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크하는 삶

삶은 계속 노크를 한다. 반은 엄숙한 얼굴로, 나머지 반은 미안한 얼굴로

by 임성현

길을 잘못 들어선 마을 초입에서 차를 돌려 다시 내리막길로 들어서자 긴 도로 너머로 해가 지기 시작했다. 세상을 붉게 물들이는 빛이 커다랗게 차 앞 유리로 들어와 나를 감쌌고, 그 붉은 빛이 너무 아름다워 순간 나도 몰래 울컥하였다. 혹시라도 내가 더 약해질까 봐 아름다움으로 나를 꾀어내듯 삶은 내게 계속 살아갈 이유를 건네주는 듯했다.

어이없어. 병 주고 약 주는 거야?

얼마 전 나는 한순간의 잘못으로 많은 이들에게 폐를 끼쳤다. 그로 인해 내가 아끼는 존재와 좋아하는 일에서 멀어졌고, 무엇보다 내가 나의 삶을 부정했다는 생각을 뿌리치기가 어려웠다. 아침에 눈을 뜨는 일조차 고통이었다.

잘못은 네가 아닌 내가 했는데. 기껏 나를 위로해 준 삶이 괜스레 무안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와온해변에 도착하자 남도의 바다라는 것을 일깨워주듯 해는 수평선이 대신 섬의 뒤쪽으로 지고 있었고, 바닷물 대신 자리를 잡은 긴 갯벌은 가까운 섬들을 뭍으로 만들어 놓았다. 지는 해를 한참 바라보다 고개를 숙여 바로 앞에 있는 벌로 시선을 옮기니 작은 게들이 벌에 난 구멍 사이를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아름다운 낙조의 원경과 치열한 생의 근경이 교차하는 묘한 순간이었다.

‘생명이 사는 곳은 왜 저토록 쓸쓸한 맨살일까’*

이번 여행이 끝나면 네가 다시 돌아가야 할 곳은 저 맨살 같은 곳이겠지만 보라고, 그 뒤에는 저런 풍경이 너와 함께하고 있을 거라고. 삶은 내게 「율포의 기억」을 반대로 읽어주며 다정하게 말을 건네고 있었다.

나는 드라마의 마지막 장면처럼 기쁨이 가득 찬 순간으로 존재하지 않아. 오히려 희비의 교차점으로 존재하지. 봐봐, 저 낙조도 지는 존재가 만드는 빛인걸. 지고 나면 쓸쓸한 밤이 찾아올 거야.

동의를 구하는 그 말에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화엄사로 향했다. 사찰은 그 유명세에 걸맞게 이른 아침부터 방문객들로 가득했다. 대웅전 안으로 들어가 불경을 외는 스님의 음성을 따라 소원을 빌 때 평소와 달리 내 안의 평화와 살아갈 용기를 가장 먼저 떠올렸다. 가족과 지인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이날만큼은 그러고 싶었다.

대웅전 뒤로 한산한 샛길이 보였다. 구층암으로 가는 그 길은 여러 나무로 둘러싸여 있어 새가 지저귀는 소리와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만이 가득했다. 마치 속세와 단절된 공간으로 향하는 듯한 곳, 그 길이 거의 끝나갈 때쯤 검은 나비가 빨간 꽃에 붙어 있는 모습이 보였다. 휴대폰을 꺼내 천천히 나비에게 가까이 다가가자 나비는 나를 한 바퀴 감싸듯 날아 반대편 나무의 잎사귀 위로 사뿐히 앉았다. 이번에는 나도 몰래 웃음이 나왔다.

알겠어. 이제 그만 해도 돼.

마치 풀숲 어딘가에 누군가 숨어 있는 것처럼 웃으며 말을 건넸다.

티 많이 났어?

정말로 풀숲에서 삶이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나올 것만 같았다.


삶은 이렇듯 내게 계속 노크를 한다. 반은 엄숙한 얼굴로, 나머지 반은 미안한 얼굴로. 자기도 어쩔 수 없다고, 이게 바로 자신이라고, 그러니 이해해 달라고.

요 몇 주 동안 책 속의 문장으로, 내가 좋아하는 가수의 목소리로, 부족한 나를 아껴주는 사람들의 시선으로 계속해서 삶이 내게 응원의 말을 건네주고 있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여전히 도저하기만 한 삶에게 이제는 너를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은 아직 못 하겠다. 다만 고맙다고, 그 고마움에 보답하듯 나도 계속해서 너를 사랑하려 노력하겠다는 말을 풀숲 어딘가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을 너에게 건네본다. 염불을 외던 늙은 스님의 음성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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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희, 「율포의 기억」 중에서








글, 사진 : 임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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