 가르는 바람은 선선하게 내 뺨을 지나갔다. 매미는 여전히 떼창을 하고 이 더위에 살아남은 꽃들이 군데군데 마지막으로 몸을 불태우고 있었다. 꼬리가 빨갛진 않았지만 정겨운 잠자리도 여럿 날아다녔다. 꽃나무 틈에 쉬던 새들은 내 자전거 소리에 놀라 푸드드득 날아올랐다. 이건 뭐 거의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아닌가? 내가 줄무니 바지에 검정 샌들이 아니라 원피스를 입었더라면, 따릉이가 아니라 라탄 바구니가 달린 자전거만 탔다면 영락없는 디즈니 영화 속 한 장면이네. 디즈니가 아니라 하더라도, 이게 지금 내가 그토록 바라던 이태리랑 다를게 뭔가? 이렇게 안전하고 깨끗하고 쾌적하고 저렴한 도시가 또 있을까?


서울에서 혼자 산다는 것은 때로 고달픔이 훅 하고 밀려와 좀처럼 떠나지 않는 순간을 마주할 일이 많은 일이었다. 어떻게든 혼자서 꾸역꾸역 그 고달픔을 엎어두고 살아나가야 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한강 근처에 산다는 것, 불광천과 홍제천을 10분이면 자전거로 달릴 수 있다는 것이 너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5분 전만 해도 병원 앞에서 눈물을 찔끔거리던 내가, 자전거로 불광천을 달린 지 15분 만에 이만하면 행복하다는 생각을 하다니... 이게 정상인 건가? 나사가 하나 빠진 건지 어쩐 건지, 회복탄력성이 좋은 건지 어쩐 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집 근처 따릉이 정거장에 자전거를 반납하고 집으로 들어와 샤워를 했다. 작지만 반질반질 닦아둔 내 집. 등기상 명의에 내 이름 석자가 박혀있지 않아도, 이 집은 내 집이다. 오늘따라 웬일인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이불을 정리하고 베개도 숨을 올려 잘 세워 두었다. 침대에 놓인 큰 쿠션에 몸을 기대고 무알콜 하이네켄을 하나 따서 마셨다. 맥주는 술 중에서도 제일 못 마시는데, 무알콜이라면 나도 광고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식도가 얼어붙을 것처럼 콸콸콸 마실 수 있지.


브런치 앱을 켜서 지난날 써 둔 글들을 다시 읽었다. 다소 쑥스럽고 손가락이 자꾸만 안으로 말려들어가는 와중에도 뭔가 뜨거운 것이 움찔하고 속에서 올라왔다. 나는 저 바닥을 쳤을 때 혼자 나가 따릉이로 자전거를 독학했구나. 나는 다시 채식 책을 읽고 영양을 공부했구나. 내가 써 놓은 글들을 읽으며 다시 나를 끄집어 올렸다. 떨어질 때 착륙하는 방법을 알고 있어야 하듯, 떨어지고 난 뒤 다시 도약하려고 할 때도 그 방법을 어렴풋이 알고 있는 편이 도움이 된다.'기분이 바닥을 쳤을 때, 어떻게 하면 다시 괜찮아졌더라'를 기억해 두는 것. 구체적으로 터널 끝까지 달렸던 경험을 사소하게라도 기록해 두는 것. 이 소중하고도 값진 경험을 나는 뒤늦게 시작했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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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에서 나오는데 현타가 오더라고."

"해소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어. 근데 자전거를 타고 오는데 또 막 행복한 거야. 유럽 같고, 디즈니 같고."

"그러면서 '아, 브런치 모먼트다!' 이 생각했지 너."

"어떻게 알았어?"

"아주 예술가 마인드 다 됐어."


눈물 닦으면 다 에피소드. 기록해 두면 다 회복탄력성의 자양분. 이만한 가성비 좋은 방법 보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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