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제 자작나무 숲에 다녀왔다.
겨울에 눈 내린 자작나무 숲이 보고 싶었다. 인스타그램에서 본 어떤 이미지에서 기인한 나의 욕구였지만, 욕구를 부정하지 않고 실현하기로 했다. 자작나무 숲은 물론 사계절이 다 아름답지만, 하얀 나무와 눈 내린 하얀 땅이 깔맞춤이 되어있는 한겨울의 설경이 꼭 보고 싶었다. 추위는 나를 약하게 하고, 조금만 날이 추워도 외출을 삼가는 사람이 왜 그렇게 무모한 욕심을 부렸는지는 알 수 없다. 차로 자작나무 숲 바로 앞까지 갈 수 있을 줄 알았더니, 한 시간 정도 경사가 있는 산길을 따라 올라가야 한다고 했다.
애인과 둘이 1월에 가기로 했던 인제 여행은 취소했다. 코로나 밀접접촉자로 PCR 테스트 결과가 나오는 시간을 정확히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자가격리가 의무가 아닌 기간이었지만, 그래도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해 우선 여행을 취소하고 안전하게 집에서 시간을 보냈다.
2월의 여행은 친구도 함께했다. 어쨌든 누구 하나라도 다치기라도 한다면 (분명 그게 나일 확률이 높다고 생각했지만), 하나 보단 둘이 수습에 더 낫겠지 하는 마음도 있었다. 이보다는 그냥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양 옆에 끼고 가면 더 재미있을 것 같은 마음이 우선했지만.
국내 여행사에서 운영하는 인제 자작나무 숲 - 속초 중앙시장 - 강릉 하조대를 들르는 버스 투어 프로그램을 신청했다. 주차공간을 찾아 헤매는 시간이 없어도 되고, 하루 동안의 바쁘고 체력이 소모되는 일정 끝에 누군가가 피곤하게 다시 운전을 해서 돌아오지 않아도 되는 장점이 있다. 결국 나와 친구는 절주와 금주 기간을 보내고 있기 때문에 아무도 술을 마시진 않았지만, 누군가가 막걸리를 한잔 걸친다고 해도 부담 없는 것도 장점이다.
"프로그램에 드레스코드가 있었는데, 왜 말을 안 해줬어? 우리만 검정 옷이고 다들 빨간색 아님 핑크색이잖아."
"그러게. 여행사에서 드레스코드 알림을 빠트렸나. 그래도 사람이 TPO에 맞게 옷을 입어야 하는데..."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형형색색의 등산복 사이에서 까만 패딩을 입은 우리 셋이 나란히 앉았다. 버스 내부는 빨간색 블라인드와 마블링 장식이 멋들어진 번쩍이는 짙은 갈색의 실내장식이 인상적이었다.
"박찬욱 세계관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아."
자작나무 숲까지 눈이 얼어있는 산길을 한 시간쯤 올라야 했다. '나는 체력이 약해'라는 생각으로 악성 빈혈과 함께 수년을 보내다 보니, 등산은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심지어 녹지 않은 눈이 미끌거리는 길이라니, 부담스러웠다.
"걱정하지 마. 다치면 카카오 헬기 불러줄게."
하여간 숨 쉬듯 내뱉는 실없는 농담의 릴레이. '어우, 뭐래는 거야-'하면서 연신 맞받아 웃는다.
그런데 웬걸, 목표지점인 자작나무 숲에 도착하고서도, 올라갈 때보다 허벅지와 코어에 힘을 두 배로 주고 내리막을 내려오고서도 생각보다 힘들지 않았다.
"나 장난 아니지?"
연신 유치하게 체력 자랑을 했다.
"열심히 운동해서 나중에 빨간색, 핑크색 등산복 입고 꽃놀이 다녀야 되니까, 체력관리들 잘해."
자작나무 숲은 생각했던 그대로였다. 키카 크고 곧게 뻗은 자작나무의 하얀 표면은 아직 녹지 않은 눈과 참 잘 어울렸다. 눈은 녹지 않았지만, 날은 풀릴 데로 풀려 나들이하기 좋은 하루였다. 남들이 다 찍는 포토존 앞에서 단체 사진도 찍어보고, 이 장관이 절대 카메라에는 안 담긴다며 투덜대면서도 연신 핸드폰 카메라를 요리조리 움직였다.
이른 기상과 짧은 등산 이후에 속초 중앙시장에 갔으니, 뭘 먹어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상태였다. 전통시장은 가도 가도 재미있는 구경거리다. 속초 시장은 처음이었는데, 감자전과 수수부꾸미, 배추전 같은 지역 농산물을 활용한 간식거리들이 많았다. 막걸리로 발효시킨 옥수수빵을 사려는 사람들의 줄은 시장 밖까지 길게 이어졌다. 오징어순대와 닭강정 집들도 두 집 건너 한집씩 자리를 잡고 있었다. 우리는 옹심이를 파는 식당에 대기를 걸어두고, 시장 구경을 하며 간식거리들을 사 먹었다. 시장 입구 계단에 대충 걸터앉아, 머리를 맞대고 먹은 간식들과 강원도 감자만 이용해서 만든 옹심이로 따뜻하게 배를 채웠다. 수수부꾸미는 수수와 찹쌀로 빚어 호떡처럼 부친 다음 팥소를 넣어 반달 모양으로 접어낸 읍 식인데, 갖 구운 것을 먹으면 찹쌀이 졸긴 하게 늘어지는 것이 수수하면서도 고급스러운 맛이다.
집 근처에 망원시장이 있어 자주 이용하지만, 요즘은 좀 아쉬운 점도 많다. 닭강정이나 고로케 같은 튀긴 음식들이 주를 이루고 있고, 줄을 서는 곳은 '인스타그래머블'한 뿌링클 호떡(호떡에 뿌링클 시즈닝을 잔뜩 바른 것)이나 마시멜로우 아이스크림 같은 것들을 파는 곳이다. 망원시장이 유명세를 타면서 이런 자극적인 음식을 파는 가게도 더 늘어나고 있다. 소박하면서도 맛있는 간식거리를 파는 깔끔한 가게가 망원시장에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음 날 앓아누울 것을 각오했는데 너무 멀쩡해서 애인과 자전거 데이트를 했다. 따릉이로 시속 30km/h를 달릴 수 있다며 쌩하니 가는 애인이 좀 웃기기도 했지만, 늘 혼자 타던 따릉이를 '나 완전 자전거 짱 잘 타지?'하고 허세를 부릴 수 있는 대상과 같이 타는 게 좋았다.
체력이 좋아진 것은 달리기의 역할이 크다. '런데이'라는 애플리케이션에 '30분 달리기' 프로그램을 도전하고 있다. 8주 코스지만, 날이 추워지면서 몹시도 게으르게 달리고 있어 아직도 완주를 못했다. 이제 마지막 30분 연속 뛰는 날만 남겨두고 있다. 내 체력은 수술하면서 빈혈이 정상이 되면서 가장 크게 회복됐고, 그 이후로는 달리기를 하면서 한 단계를 더 뛰어오른 것 같다. 이 감격스러운 순간을 만끽한 이후, 같이 운동모임을 하는 사람들의 말대로 달리기에 대한 글을 써 볼 수 있는 날이 멀지 않았다.
현실은 언제나 상상의 수준을 넘도록 너무나 다채롭고, 만족스러운 순간만큼이나 실망스럽고 고통스러운 순간이 뒤범벅되어있다. 같이 여행을 갔던 친구도 브런치를 시작하고, 열심히 글을 쓰고 있다. 친구와 나는 좋은 일이 있을 때뿐 아니라 힘들고 고통스러운 마음이 들 때면 서로 '브런치 써!'라며 웃어넘긴다. 처음엔 농담처럼 주고받은 말이었는데, 사실 이 말에 힘이 있다는 것을 점점 깨닫고 있다. 좋은 일은 써서 기록함으로써 간직할 수 있고, 나쁜 일은 그저 글의 소재 그 이상이 아닌 일이 된다. 'Every moment is a Brunch mo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