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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정근 Oct 24. 2019

햇빛과 바람


이전에 일하던 곳의 원장실은 비좁고 길쭉했다. 한평 반쯤 되었을까. 간단한 스트레칭 하기도 쉽지 않았다.

앞으로는 환자 대기실, 뒤로는 치료실이 붙어 있었고 막힌 오른쪽으로는 다른 원장실이 있어서 골방에 갇혀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바깥과 통하는 좌측 벽으로는 단열을 제대로 안 했는지 외풍까지 있어서 겨울에 나의 좌반신은 항상 추위에 떨어야 했다.

이런 구조에다 어디 창문 한쪽 없었다. 아침 9시 전에 출근해서 밤 8~9시까지 야간진료를 하거나 해가 일찍 지는 겨울날이면 하루 종일 햇살을 받지 못할 때도 많았다. 인공조명 밑에서 하루 종일 일을 마치고 밖에 나올 때쯤이면 자연광의 흔적은 찾을 수가 없는 날들이 있었다. 햇빛 없이 응달에서도 잘 자란다는 화분을 수소문해서 사놓아도 한두 달만 있으면 시름시름 죽어갔다. 이 녀석은 잘 버텨주려나하고 화분을 새로 사서 몇 주간 지켜보다가도 역시 쟤도 틀렸구나 하고 얼른 집으로 옮겨서 살린 것도 여러 번이었다.

바람도 들지 못했다. 천장에 환풍기가 있긴 했지만 외부로 통하는 문과 창문이 없으니 하루 종일 답답할 수밖에. 언제나 풀리지 않는 불분명한 응어리 같은 것이 몸 한편에 똬리를 틀고 있었다. 당시는 업무로 인한 스트레스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을 것이다. 덕트와 환풍기를 통해 들어오는 미약한 공기로 두껍게 퇴적되어가는 답답함을 해소하기에 역부족이었다.


새로 한의원을 개원하면서 처음 구조를 짤 때 원장실의 모양과 위치를 우선으로 고려했다. 동선이 조금 멀어지고 복잡해질 수 있어도 원장실을 최대한 크게 뽑고, 창문도 꼭 만들고 싶었다. 다행히 인테리어 업체와 공사 전 도면을 짜면서 이리저리 궁리해본 결과 원장실에 창문을 만들 수가 있었고, 원장실도 2개 모두 똑같은 크기로 널찍하게 낼 수 있었다.


완성된 이곳 원장실에는 햇살이 정말 잘 든다. 남서향 방향으로 창문이 나있어서, 오후만 되면 햇살이 길게 원장실 깊숙한 곳까지 내려쬔다. 천장등을 켜지 않고도 충분히 조도가 확보되고, 요새 날씨가 꽤 쌀쌀해졌음에도 오후에는 원장실에 따뜻한 기운이 넉넉하게 머문다. 지금 이 순간 등과 뒷목을 따뜻하게 비추는 햇살이 주는 만족감은 진료로 지치고 스트레스로 힘든 때에도 스스로 숨 쉬며 살아 있다는 느낌, 어떤 다른 소유물도 줄 수 없는 깊은 생동감을 선물해준다. 이 생동감 하나만으로도 이 순간의 힘든 일도 버틸 수 있을 것 같고, 사소한 일들이 더욱더 사소하게 되기도 하고, 모나서 날카로워졌던 마음도 이 잠시 동안의 어루만짐만으로 폭신하고 둥글어진다. 공간에서 받는 실질적인 변화, 아주 간단해 보이지만 막상 얻기에 쉽지는 않은 그 공기 안의 미세한 흔들림과 떨림과 온도의 변화가 나의 감정을 어찌나 쉽게 자극하고 위로하는지 놀랍다. 그 어떤 손님보다 반가운 바람과 볕이 내 식구처럼 편하게 드나들 수 있는 작은 창문 하나가 막혀 있던 몸과 마음에 환한 구멍을 내주었다.

덕분에 개원할 때 선물 받았던 화분들도 원장실에서 잘 자라고 있다. 남향의 베란다처럼 햇볕이 아주 쨍쨍하진 않아도, 실내 식물들이 죽지 않고 크기엔 부족함이 없다. 창문을 열어두면 바깥공기가 시원하게 들어와서 앉은 인간의 가슴을 부드럽게 휘젓고 지나가고, 화초의 펼쳐진 잎들도 생생하게 살아있는 바람의 손길을 조용히 맞을 수 있다. 직접 겪어보니 바깥에서 들어오는 공기를 곧바로 방에서 마중하는 것만큼 신나는 일이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볕과 바람이 주는 혜택이라는 게 누구에게나 얼마나 필요하고 또 좋은 건지 새삼 실감이 난다. 그 두 가지만으로도 이렇게 세상이 따스하고 상쾌하고 포근하고 아름다워질 수 있으니.


햇살과 바람이 이상해진다고 한다. 땅에 도달한 햇볕이 온실가스 때문에 밖으로 나가지 못해 지구가 점점 더 뜨거워지고 있다. 본래보다 훨씬 더워진 세상은 바람을 만드는데도 전과 달라졌다. 본래 가을철 드문드문 나타나던 강한 바람은 훨씬 더 무서워지고 더 자주 우리 땅에 올라와서 피해를 준다. 어떤 바람은 예전과 다르게 해로운 먼지들을 잔뜩 싣고 와서 햇빛을 막고 우리의 창문을 오히려 꼭 걸어 잠그게 만든다. 이제 이들은 이불속처럼 아늑하고 따뜻하다가도, 날카로운 흉기를 든 강도가 되기도 하고, 부드럽게 속삭이다가도, 무서운 고함과 함께 협박을 하기도 한다. 변절은 자연의 성정이었지만 오늘날 격차는 훨씬 심해지고 예측하기 힘들어졌다. 

경제학에서 자연은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주어지고 바닥이 없이 나눌 수 있는 자원이라고 간주해왔지만, 이제 사람들에게도 바람과 볕은 평등하지 않아 간다. 누군가는 손바닥 만한 창문도 없는 좁은 골방에서 하루 종일 지내야 하고, 햇빛 없는 시간에만 밖에 나와야 하고, 또 어떤 이는 미세먼지가 몰아치는 날에도 바깥에서 온종일 머물러야 하기 때문이다. 영화 기생충에서 태풍은 부자들에게는 미세먼지를 걷어내고 다음 날 맑은 하늘을 선물하는 반가운 손님이지만, 가난한 자들에게는 일순간에 집을 파괴하고 인생의 계획을 무용화시키는 재앙일 뿐이다. 사회적 안전망에서 멀어진 사람들에게 이들은 특별히 더 흉폭하고 위압적인 존재로 다가온다. 

모두 인간이 저지른 일의 결과라곤 하지만, 그래도 알 수 없고 그래서 슬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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