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와 무의미를 생각하게 하다
벨라스케스의 ‘시녀들’ 기억나시죠?
당시 언급했던 미셸 푸코의 ‘말과 사물’
바로 오늘 다뤄보려고 하는 작품입니다.
미셸 푸코는 프랑스의 철학자입니다.
저서로는 ‘광기의 역사’, ‘임상의학의 탄생’, ‘말과 사물’, ‘지식의 고고학’, ‘감시와 처벌’, ‘성의 역사1: 지식에의 의지’, ‘성의 역사2:쾌락의 선용’과 ‘성의 역사3: 자기에의 배려’등이 있습니다. 이 중 ‘말과 사물’은 생명·노동·언어에 초점을 두고 서구 담론사를 분석하면서 언어와 주체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책들 중에서는 쉬운 책도 있지만 읽어 내려가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것도 있습니다.
‘천 개의 고원’, ‘앙띠 오이디푸스’의 저자 질 들뢰즈를 아십니까?
들뢰즈는 철학사가, 생성의 철학자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 들뢰즈는 거의 모든 저서가 엄청난 두께를 자랑합니다.
하지만 이 글은 편하게 다가옵니다.
마치 이렇게 얘기하니깐 질 들뢰즈의 글은 편안하게 느껴지지만 역시나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저 다른 철학자의 글에 비해서 그렇다는 얘기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미셸 푸코의 글은 어떠할까요?
푸코의 언어는 들뢰즈의 언어처럼 쉽지가 않습니다.
어떤 책이던 인문학 관련된 철학책을 읽으면 낯선 느낌이라 던가 생소한 단어를 많이 찾아낼 수가 있는데 푸코의 글은 조금은 다른 의미에서 쉽지가 않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푸코의 책을 처음 접한 건 원서였습니다.
그가 그렇게 써내려간 글들, 단어와 어절과 문장을 읽다보니 어느 순간 마치 시를 읽어 내려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푸코의 글은 그렇게 아름답고 감동적일 수가 없습니다.
제가 원서로 읽었다 아니다 하는 부분을 자꾸만 얘기하는 건 다른데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대부분 우리나라에서 발행된 책들은 문제점이 많습니다.
완역본이 아닐 경우에는 그 경우가 매우 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에 출간된 이 책 또한 예외가 될 수 없는데 훗날 여러분들이 글을 접할 때 참고하셔야 하기 때문에 말씀드리는 겁니다.
서양 학문의 역사 속에서 인간은 스스로가 주인공이면서 여타의 사물과 사실들을 통해 존재했고 인간이 인간 스스로를 연구한 것은 근대 이후입니다.
푸코는 16세기부터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는 서양사를 펼쳐 보이고 있는데,
푸코가 이 책에서 세밀하게 연구하는 대상은 언어와 자연과 경제입니다.
언어의 본질적인 기능을 분석하고 언어가 말과 문자의 관계에서 어떻게 문자가 우위를 점하게 되었는가를 역사적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일반 문법과 동사의 이론과 에트르 동사의 쓰임 등은 접하시는 분들이 느끼시기에 좀 난해할 수도 있습니다.
목차는 1부 1장이 지난번 글에서 다뤘던 ‘시녀들’입니다.
다음으로는 ‘세계의 산문’
세 번째는‘재현하기’입니다.
여기서 푸코는 돈키호테를 언급하며 최초의 근대적 소설이라고 칭합니다.
잠시 돈키호테 얘기를 덧붙이자면 푸코에 이어 프랑스의 비평가 알베르 티보데는 ‘진정으로 인간을 그린 최초 및 최고의 소설’이라고 격찬했습니다. 결국 깊은 침묵 속에서 중세의 암흑을 견뎌야 했던 사람들은 돈키호테의 광기를 통해 억압적인 틀에서 솟아나 근대로 가는 비상구를 만들기 시작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정신만 가지고는 새로운 시대에 대한 갈망을 충족시키고 용기를 내기에 역부족입니다. 광인을 감금하기 위한 정신병원이 이 시기에 생겨난 것은 새로운 시대로의 진입을 막기 위한 중세의 마지막 몸부림이라고 할 수 있겠죠.
마찬가지 재현하기의 한 부분인데요 ‘마테시스’와 ‘탁시노미아’가 있습니다. 애매한 부분이기 때문에 간단하게 설명해드리겠습니다.고전주의 시대 에피스테메(지식을 통칭하는 말) 전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우선 질서의 인식에 대한 이해방식입니다. 단순한 자연물을 정돈하는 것이 문제일 때는 대수학을 보편적인 방법으로 갖는 마테시스가 원용이 됩니다. 반면에 복잡한 자연물을 정돈하는 것이 문제일 때는 탁시노미아를 구성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기호체계를 정립할 필요도 있습니다. 복잡한 자연물 질서에 대한 기호의 관계는 단순한 자연물의 질서에 대한 대수학의 관계와 같습니다. 마테시스, 탁시노미아, 발생이라는 이 세가지 관념은 별개의 분야들 보다는 오히려 고전주의 시대에 지식의 일반적인 지형을 명확히 결정하는 굳건한 귀속의 망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탁시노미아는 마테시스와 대립하지 않습니다. 결국 탁시노미아는 마테시스 안에 자리하고 구별이 될 뿐입니다. 그러나 마테시스는 동등의 과학인 귀속과 판단의 과학이고 진리의 과학인 반면에 탁시노미아는 동일성과 차이를 다루는 분절과 등급의 과학이자 존재물에 관한 지식입니다.
정리하면 고전주의 시대의 에피스테메는 가장 일반적인 측면에서 마테시스, 탁시노미아, 발생론적 분석이 맞물린 체계로 규정할 수 있습니다.
4 번째는 말하기.
이어서 분류하기. 이 장에서 푸코는 자연사를 구조적으로 분석하고 있습니다.
생물학자인 라마르크나 고생물학의 창시자이자 최초의 공룡학자인 퀴비에를 예를 들며 그들의 이론을 설명하기도 합니다.
5 번째는 분류하기.
이어지는 교환하기 장에서 푸코는 화폐와 물가의 관계, 중상주의와 중농주의를 다루며 사물의 가치를 설명합니다. 푸코는 자연사가 생물학으로, 부의 분석이 경제학으로, 언어에 관한 성찰이 문헌학으로 바뀌는 역사적 고찰을 시도합니다.
‘그리하여 인간은 지식의 대상인 동시에 인식의 주체라는 모순적 입장을 띠고 출현하게 되는데 인간은 왕에게 속하는 자리에서, 노예화된 군주, 주시 당하는 구경꾼으로 나타난다.‘고 정의하고 있는데 참으로 절묘하고도 아름다운 정의라고 생각합니다.
2부는 7장 재현의 한계를 시작으로 8장 노동, 생명, 언어에 이어 9장 인간과 인간의 분신들, 이어서 마지막으로 10장에서는 인문과학을 들춰내고 있습니다.
인문과학을 정의한 푸코의 언어 또한 명쾌한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인문과학은 살아가고 말하고 생산하는 범위 내에서의 인간을 겨냥한다.
인문과학은 인간은 무엇인가에서부터 실증적으로 (살아가고 말하고 일하는 존재로서) 생명이란, 노동의 본질과 법칙은, 어떤 방식으로 말하는가 라는 물음으로 확장되는 분석이다.‘
그리하여 생명을 가지고 말하고 노동하는 인간은 인문과학의 대상이자 주체입니다.
하지만 푸코의 철학은 그리 낙관적이지만은 않습니다. 결론 부분에 이르러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유의 고고학이 분명히 보여 주듯이 인간은 최근의 시대에 발견된 형상이다.
그리고 아마 종말이 가까운 발견물일 것이다.‘
탈근대 논의와 더불어 우리 학계에 들어온 푸코의 사상은 그 동안 많은 번역서와 해설서가 출간됐지만 ‘난해한 철학자’라는 오명을 씻어내지 못했습니다.
이유는 바로 그를 바라보는 관점의 문제에 있었습니다. 바로 포스트모던 주의.
철학사가 들의 특징 중 하나가 해석에 기준을 두기 때문에 결국은 어느 관점인가의 문제점을 돌출시켜 사상을 특징적으로 가두는 경향이 있습니다.
여하튼 푸코의 사상은 지나치게 편향적으로 해석이 될 수밖에 없었고 이로 인해서 의도와 논지가 애매해지는 결과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사상이 먼저이고 이를 뒷받침하는 것이 관점임에도 불구하고 이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봤던 철학자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는 영미권에서 이해된 푸코의 사상을 그대로 들여오는 과정에서, 푸코 후기의 계보학적 방법에 근거한 ‘권력-지식’의 연계문제에만 피상적으로 초점을 맞춤으로써, 그의 철학적 배경과 초기의 고고학적 방법에 의해 마련된 역사이해의 방법 및 인식론적 기반이 충분히 이해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푸코가 자신의 논의 기반인 역사적 실증성의 영역들을 어떻게 분석함으로써, 기존의 역사적 성과물들을 재평가하고 있는지,그리고 어떤 인식틀 속에서 분석하고 있는지 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요구에 정확히 맞닿아 있는 것이 바로 ‘말과 사물’입니다.
푸코는 상호간에 어떤 관계도 가질 것 같아 보이지 않는 사물들의 돌연한 근접 앞에서 이러한 기괴한 병치를 가능케 하는 인식근거에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고,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우리의 분절과정이 그렇게 객관적이지도 근본적이지도 않음을 보여주고자 합니다. 푸코의 작업은 바로 이러한 인식의 가능조건을 탐색하는 데 주력합니다. 즉 인식과 이론을 가능케 하는 토대에 관심이 모아져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요컨대 ‘말과 사물’은 지식의 공간에 배치된 경험의 근본적 존재양식이자 역사적 과정에 내재해 있는 구조의 필연적 체계인 ‘에피스테메’를 통해 담론의 형성과 변환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는 서로 다른 영역들인 일반문법·자연사·부의 분석과 같은 고전시대 경험과학들을 유사하게 묶어내는 공통의 개념적 구조를 밝혀낼 때 사용됩니다. 또한 여기서 멈추지 않고 유사성과 표상 및 인간과 같은 개념들이 일정한 시기의 학문영역들에 깊이 스며있음을, 또 인간의 위치가 어떻게 변화를 거듭하는지를 르네상스시대와 고전주의시대 및 근대를 축으로 탐색하고 있습니다.
인간이란 칸트의 경험-선험 이중체를 말합니다. 그러한 '인간의 사라짐'에서 푸코가 취하고 있는 어조는 결코 비관이 아니라 들뜸입니다. 그건 '내 책을 통해, 드디어 우리는 칸트로부터 벗어날 계기를 찾았다'는 선언적 문장입니다. 그리고 소쉬르 이래로 '인간의 소멸'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철학서는 특히나 번역에 문제가 많습니다. 그나마 국내 번역본 중에서는 민음사에서 출간한 이규현 번역본이 가장 괜찮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 역시도 다양한 버전으로 원서를 제외하고 국내본으로 4가지 종류를 봤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이전에 출판한 책들에서 다룬 소멸이고 어쩌고... 이건 인간 '종'의 생물학적 소멸과는 정말 눈꼽 만큼도 관련이 없습니다.인문과학과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까지 근대가 지닌 모든 앎의 방식이 '인간'이라는 앎의 방식을 통해 생산되었다는 걸 지적하고 있는 겁니다. 위의 글을 읽으셨다면 이런 식의 번역이 얼마나 엉터리로 한 것인지 짐작하실 수 있을 겁니다.
우주의 역사를 놓고 보았을 때 인류의 역사는 미미합니다.
모든 것은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
그래서 인간의 역사도 언젠가는 종말을 맞게 될지 모르지만...
그러므로 인간은, 생명을 가지고 있는 한 인간은, 살아가고 말하는 한 인간은,
사물을 사유하였듯이 자기 자신을 사유하기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 세계의 의미와 무의미를 스스로 생각하게 하는 것.
언어는 소통을 위해서만 존재합니다.
말하기와 쓰기는 내가 나를 드러내 보이는 행위이고,
듣기와 읽기는 내가 세상을 받아들이는 행위입니다.
맞는 말이기에 굳이 사람이 입을 벌려 그런 말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루라는 시간 안에 어둠이 오고 밝음이 오고 해가 뜨고 달이 뜨고 별이 뜨고
죽음처럼 잠드는 시간이 있고 또 깨어나는 부활의 시간이 있고
노동과 휴식, 절정과 맨 밑바닥이 닿아 있습니다.
끝없는 시비 속에서만 말은 소통이 가능한 것입니다.
소리는 자기 자신을 반성하는 힘이 거의 없거나 매우 빈약한 것입니다.
반면 말은, 언어는 자기 자신을 반성하는 힘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다른 말에 의해서 부정되면서 소통의 문을 여는 힘이 없습니다.
이런 불완전한 말과 더불어 우리는 이 불완전한 세계에서 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미셸 푸코, 그는 인간 주체화의 상이한 양식들의 역사를 산출하기 위한 시도를 하였습니다.
책을 매개로 시공을 초월한 배움을 얻을 수 있다는 것.
참으로 멋진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참조: 우리시대의 고전] <27> 미셸 푸코의 『말과 사물』(1966) 홍은영 / 철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