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독서 이야기
우스갯소리지만 15년 간 저는 참 애늙은이 같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습니다.
그저 소신에서 비롯된 것이니 ‘척’은 아니라고 얘기하고 싶을 뿐입니다.
오늘은 牘書體化에 대한 주제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지금부터 하는 얘기는 제 개인적인 이야기이기도 하고 색깔이 드러날 수도 있기 때문에 불편하실 것 같으신 분들은 여기서 읽기를 멈추시길 바랍니다.
전 창살과 유독 인연이 깊습니다.
한번은 아주 어렸을 때, 아마도 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친구 집에서 작은 물건을 하나 슬쩍 했답니다. 기억하시는 분들도 계실텐데 ‘선생님 지우개’시리즈가 있었습니다. 그중 하나를 훔쳤던 것입니다. 어머니는 제 손 붙들고 친구집에 다시 가서 돌려주고 오셨고, 아버지께서는 저를 경찰서로 데려가셨습니다. 뭐, 손버릇 고쳐주기 위해서 최대한의 겁을 주기 위해 그러셨던 걸로 기억합니다.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약 1시간 정도 유치장 안에서 창살을 잡고 경찰 아저씨를 보면서 울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한 번은 성인이 되고 나서도 치기 어린 마음에 폭력 사건으로 그랬던 적이 있구요.
다른 한번은 한총련시위 당시 통일대축전 시위에 가담해서 불법집회로 몰린 상태에서 끝까지 시위하다가 잡혀갔습니다. 구치소에서 잠시 생활을 했었습니다.
옥중살이는 좀 더 어른이 되고 난 후의 일입니다. 제가 존경하는 신영복 선생이나 단재 신채호 선생, 함석헌 선생처럼 오랜 시간을 그곳에서 보낸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2살은 족히 더 먹었으니 어찌 보면 짧다고도 할 수 없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죄 주장을 하던 저에게는 가혹한 시간이었고, 재판부를 향한 원망과 억울함, 분노로 수의를 입은 생활의 절반 가까이를 보냈던 기억이 있습니다.
위에 적은 것이 저에게 있었던 모든 불행은 아닙니다.
언급했던 일 역시도 저에게는 조각에 불과할 뿐입니다.
하지만 다른 일들은 이 글과는 무관하기에 언급을 하지 않을 뿐입니다.
불운이라는 것.
사실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지나온 세월 속에서, 짧지만 각기 다른 사건들 속에서 저는 많은 것을 배우고 지금이라는 시간으로 넘어왔습니다. 그리고 저는 저 스스로를 대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랑이 아닌 스스로의 잣대에 투영한 저만의 기준이며, 제가 생각하는 방식에 기인한 평가일 뿐이니 모쪼록 불편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살아온 날들에 비해 제 앞에 다가왔던 많은 시련들은 저를 성숙하게 만들어줬고, 지금의 저를 있게 만들어줬습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스스로를 응원해왔기 때문에...
위의 언급한 일들이 있을 때마다(첫 번째를 제외하고), 책을 집어 들었습니다.
누구에게 묻고 싶지는 않고, 스스로가 알 수 있는 방법을 택했던 것입니다.
이 치기 어린 마음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인가...
왜 세상은 불공평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섞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렇게 끊임없이 이념에 대한 논쟁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인지...
법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며, 이리도 불공평할 수가 있는 것인지...
스스로 알아내고 싶었습니다.
고통스러움 속에서 깨닫기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몸부림은 그저 책을 읽는 것 외에는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저 스스로는 가치 있는 삶을 살아왔는가?
사실 이 질문에는 도저히 대답할 자신이 없습니다.
가치를 어느 곳에 두느냐의 차이는 있겠지만, 저 스스로 아직은 그런 삶에 이르지 못했음을 자각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앞으로의 삶이 너무나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읽었으면, 그만큼 깨달았으면 그것들이 쓰일 곳에 실천을 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러기엔 여전히 부족한 자신을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 글의 주제는 어쩌면, 저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말일지도 모릅니다.
술과 담배를 노상 즐기는 저는 어쩌면 인생의 반을 살아왔을 지도 모릅니다.
그리하여 제 기준에 인생의 반을 넘긴 지금은 매우 소중한 시절이라고 생각합니다.
성숙한 자신을 갖추기 위한 지금의 이 시절, 저에게는 매우 감기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새삼 책을 가깝게 한 이들과 책과 동떨어진 삶을 살아온 이들의 차이를 생각해보게 됩니다.
당대 정치가들 가운데서 제가 아는 ‘책거인’은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 그리고 박원순 시장입니다. 그밖에 대통령들은 사실 책을 멀리했습니다. 아울러 이들과 함께 하다가 철새처럼 부유하는 정치인들의 언행을 보면 책을 가까이한 이와 멀리 한 이의 차이가 확연해지곤 합니다.
그저 스스로의 힘으로는 무엇도 할 수 없는 존재이나 위상을 두른 자리에 앉아 헛기침으로 사람의 심기를 두드리는 쓸데없는 호기로 자신의 함양과는 거리가 삶...
과거 우리가 참 많이도 들었을 법한 이야기...
사람이 책을 만들고, 책이 사람을 만든다는 이치는 이와는 너무도 다른 삶이라 생각합니다.
율곡 이이 선생께서는 이런 얘기를 하십니다.
‘독서하는 사람은 반드시 단정히 손을 모으고 꿇어앉아 공경스런 자세로 책을 대해야 할 것이다. 마음과 뜻을 한데 모아 골똘히 생각하고 푹 젖도록 읽어 글의 의미를 깊이 모색해야 한다. 만약 입으로만 읽고 몸에 체득하여 직접 실천하지 않는다면, 독서는 독서고 나는 나일뿐이니, 무슨 이로움이 있겠는가.’
단단하게 자신을 수양하는 독서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일 것입니다.
잠깐 글쓰기에 대한 얘기를 해볼까요?
어떤 글을 쓰던 누군가의 생각이 담겨있는 글을 나만의 글로 옮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읽어가면서 생각을 다듬어 표현하기까지의 과정은 시간의 흐름을 통한 스스로의 단상의 변화와 더불어 생각이 미치는 자리에 이르러 드디어 하나 하나 옮기는 과정일 것입니다. 물론 제가 쓰는 글들은 그에 비해 턱없이 짧고 간결하기 그지없지만, 표현을 빌리지 않고 표현하는 새로움은 고민스러움이 분명합니다. 역사에 남은 글들을 만나는 것은 항상 설레이는 일입니다. 간극을 꽤뚫는 비평과 고고한 품격이 묻어 있는...
품격 높은 사연은 누군가에게는 분명 갈증을 채워주기도 합니다.
글쓰기가 참으로 힘든 점은 써놓고 뒤돌아 다시 생각하다 돌아서서 고치고, 돌아서서 고치고를 반복한다는 점입니다. 쉽게 읽혀지는 글들은 사실 굉장히 어렵게 쓴 글이라는 것입니다. 현란한 언어는 속된 유희라 멀리하고, 지나친 장식은 삼가며, 무엇보다도 깨끗한 양심을 담아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앎의 깊이가 여전히 미천한 저란 사람이지만 한글자 한글자 담아낼 때마다 스스로의 배움과 앎을 되새기려 노력하기에 진심으로 책, 그리고 글들과 여러분들이 마주할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과거의 학자는 책이 없어서 걱정이었고 오늘날의 학자는 책이 많아서 걱정이라고 합니다. 옛날에는 책이 없어도 영웅과 현자가 배출되었지만 지금은 책이 많아도 인재가 날로 줄어드는 것을 보면 단순하게 과거와 현재의 운명이 달라서 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익의 성호사설을 인용하면 가장 해로운 것은 습속이 과거의 학에 물든 것이다 라는 문구가 나옵니다. 천하가 물결에 휩쓸려가듯,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 귀와 눈이 젖은 나머지 벗어날 수 없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수치화 하고 일률편적인 지식의 습득이 바름으로 인도할 수 없는 형국이 되어버린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책 읽기는 재미있습니다. 전 돈보다 책이 좋고, 그런 책이 없는 세상이란,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영웅전을 쓴 플루타르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위대한 사람들의 생애를 쓰다 보니 그들이 내 삶의 기준이 됐다.’ 훌륭한 삶을 추적하다보면 누구라도 어떻게 살아야겠다는 지침이 생길 수 있습니다. 또한 자신만을 위해 산 인물들의 행적을 보면 스스로의 삶에 때를 묻혀서는 안된다는 자아의식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세상은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발명과 지식의 함축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중 으뜸은 바로 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식을 기록하고, 남기고, 다시 후대가 그것을 답습하면서 새로운 것을 발견해가는 과정 역시 시작이 있었기에, 기록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들이었습니다.
글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우리 역사의 한켠에도 그런 사상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윤동주, 조지훈, 이육사, 한용운, 이상화, 함석헌 등 자신의 목숨을 걸고 곧은 정신을 펼친 이들의 글을 읽다보면 사람이 겪어온 수난을 안타까워하고 온몸으로 지켜내려는 그 마음이 절절하게 다가옵니다.
이중에서 오히려 잘 알려지지 않은 함석헌 선생의 경우를 저는 최고로 꼽습니다.
아마 수백 년이 흐르더라도 사가들은 서슴지 않고 20세기를 대표하는 한국의 사상가로 함석헌 선생님을 꼽을 것입니다. 12살 때 이미 일본 제국주의에 반대하기 시작하고 식민지 시대에만 4차려, 소련군에게 2차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시대 때까지 수십 번의 투옥에도 비폭력으로 저항했습니다. 그가 그렇게 쉼 없이 전진할 수 있었던 이유이자 추구하는 바는, 바로 평화였습니다. 싸우는 평화주의자. 과거 나라가 어려울 때 대부분 변절되거나 반역하는 잘난 권력자들과는 달리 민중들이 나라를 지켰습니다. 명나라, 청나라, 일본, 미군, 독재 정권에서도 나라를 지켰던 주체는 민중들이었습니다. 그 시기 민중들을 지켜야 하는 지식인들마저 오염됐던 시절, 피지배 백성 민중 서민 대중 같은 피압박 민중을 일컫는 씨알들. 그 씨알들이 알아듣기 쉬운 구어체 문장으로 민중을 깨우친 분이 바로 함석헌 선생입니다. 우리 역사에 흔치 않은 인물이며 글의 힘이 무엇인지를 보여준 인물.
우리 모두는 언젠가는 죽어야할 운명입니다.
그렇기에 살아있는 동안에 어떤 삶을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바른 길을 의롭게 걸어도 다 못 걷는 게 바로 우리의 인생 아니겠습니까.
제 생각을 한 문장으로 표현해보자면,
‘인간은 인간을 넘어서, 비로소 인간이 된다.’
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죽는 것은 별로 두렵지 않다고 짐짓 호기를 부리다가도 이 땅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왜곡된 역사관과 바르지 못한 교육을 받고 있을 것을 생각하면 필사적으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제게는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재능은 없기에 주저리 글을 쓸 뿐이지만, 제가 할 수 있는 그 무언가를 여전히 찾아 헤메이고 있습니다.
저는 가을에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겨울을 맞이했고 이어서 봄을 살아와
다시금 이렇게 여름을 보내고 가을이 왔지만,
여전히 전 여름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제가 죽는 날까지 저에게 가을은 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저 뜨거운 여름을 살고 싶을 뿐입니다.
이 여름의 끝에서 하얗게 한줌의 재가 되고 싶을 뿐입니다.
그렇게 저승에 가도 여한이 없는 삶을 살기를 바랄 뿐입니다.
좋은 글에 내몰려 이글거리는 대지 위에서
올바른 삶과 그 가치를 계속해서 찾아가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