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이틀 쉬어버리면 어김없이 녹이 슬더라고요.
집에 있는 시간이 많다고 해서 여유 시간이 많은 것은 아니다. 이 당연하고도 간단한 사실을 직접 경험해보기 전에는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 분명하다. 자잘 자잘하게 해야 할 일들이 있고, 그 사이사이 스스로를 입고 먹이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외주를 주지 않고 삼시 세끼와 입는 옷가지를 정리하는 일, 집의 위생을 청결히 유지하는 일은 생각보다 정말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한다. 언젠가 드라마였나, 책이었나, 이런 비슷한 대사가 있었다. 정확하지 않지만 의미를 살려보자면...
"자라면서 변기에 구더기가 득실거리지 않거나, 하다 못해 물때가 낀 상태가 아닌 변기에서 볼일을 봐 왔다면, 외출하고 집에 들어왔을 때 집안에 쓰레기가 발로 차이지 않는 집에서 살았다면, 보이지 않는 손이 끊임없이 노동을 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전형적으로 엄마가 집안일을 도맡아 하는 가정에서 자란 나는, 언제나 깨끗한 집에서 살아왔다. 엄마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청소기로 먼지를 없애고 걸레를 빨아 온 집을 닦았다. 한 10년 전쯤 밀대 형태의 걸레자루를 사기 전까진 무릎을 꿇고 앉아 바닥을 닦는 일을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외식을 몹시 싫어했던 엄마는 삼시 세 끼를 집에서 해서 가족들을 먹였다. 대단한 반찬은 없어도 엄마가 직접 담근 장과 매실청, 직접 우린 육수 등을 이용해 '집밥'을 해 먹였다. 덕분에 나는 깨끗한 환경에서 배부르게 먹고 (오동통하게) 잘 자랐다. 당연히 철딱서니가 없던 나는 그 고마움보다는 물건 정리나 청소가 힘든 나에게 지나치게 깨끗하게 지낼 것을 강요하는 엄마의 억압이 힘들다 여기고 소박한 한식보다는 거창하게 차려낸 고칼로리의 비싼 음식을 좋아하게 됐다.
작년부터 삶의 방향성을 바꾸고 채식 지향과 미니멀한 살림을 꾸리는데 많은 노력을 쏟고 있는 요즘, '나 하나 먹여 살리기도 정말 힘들다'를 되뇌며 집안일을 하다가 내가 하는 살림의 습관이 결국 엄마와 비슷하게 닮아있는 것을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랄 때가 있다. 이래서 모든 관계의 갈등이 마찬가지지만 모녀 관계에서 갈등은 자기혐오를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일 테지. 하여간 엄마는 여기, 저기서 선물 받은 과일이며 떡이 많다고 온갖 과일과 먹을거리들을 택배로 보냈다. 오디를 살까 말까 망설였고, 참외를 살까 말까 망설였고, 현미가래떡을 살까 말까 망설였고, 상추를 사러 나가야겠다 생각한 찰나에 참외와 오디, 현미 가래떡, 상추를 포함해 옹골차게 싸서 보낸 택배를 받아 들고 실소가 터졌다.
지나가다 빈티지 숍에 걸린 블라우스를 보며 '아... 저거 딱 우리 엄마 사이즌데'싶어 택배로 보냈다. 아니나 다를까 오동통한 엄마 몸에 잘 맞아떨어졌고, 엄마의 퍼스널 컬러답게 원래 당신 옷인양 잘 어울렸다.
"넌 역시 나랑 한 몸이야!"
다소 소름 돋는 고맙다는 메시지에 나는 차마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
'아니 너무 소름 돋잖아! 난 엄마가 아니라고!'
몸서리를 치며 거부감을 느끼는 이유는, 가만히 들여다봐야 할 일이다.
아무튼 매일은 아니더라도 집을 청소하고, 매일 이불을 정리하고, 1-2주에 한 번 침구를 빨고, 입은 옷을 세탁해서 정리해 넣고, 삼시세끼 먹을거리들을 장을 봐 와서 준비하고, 요리를 하고 설거지를 하는 일, 물때가 생기지 않도록 변기와 세면대를 닦고 하수구의 머리카락을 제거하고 닦는 일, 쓰레기를 제 때 분류해 버리고 자주 환기를 하는 일, 계절이 바뀌면 옷을 정리하고, 가전제품들을 때가 되면 잘 닦아서 넣어두거나 꺼내어 다시 닦는 일 등... 한 사람이 그럭저럭 사는데 여간 해야 할 일이 많은 게 아니다.
여기에 물티슈를 쓰지 않기 위해 행주와 걸레를 사용하고, 다 쓴 세제는 제로 웨이스트 샵에 빈 용기를 가져가 내용물만 채워오고, 온라인으로 장보기를 줄이고 시장을 이용하는 일을 더하고 나니 할 일은 조금 더 많아진 것 같다. 클릭 한 번이면 - 요즘은 비밀번호를 입력하지 않아도 내 얼굴만 인식해서 - 결제까지 완료되고, 다음날 새벽이면 문 앞에 떡하니 배달이 되는 세상에서 알맹이를 채우러 가거나 시장에서 낑낑거리면서 장을 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온라인 쇼핑은 여전히 하고 있지만 그 빈도는 10분의 1 정도로 줄었다.) 매일 출근을 할 때에는 엄두도 못 내던 일이다.
문제는 이 수레바퀴를 한 이틀만 굴리지 않으면 어김없이 티가 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삼, 사일 수레바퀴를 멈추면 아늑했던 집은 '집안 꼴'이 된다. 매일 저녁 설거지를 마무리하며 싱크대를 닦지 않으면 그다음 날 수조는 애매하게 끈적거린다. 그냥 못 본 척 흐린 눈을 뜬다. 냉장고 속 재료를 전략적으로 잘 정리하고 채워두지 않으면 애매하게 먹을 게 없어 외식을 하거나 라면 같은 것을 끓이고 싶은 욕구가 괜히 생긴다. 샤워하면서 욕실을 청소하고, 하루의 마무리 설거지를 할 때 가스레인지와 주변부까지 잘 닦아두는 데는 10분 정도의 시간만 더 들어갈 뿐이지만, 이를 미뤘다간 아주 기분 나쁜 상태에서 더 많은 에너지를 쏟아야만 한다. 장을 봐 온 날, 바로 냉장고에 재료를 넣지 않고 채소와 과일을 싹 씻어서 물기를 말린 뒤 넣으면, 필요할 때 바로 꺼내 먹을 수 있다. 이걸 알면서도 주기적으로 이렇게 일을 미뤘다 해치우곤 하는데, 그게 바로 이번 주 초에 있었던 일. 수레바퀴에 녹이 슬면 그냥 다시 바퀴만 굴릴게 아니라 녹 제거부터 해야 한다는 것을... 몰라서 그렇진 않았을 텐데...
아무튼 요즘은 거창한 요리보다는 간단하게 후루룩 하는 밥상을 차리는 편이다. 제품으로 나온 것들을 알차게 활용하려고도 한다. 6월 초의 아이템은 한살림의 '동치미 냉면 육수'. 거슬리는 재료가 들어있지 않고, 새콤달콤하니 늘 있던 입맛을 증폭시키는 맛이다. 냉면사리를 삶아 말아도 되고, 묵은지를 씻어 깨소금 양념을 살짝 한 다음 같이 말아 김치말이 국수를 만들어도 맛있다. 도토리묵사발과 오이냉국도 아주 빠르게 만들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하며, 이는 다음 주 메뉴로 확정해본다. 감자나 고구마를 오븐에 굽기만 하는 것은 언제나 노력 없이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아이템이다. 작은 주물냄비에 토마토를 잘라 넣고 올리브 오일을 살짝만 둘러 구워도 훌륭한 맛이 올라온다. 한 번씩 기분이 내키면 백강 밀로 빵을 구워 냉동해두고 한 조각씩 해동해 먹기도 한다. 냉동해둔 밥을 데우고 쌈채소를 잔뜩 잘라 올린 뒤 강된장을 올려 비벼먹는 것도 배신이 없는 맛이다. 별 거 없이, 큰 노력 없이 차린 채식 밥상은 언제나 만족스럽다. 요즘은 차를 내려 마시는 일도 조금 게을러져, 다기를 모조리 꺼내지 않는 대신 스테인리스 프렌치 프레스기를 쓴다. 커피필터를 사지 않아도 훌륭한 커피를 만들어주는 덕분에 요즘 애용하고 있는데, 잘 씻었다가 차를 우리기에도 아주 좋다. 뜨겁게도, 차갑게도 잘 우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