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여행기 1. 나는 진정 드라마 퀸이었던 것인가.
여행 2일 차. 제주대학병원 응급실에 갔다. 병원까지는 숙소에서 40분 남짓 걸린 것 같다. 겨우 고작 손가락 하나를 나름 가볍게 다친 것뿐인데 응급실에 가는 길 내내 나는 무슨 인형이라도 뺏긴 두 살짜리 애처럼 목놓아 울었다. 나는 정말 병원에 가기 싫었다. 특히나 응급실은 정말로.
올해를 마무리하는 글을 쓰려는 것은 아니다. 조금의 '미리 보기'를 하자면 정말로 2021년은 나에게 '상실의 해'였다. 중요한 장기를 잃었고, 그 수술의 합병증-물론 인과관계가 불분명하여 합병증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지만-으로 응급수술을 하게 됐고, 그 응급수술의 과정에서 응급실 오진이라는 지우고 싶은 기억이 생겼으며, 병원과의 싸움을 하느라 지쳐버린 나는 직업을 자의적으로 잃었다. 이후로 나는 병원 근처에서 밥도 먹기 싫었고, 의사 가운을 입은 사람은 일단 말도 섞기 싫어졌다. 아마도 금방 아무렇지도 않아질 거라는 걸 알지만 어쨌든 올해의 나에게 병원 공포가 있다는 것은 또 거부할 수 없는 사실이 되었고, 나는 이를 받아들여야만 했다.
2주가 넘는 제주로의 여행. 일을 그만둔 이후 매일이 평화로운 여행 같은 나날이었지만, 사랑하는 사람들과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기회였으니 나는 마다하지 않았다. 기간이 길기도 하지만 원래 아무 계획이나 생각 없이 여행하는 편이고, 2주 중 첫 일주일을 같이할 애인도 그저 그냥 계획없이 산책이나 하고 밥이나 만들어 먹어보자는 요량이었다. 여행 2일 차. 평화롭게 깨를 볶는 하루를 보내고 저녁 즈음 숙소로 돌아왔다. 한 달 살기 장기 숙소 렌트를 해주는 사이트를 통해 구한 숙소는 조천읍에 있는 현대적이고도 아름다운 2층 집이다. 갖출 것들을 다 갖추고 있어 불편함이 하나 없는 이 집의 문제는 현관문이 무겁다는 것이다. 객관적으로 이 문이 무거운 것이라기보다는, 원래 사는 서울 집의 현관에 비해 많이 무거운 편이다. 오늘 하루도 너무 즐거웠노라며 호들갑을 떨며 집으로 들어오다 사고를 치고 말았다. 손을 현관문에서 완전히 빼기도 전에 문이 '쿵'하고 닫혀버린 것이다.
많이는 아니지만 피가 흘렀다. 피가 나는 손가락의 통증은 꽤나 컸고, 자잘하게 찌릿한 통증이 어깨까지 타고 올라왔다. 처음엔 '아프다'는 생각이었다. 크게 다치지 않은 것은 알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봤자 뼈에 금이 가거나 몇 바늘 꼬매야 하는 정도겠지. 사건의 임팩트가 크지 않다고 해서 통증의 크기가 작은 것은 아니었다. 무거운 문이 쿵 하고 올려 앉았던 자리에 살점이 덜렁거리는데, 얼마나 아프던지. 문을 열고 닫은 이는 나였기 때문에 누구도 탓할 수 없었다. 오롯이 나의 안전불감증이 불러온 참사인 것을.
그다음 드는 생각은 '응급실에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머리가 하얘졌다. 크게 다치진 않았지만 편의점에서 후시딘과 밴드를 사서 될 일은 아니었다. 저녁시간이었고, 개인병원은 문을 닫았을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여기가 서울이 아니라 제주라서, 근처에 야간진료를 하는 정형외과가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렇지. 여기까지 와서 진절머리 나는 응급실을 가야 하다니. 겨우 고작 손가락 하나 찧었는데, 또 오진을 하면 어쩌지? 사실은 신경을 다쳐서 잘못 처치하면 손가락의 감각을 잃을지도 모르는데, 제대로 진단을 못하면 어쩌지? 아니 다 차치하고, 내가 왜 여기까지 와서 이 지긋지긋한 병원 응급실을 또 가야 하는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은 멈출지를 않았다. 원망할 이 하나 없이 내가 자초한 이 일에 어이가 없고 짜증이 솟았다.
이어지는 생각의 덩어리는 '놀러 온 애인에게 신세를 지게 생겼다'는 자책이었다. 손가락은 열개나 있지만 그중 하나라도 다치면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특히 나는 오른손을 다쳤기 때문에 자잘하게 불편할 일이 한두 개가 아닐 것이라는 걸 직감했다. 언제나 독립적이어야 한다는, 자기 앞가림을 잘해야 한다는, 남에게 민폐를 끼치면 안 된다는 생각을 병적으로 하며 살아왔던 'K-장녀(오빠가 있지만 그냥 장녀처럼 큰)' 나에게, 제주도에 여행 온 애인에게 신세를 져야 하는 상황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올해 초 두 번의 수술을 거치며 혈육인 오빠와 엄마에게 도움을 받는 것조차 몸서리치게 싫어서, 수술 사실을 한참이나 알리지도 않았던 내가 아닌가. 아마도 그 경험이 없었더라면 나는 이번 여행을 조기 종료하고 서울로 돌아왔을지도 모른다. 기꺼이 도움을 주겠다는 사람을 밀어내고 차라리 혼자서 낑낑대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을 테니까. 2021, 상실들의 끝에 내가 얻은 것은 '도움을 적극적으로 받는 법'이다. 올해 봄쯤, 그러니까 내가 한창 연이은 수술로 힘들어하고 있을 그때, Rita(이태리에서 쿠킹스쿨 겸 B&B를 운영하는 친구)가 보낸 메시지를 아직도 이따금 들춰본다.
"모든 짐을 니 어깨 위에 짊어지고 있지 마. 친구, 가족, 친척에게 손을 내밀고 '도와주세요'라고 말해. 그들은 무조건 도와줄 거고, 너는 그 도움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마."
왜 갑자기 이런 메시지를 보냈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몹시도 시의적절한 메시 지였음은 분명하다. 나는 왜 지금껏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는 것을 그렇게 불편해했었을까. 두 번의 수술 후에는 내가 싫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어색했던 오빠에게 매번 누는 내 소변의 양을 알려줘야 했고, 친구에게 분리수거를 부탁해야만 했었다. 불편하고 어색한 도움받기의 기술은 차츰 늘어갔다. 다시 찾아온 '도움받을 타이밍'. 미안하고 불편한 마음으로 병원으로 향했지만, 치료가 끝났을 즈음엔 적어도 일주일쯤은 옆에 있는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됐다.
다행히 손은 깊이 파이진 않아 봉합이 필요 없고, 뼈도 신경도 이상이 없었다. 간단히 소독과 드레싱을 하고 병원을 나왔다. 대기시간이 좀 걸릴 것이라는 의료진들의 말과 달리 한 시간 정도 안에 모든 수속과 치료를 마쳤다. 의사와 간호사 선생님들 모두 친절했다. 애인은 침착하려 애를 쓰는 것 같았다.
"극한 직업이지. 내 남자 친구라는 것이."
"손 많이 간다 많이 가. 뒷바라지해야지 뭐."
성게 미역국을 사 먹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 손은 아프지만 귤은 먹어야 했다. 엄지와 집게만 이용해서 요리조리 귤을 까고 았었다.
"귤을 까달라고 해."
"운전하잖아"
"신호 대기할 때 까줄게."
쉴 새 없이 귤을 까먹으며 다니는 게 가을-겨울 제주 여행의 묘미이거늘. 귤을 깔 수는 있지만 붕대를 감은 손가락으로 귤을 먹겠다고 까는 모습이 안타까웠던 탓일 것이다.
"귤 까줘. 사과도. 레드키위도 썰어서."
가지런하게 과일을 깎아오고, 초저녁 잠이 많아 일찍 잠든 사이 설거지를 해 두는 사람 덕에 불편함 없이 지내고 있는, 제주에서의 늦가을이다.
"여행을 왔다가 응급실에 가게 됐어요. 다행히 별로 안 다쳤는데, 너무 무서웠어요. 뭐 이렇게 매번 극단적인가 싶어요, 내 인생. 나는 진짜 드라마 퀸인 것인가."
"네가 진짜 살아있는 삶을 산다는 증거지!"
Rita와 짧은 근황 업데이트를 주고받았다. 그렇지. 죽은 삶에 응급실 사건 따위는 없지. 또 한 번 응급실을 갈 일이 생긴다면, 나는 그때는 정말로 의연하게 갈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