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한 숙소 공유 서비스의 캐치 프레이즈처럼 해외여행을 가면 항상 랜드마크만 찍고 오는 것이 아니라 로컬 사람들처럼 살아보는 것이 모든 여행객의 로망이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까지 다녀 본 수십 개 나라의 수많은 여행지 중에 살아본 경험은 정말로 교환학생으로 살아 본 미국 외에는 없었던 것 같다. 그러다 달리기를 시작하고 처음으로 해외를 나갔던 것이 싱가포르 출장이었는데, 임원을 모시고 간 출장임에도 조식 약속시간 보다 훨씬 일찍 일어나서 마리나 베이 샌즈를 달려던 기억은 잊을 수가 없다. 그토록 바라던 해외에서 현지인들처럼 생활해 본다는 느낌을 그때 처음으로 느껴보았다. 평일 이른 아침 출근 전 달리기를 하는 사람들을 마주치며 약속이라도 한 듯 눈인사를 건넸고, 마치 그들이 나를 여기 사는 로컬 사람으로 여겨주는 느낌이 들었다. 해외여행을 많이 다녀봤지만 한 번도 해외에서 달리기를 해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싱가포르에서 달렸던 1시간이 앞으로의 인생에서 또 하나의 버킷리스트를 만들어 주었다. 앞으로 나가는 모든 해외에서 달리기.
hey! local!
그러나 그 이후로 터진 코로나로 인해 2년 넘게 해외를 나갈 일이 없다가 2년 반 만에 또 한 번의 출장이 잡혔다. 회사에서 여러 명이 함께 가는 교육 출장이었는데 출장지는 내가 이미 가봤던 샌프란시스코였다. 한 번 가 본 여행지 보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여행지를 선호하는 나로서는 솔직히 별다른 감흥이 생기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2년 전 싱가포르에서 달렸던 순간이 기억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난 미국 출장에서의 개인적인 목표를 매일 아침 일어나 달리기로 정했다. 그렇게 매일 아침 혼자 달릴 줄 알았는데, 많은 동료들이 아침 달리기를 함께 하고 싶어 했고 10일이나 되었던 출장기간 동안 열 명이 넘는 사람들과 함께 달리며 좋은 추억을 쌓았다. 예전에 가봤던 곳들일 지라도 이른 새벽 동이 트기 전에 달리면서 보는 느낌은 또 달랐다. 멋진 일출 사진도 건졌지만 해외에서 매일 달리면서 세계 어느 곳에 있든 내가 꾸준히 이어갈 수 있는 루틴이 있다는 것. 그것은 일종의 용기이자 안도감이 되었다. 어디에서 무슨 일도 해낼 수 있다는 용기와 사람 사는 세상은 다 똑같다는 안도감.
샌프란시스코 아침달리기 투어 인생샷 건지실 분?
오랜만에 긴 여행을 온 나는 발리와 호주(퍼스)에서 또 한 번의 해외 아침 달리기 목표를 잘 실천해 나가고 있다. 발리에서 조금 떨어진 길리 섬은 한 바퀴 도는 데 7km였고 그 섬의 해변가에 있는 모든 상점과 리조트를 지나치면서 작은 섬의 동서남북의 다른 분위기를 호흡으로 느낄 수 있었다. 호주에 넘어와서 처음 달려 본 오늘은 목적지를 어디로 정할까 고민하다 이름만 들어도 웅장한 킹스파크로 정했고, 어제저녁이 되어서야 넘어왔기에 퍼스에 대한 정보가 많지 않았음에도 킹스파크로는 놀라울 정도로 탁월한 선택이었다. 동이 트기 전 출발한 달리기는 킹스파크의 작은 산책로를 따라 뛰며 유칼립투스 나무들이 뿜어내는 천연 디퓨저와 산소들에 내 몸이 충만해졌고, 한강보다 훨씬 큰 스완강과 퍼스 시티가 한눈에 보이는 숨 막히는 절경을 눈앞에 두고 달리는 황홀한 순간을 선사했다. 역시나 평일 아침이라 많은 사람이 달리고 있었고 그 무리 중 하나로 나도 그곳 사람들처럼 달릴 수 있다는 게 행복했다.
#눈이부시게
혼자 떠나 온 여행이라 많은 게 걱정되었고, 아쉬웠고, 망설여졌지만 내린 결정에 충실히 하루하루를 소중히 채워나가는 여행 일정 중에 오늘 아침이야 말로 내가 여행을 떠나온 이유가 여기 있었음을 깨달았다. 사실 목적지는 중요하지 않다. 어떤 이유로 떠나왔는지도 중요하지 않다. 어떤 방법으로 해내었는지도 때론 부차적인 문제가 되어 버린다. 중요한 것은 지금 여기 강렬한 태양빛과 서늘한 그늘이 교차하는 달리기에서 멈추면 바로 쉴 수 있는 드 넓은 잔디밭이 있다는 것. 때론 잠시 쉬었다가 달려도 된다는 것. 다시 일어나 또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달리면 된다는 것.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일출과 거대한 나무들 사이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오늘도 달렸다는 것.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달릴 거라는 것.
인생의 중대한 기로에서 용기 있는 결정을 했지만 매일 불안과 걱정에 힘들어하고 있는 내게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오늘은 이 세상 어디에서도 주어진다는 진리가 다시금 다가왔다.
내일은 퍼스 교민들 아침 달리기 모임에 나갈 예정이다. 그들과 함께 달리며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세상에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사람들과 함께 호흡하며 교감할 예정이다. 그리고 그들은 어떻게 사는지, 나는 왜 여기 왔는지 그리고 어떤 인생을 살고 싶은지 서로에게 강한 울림이 닿도록 이야기를 나눌 것이다. 그 어디로의 여행이든 나는 또 달릴 것이고, 인생에서의 도전에도 이 마음을 이어가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