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책 읽어주는 남자 Sep 23. 2015

네차예프, 혁명가의 교리문답

정의로운 목적은 사악하고 비열한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몇 년 전, 출판사 교양인에서 굉장히 흥미로운 시리즈의 책들이 출간이 됐었는데요.

그 이름 하여 ‘문제적 인간’ 시리즈.

네차예프, 트로츠키, 장칭, 프로이트, 루소, 스탈린, 괴벨스, 기타 잇키, 로베스피에르, 스탈린. 그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알 만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시리즈입니다. 

이중 정말 흥미롭게 봤던 책들은 네차예프, 트로츠키, 스탈린, 괴벨스, 기타 잇키, 로베스피에르, 스탈린 정도를 꼽을 수가 있는데 오늘은 그 중 네차예프를 다뤄볼까 합니다.




 

세르게이 겐나디예비치 네차예프는 바쿠닌의 후계자를 자처한 러시아의 혁명가입니다. 네차예프는 혁명을 위해서는 어떠한 수단과 방법도 가리지 않았는데, 이러한 행위는 '네차예프시나'란 용어로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위에 언급한 바쿠닌은 프루동과 함께 아나키스트 혁명가이자 철학자로 아나키즘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사람입니다. 그는 칼 마르크스의 이론에는 동의 했지만 국가 권력과 관계된 부분에 대해서는 전면 부정을 하던 사람입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보다도 극단적이었던 인물이라고 생각이 되는 부분입니다. 나름 러시아에서는 절대적으로 추앙을 받는 인물이었으며, 이런 바쿠닌의 지목을 받았던 네차예프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사람들에게 덕망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정말 흥미로운 부분은 네차예프와 갈라지게 된 부분인데 출판업계와의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해서 같은 인터네셔널에 있던 마르크스가 네차예프의 편지를 구실로 바쿠닌을 축출하게 되는 것입니다.  


당시의 시대상에 관한 이해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1800년대 초강대국은 영국과 프랑스였습니다. 강대국 반열에는 오스트리아, 러시아, 오스만, 프러시아이며 중견국 으로는 스페인과 포르투갈, 약소국은 스웨덴과 덴마크였습니다.

부정할 수 없는 프랑스의 초강대국 리즈 시절, 바로 나폴레옹의 전성기입니다.

동시에 러시아도 세계열강으로 1700년대 중반에 떠오르기 시작해 이시기에 완전히 자리 잡았습니다. 폴란드는 아예 지도상에서 지워진 시기이기도 합니다.

대충 이시기쯤 슬슬 현재 세계의 열강은 대부분 확정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1900년대까지 러시아는 지속적으로 그 위상을 이어갑니다. 


무정부주의자인 프랑스 출신의 '프루동'



러시아의 근대화를 이룩하는 혁명 과정에는 다양한 인물들이 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 네차예프, 레닌, 스탈린 등 그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알 수 있는 인물들이 그 정점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당시의 연대를 간략하게 정리해보면 1825년 12.14 제카브리스트의 거사에 이어 1853~56 크림전쟁, 1861년 농노해방령, 1881년 알렉산드르 2세의 암살, 1898년 러시아 최초의 근대적인 정당인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창당, 1901년 사회혁명당 창당, 1903년 사회민주노동당 제 2차 당대회에서 기존 멘셰비키와 레닌의 볼셰비키로 분열, 1904년 러일전쟁 발발, 1905년 1차 러시아 혁명, 1914년 1차 W.W, 1917년 10월 혁명 등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중 네차예프에 의한 혁명의 진전은 아무래도 크림전쟁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크림반도는 유구한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과거 그리스 인들에 의해서 발달된 도시로, 그러면서 동시에 대륙과 대륙을 연결하는 통로로, 징기스칸의 후예들에 의해서, 비잔티움 제국의 산실로, 오스만 제국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이야기가 존재하는 곳입니다. 


이반 뇌제 사후 혼란을 겪던 러시아는 17 세기 후반 로마노프 왕조는 물론이고 러시아 역사상 가장 걸출한 군주인 표트르 대제 시대에 이르러 주변으로의 강력한 팽창 정책을 수행하게 됩니다. 특징이라고 한다면 개방과 더불어서 해상을 장악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당시의 리보니아 전쟁에서의 참패가 바로 그 계기가 됩니다. 

그리스 시대의 유적과 가까운 위치에 세바스토폴이라는 러시아 군항이 개발된 것은 1783 년으로 예카테리나 2 세는 그리고리 포템킨에게 명하여 여기에 요새를 짓고 그 명칭을 세바스토폴이라고 부르게 했습니다. 본격적인 크림 반도의 러시아 지배가 시작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지도에서 빨간색으로 된 2번 부분이 바로 크림반도입니다.



 

그러나 오스만 투르크는 물론이고 프랑스, 영국, 프로이센 등 서방 강대국들은 러시아의 남진 정책에 불만을 품고 있었습니다. 다만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 때문에 여기에 끼어들지를 못했을 뿐이었던 것입니다. 러시아가 결국 오스만 제국을 합병하고 지중해까지 남하하게 되면 다른 열강과의 힘의 균형에도 큰 변화가 생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스만 제국이 잘 나가던 시절이면 상상하기 힘든 일이지만 서방 열강들은 은근히 오스만 제국을 지원하면서 러시아의 남하를 막아주기를 바랬고 러시아는 크림반도와 흑해 북부는 물론이고 더 남쪽까지 노리고 있었으므로 19 세기 중반 대규모 국제전으로 비화하게 됩니다. 바로 이 전쟁이 크림전쟁입니다. 


크림 전쟁은 러시아에서는 동방전쟁이라고도 합니다. 사실 전쟁 자체가 흑해와 카프카스 지방, 아나톨리아 지방, 발트해, 백해 등에서도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크림 전쟁은 다소 정확하지 않은 명칭일 수도 있으나 가장 중요한 육상 전투가 벌어진 지역이 크림 반도 특히 세바스토폴 요새라는 점을 생각하면 적당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나키즘의 아버지, 바쿠스


기본적으로 크림 전쟁은 러시아 남진 정책과 이에 반대하는 열강들의 전쟁이었으나 처음 시작은 매우 엉뚱하게도 흑해에서 한참 떨어진 예루살렘이었습니다. 1851 년 프랑스 제국의 황제인 나폴레옹 3 세는 당시 오스만 제국의 영토인 팔레스타인에서 카톨릭 교도의 특권을 인정하게 하는 내용의 조약을 오스만 제국과 맺게 됩니다. 조약 내용은 즉시 동방 정교회의 수호자임을 자처했던 차르 니콜라이 1세의 재위를 자극하게 됩니다. 니콜라이 1 세는 오스만 제국이 제국 영내의 동방 정교회의 특권을 인정함과 동시에 자신이 오스만 제국 내 1200 만 동방 정교도들의 보호자임을 인정할 것을 요구합니다. 전자는 이해할 수도 있는 형국이었으나 후자는 사실상 내정 간섭이나 다를 바 없었으므로 오스만 제국은 이를 거절했는데 프랑스, 영국의 지지를 뒤에 업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당시 러시아는 유럽의 힘의 균형을 맞추려고 노력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남진 정책의 야망이 동시에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니콜라이 1세는 오스만 투르크를 흡수하려는 야망이 있었습니다. 다만 유럽 열강들의 반대가 있었기 때문에 단독으로 진행할 수 없기 때문에 영국과 협상을 진행했었습니다. 하지만 영국의 입장도 반대. 본국까지 세력권에 들 수 있는 이런 합의 사항에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 영국의 외교 및 식민 정책의 기본방향은 바로 러시아의 남진 정책을 방해하고 전 세계에 걸친 대영 제국의 식민지들과 그 세력권을 보호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런 느슨한 합의가 맘에 들지 않았던 러시아는 오스만 제국의 영토에 군대를 파견, 드디어 크림 전쟁이 발발하게 된 것입니다. 


이 전투에서 서방들은 反러시아 정서가 강해지고 영국과 프랑스가 더 이상 방관할 수 없다보니 영국, 프랑스 연합군은 백해, 발트해, 흑해, 카프카스 지방 등 모든 지역에서 러시아 제국을 압박하게 됩니다. 그런데 러시아가 점령하려 했던 왈라키아와 몰다비아에서는 1854 년 갑작스럽게 어부지리를 얻고자 했던 오스트리아 제국이 막대한 병력을 동원해 압박해 들어왔으므로 다뉴브 전선에서는 전쟁이 갑자기 소강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하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엄청난 희생이 늘어가면서 1855년 세바스토폴이 함락되자 러시아의 패색이 짙어지게 됩니다.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인 니콜라이 1 세는 그해 3 월 숨을 거두고 알렉산드르 2세가 재위를 이었기 때문에 비록 그 결과는 보지 못했지만 아마 불리해진 전황을 보고 그 결과를 미리 예상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너무나도 유명한 또 하나의 문제적 인간인, 칼 마르크스



결국 1856 년 굴욕적인 ‘파리 조약 (Treaty of Paris)’이 맺어지게 됩니다. 여기서 러시아는 왈라키아와 몰다비아를 다시 오스만 제국에게 돌려주는데 합의하는데서 그치지 않고 흑해에 군함을 파견할 수 없게 됩니다. 즉 흑해에서 완전히 영향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러시아가 그렇게 희망하던 부동항은 더 이상 쓸 수 없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 전쟁을 통해서 러시아는 50 만의 병력을 손실했는데 그들 대부분은 잘 훈련되지 않은 농노 출신으로써 열악한 보급과 무기로, 그리고 질병으로 인해 희생되었습니다. 물론 서방의 제재와 전쟁 수행으로 인해서 러시아 경제는 밑바닥을 치게 됩니다. 더불어 외교적 위상이 바닥을 쳤음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이 결과는 가장 보수적인 러시아인조차 러시아의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하다는 점을 상기시키게 되며, 이로 인해 공산당의 표면적 선언과 더불어서 그 세력이 바깥에 드러나게 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나이팅 게일도 이 크림전쟁에서 영국군의 백의의 천사로 활동하면서 명성을 얻게 된 시기이기도 합니다. 


물론 크림 반도는 이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격동의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니콜라이 2세의 치명적인 무능함으로 인해 소비에트 초기 권력이 취약한 틈을 타 러시아 제국의 몰락이라는 틈을 타 반혁명 민족주의자들과 끝없는 반목이 일어나는 사이 크림반도에 거주하던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 타타르인들은 러시아로부터 독립을 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부딪치게 됩니다.


이야기가 너무 새어나가 버렸습니다.

19세기 전반의 러시아는 차르 1인의 지배 하의 전제정 국가였으며, 농노제가 유지되고 있었으며 서유럽에 비해 자본주의의 발달이 미약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귀족과 농노가 존재하는 신분제 사회이면서 시민층 형성의 기회가 봉쇄되어 있었던 신민사회였습니다. 나폴레옹의 침입 격퇴 이후, 군사력을 바탕으로 한 제국주의 정책이 추진되고 있던 러시아였지만, 크림전쟁에서 패배함으로서 제정 러시아가 위기에 접어든 것은 두말 할 이유가 없이 명백한 것이었습니다. 


칼 막스와 함께 이론의 영원한 파트너, 엥겔스




그 무렵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을 계기로 해서 다수의 지역에서 운동권이 확산되고, 급진적인 운동이 확산되면서 네차예프가 빛을 보게 됩니다. 당시 러시아는 농노 해방령에 의해 인신적으로 해방된 농민들이 도시로 이동하게 되면서 값싼 노동력을 확보할 수 있게 되고, 산업화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서 국가가 적극적으로 지원했으며, 철도의 확충과 서부 유럽의 기술 등이 도입되면서 결국은 산업화가 급격하게 진행되게 됩니다. 

다만 여기에도 한계가 있었으니 차르 전제정의 신성불가침 원칙은 계속해서 고수되었으며, 토지 분배의 조건이 농민들에게 불리하였으며, 토지부족으로 인해서 농업인구가 과잉되고, 급진적 산업화를 이유로 농촌의 희생은 불가피하게 되면서 당시 차르 정부의 근대화 작업의 한계를 쉽게 벗어버릴 수 없었습니다. 


인텔리겐치아 즉, 우리가 알고 있는 인텔리. 마르크스나 엥겔스, 네차예프는 이 이론 확산의 그 중심에 있었으며 러시아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질병처럼 확산시켰습니다. 하지만 위에서 잠시 언급했던 것처럼 미하일 바쿠닌과의 만남. 처음부터 거짓된 만남과 극단적인 열정. 그것은 그로 하여금 결국 당대 유럽 제 1의 혁명가였던 바쿠닌까지도 자신의 수족처럼 부리며 살아갔을지 몰라도 제 1 인터네셔널 내에서 바쿠닌파와 주도권을 다투전 마르크스 진영에 빌미를 주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서 제 1 인터네셔널에서 동시에 쫓겨나게 됩니다.



           맑스를 가장 존경하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주인공, 레닌


 

얼마 후 네차예프는 감옥에서 생을 보내게 되지만 그 안에서도 간수들을 자신의 수족처럼 부리며 차르 암살을 진행하고 탈옥의 꿈을 접게 되고 평생을 기아에 시달리다가 최후를 맞게 됩니다. 네차예프가 유명해지게 된 계기는 자신의 혁명 동지를 살해한 사건입니다. 자신과 뜻이 다르다는 이유로, 자신의 말을 거역한다는 이유로 동료도 서슴없이 잔인하게 처리해버린 것입니다. 인간 해방의 대의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삐뚤어진 사상으로 인해서 냉혈과 광기에 사로잡힌 테러리스트로, 복수의 화신과도 같은 혁명가라는 오명을 얻게 됩니다. 


이 캐릭터는 우리에게 많은 것들은 건네주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이라는 작품에서 등장하는 베르호벤스키의 실제 모델이기도 합니다. 네차예프는 희대의 아이콘으로 자리잡기까지 했습니다. 그가 보여준 냉혈과 광기어린 모습을 실제 러시아어로 ‘네차예프시나’라고 명명하기도 합니다. 고르바초프가 등장하기 전 러시아에서 끊이지 않던 급진 과격 혁명운동에서는 네차예프의 교리문답을 찬양하고 이념으로 삼기도 하였으며, 그 근거에 네차예프시나를 내적 원리로 수용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글을 쓴 작가 필립 폼퍼는 책을 편향적인 자세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뭐 그렇다고 읽기 불편할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혁명가의 표상인 네차예프. 단순한 범죄자에 불과한 그를 왜 이렇게까지 해서 급진 주의자들은 여전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가....


‘혁명가의 교리문답’, 어쩌면 시대를 초월하고 다시금 초월할 수밖에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스탈린의 전초라고도 여겨지는 그를 문제적 인간이라고 보는 시선은 명확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다른 ‘문제적 인간’ 시리즈에서 등장하는 인물들과는 사뭇 다릅니다. 철저한 현실주의자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심리적 욕망의 합리화하기 위해서 목적으로 수단을 정당화 하기에 이보다 철저하고 잔인한 캐릭터가 과연 있을까요?



제 2의 네차예프로 불리우는 강철권력의 주인공이자                   또 하나의 문제적 인간인 스탈린



 

네차예프의 삶은 과거 혁명가들이 보여줬던 모습들 보다는 과격하면서 동시에 빈틈없이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데 있어서 조금도 주저함이 없는 모습들을 볼 수 있습니다. 마치 이런 사례가 없었던 것처럼, 새로운 것을 개발 혹은 발견하기 위해서 실험을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정의로운 목적은 사악하고 비열한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네차예프 때문만이 아니어도 항상 생각하며 살아왔던 구절 중 하나인데 오늘 다시 유난히 머릿속을 간지럽히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네차예프가 작성했던 혁명가의 교리문답 중에서 일부를 이 글에 실어드릴까 합니다. 

“혁명가는 불행한 운명에 갇힌 사람이다.

혁명가는 그 자신에 관한 한 관심사도 없고,

감정도 없고, 애착도 없고, 재산도 없고 심지어는 이름도 없다.

혁명가 내부에 있는 모든 것은 유일무이한 배타적 관심사이자

총체적 주제이고 총체적 열정인 혁명으로 흡수된다.” 


세르게이 겐나디예비치 네차예프




“혁명가는 어떤 종류의 교조주의도 경멸하며, 평화의 과학도 거부한다.

평화는 미래 세대의 몫이다. 혁명가가 아는 과학은 오직 하나, 파괴의 과학이다.

오로지 파괴만을 위해 혁명가는 밤낮으로 인민의 삶을, 인민의 특성과 상태를,

이 사회 구조의 모든 조건을 가능한 모든 층위에서 철저하게 연구한다.

목적은 같다. 이 더러운 구조를 가장 빨리 가장 확실하게 파괴하는 것이다.”

이전 13화 미셸 푸코의 '말과 사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