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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정근 Feb 20. 2020

사람이 목표가 되는 치료

오늘도 환자들을 치료하면서 고민한다. 이 증상들은 어떻게 접근해야 되는지, 진단한 것이 확실한지, 병명은 무엇인지. 이런 물음들은 사실 나뿐만 아니라 대다수 의사들의 머릿속을 항상 맴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간혹 다른 방향에서 의문이 들 때도 있다. 의사가 고치는 것이 정말 병인지, 병을 고치는 것이 의사의 유일한 의무이자 목표인지. 많은 의사들이 스스로 병을 고친다고 생각한다. 환자가 오면 그들의 증상을 청취하고, 각종 검사를 하고, 이를 토대로 진단을 내리고 적절한 치료를 제시한다. 이를 통해 증상을 완화시키고, 병인을 제거하여 환자의 질병 상태를 해결하는 것이 그들의 최우선 업무가 된다.

그러나 정말 병 그 자체만을 고치는 것만이 필요한 목표인지 잘 모르겠다. 왜냐하면 병은 사람 개개인을 토대로 발생하고, 사람에 따라 병태가 달라지며, 사람마다 다른 치료법이 필요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진단과 치료에서 환자가 어떤 사람이냐는 질문은 생각보다 중요한 핵심일지도 모른다.



베셀 반 데어 콜크라는 미국의 저명한 정신과 의사이자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정신의학자가 쓴 『몸은 기억한다』라는 책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우리의 훌륭한 선생님이셨던 엘빈 셈라드 교수는 내가 센터에서 보낸 첫해 내내 정신의학 교과서를 읽지 말라고 적극적으로 뜯어말리셨다. 셈라드 교수는 확실성을 가장한 정신의학 진단 때문에 우리가 현실에서 인식한 내용이 흐려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한 번은 내가 이런 질문을 던졌다. “교수님은 이 환자를 정신분열과 분열정동형 정신병 중 어느 쪽이라고 하시겠습니까?” 그러자 교수님은 잠시 아무 말 없이 턱을 어루만지더니, 깊이 고민한 듯 이렇게 대답했다. “나라면 마이클 맥킨타이어라고 하겠네.”


사람은 결국 어떻게든 사람이다. 그리고 환자는 병을 가진 사람이다. 의사가 접근하는 것은 병이지만 그 병은 그 사람이 느끼고 겪어 온 수많은 시간의 역사가 누적되고 중첩되어 발생하는 것이다. 의사가 진단을 통해 도달해야 할 지점은 단순히 환자의 진단명이 아니라, 환자가 살아온 환경과 감정, 가족과 직업, 인생 전반을 꿰뚫는 무언가가 되어야 되고 그것들에 조금이라도 접촉하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한의원에서는 통증성 질환들을 자주 본다. 요통, 목 통증, 무릎 통증, 그 외 수많은 관절통들. 그 통증들은 단순한 국소 부위의 병소에서 유발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인생이 몸에 스스로 쌓아온 흔적이다. 반복적인 노동, 잘못된 자세, 만성적인 스트레스와 수면불량, 기타 내장기관의 기능 장애 등이 통증을 유발할 수 있으며 이런 원인들은 삶의 깊숙한 곳으로부터 나온다. 통증을 일으키는 것은 간단히 통증 신경의 수용체가 자극되어서 생기는 것만이 아니라서, 마취제를 이용한 신경차단술이라든지, 항염증 스테로이드라든지 하는 단순한 방식으로는 질병 그 자체는 일시적으로 완화시킬 수 있을지 몰라도 그 사람의 건강치 못한 삶을 바꾸지는 못한다. 그러니 아무렇지도 않게 환자들을 반복적으로 괴롭히는 질환들, 어딜 가도 해결되지 않는 만성적 증상들, 스트레스에 의해 악화되고 주기적으로 재발하는 신경성이라는 이름이 달린 질병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의사가 환자의 삶을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이 수반되어야 한다.


그런데 다른 사람을 이해하기란 무척이나 어렵다. 더구나 인생을 나와 한 톨도 공유하지 않는 다른 사람의 고통을 이해하기란 어찌 보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셈라드 교수는 우리에게 인간이 느끼는 고통은 대부분 사랑, 그리고 상실과 관련 있으며 환자가 삶의 현실을 삶에서 얻는 모든 기쁨과 가슴 아픈 감정들을 ‘인정하고, 경험하고, 참고 견딜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의사의 역할이라고 가르쳐 주셨다. …(중략)… 우리가 하는 경험의 모든 측면을 정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충고하셨다. 또 사람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자신이 느끼는 것을 느끼지 못하면 결코 나아질 수 없다는 말씀도 하셨다.


의사든 환자든 결국은 사람이다. 때문에 나를 토대로 환자를 이해하려고 노력할 수 있으며, 삶과 감정을 공유할 수 있는 틈이 생긴다. 의사는 환자의 감정과 현실과 삶을 인정해야 하며, 나아가 인정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우선 의사 본인이 스스로의 것들을 부끄럼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 치료의 성과를 좌우하는 것은 책에서 얻은 지식뿐만이 아니라 삶의 경험이 함께 결합될 때며, 이 결합은 의사의 경험에서 출발하여 환자의 경험을 함께 나누고자 할 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인생을 솔직하고 정직하게 받아들일 때, 다양한 감정을 회피하지 않고 담담하게 인정할 때 환자들의 경험 또한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함께 변화시킬 수 있다. 치료는 주체와 객체가 항상 고정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 사이의 조화이자 교감이며 함께 만드는 변화가 되어야 한다.


오늘도 내가 고치고자 하는 것은 병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것을 다시금 깨닫고 다짐한다. 병을 캐내고 치료하기 이전에 먼저 사람들의 삶과 마주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이렇게 글로 적어놔야 그나마 그 길에서 많이 벗어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



덧. 2017년에 적었던 글을 가져와 봤습니다. 오랜만에 읽으니 새삼 새로워서 부끄럽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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