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과 해의 말들

새해 복을 많이 받길 바란다는 이 짧은 인사말 일종의 기도이다

by 임성현

‘이제는 전설처럼 들리는 섣달그믐’*

서점에서 책을 읽다 ‘섣달그믐’에서 시선이 멈췄다. 너무나 오랜만에 마주한 단어였기에 전설처럼 들린다는 표현이 하나도 어색하지 않았다. 문득 ‘섣달그믐’이 품고 있는 ‘섣달’과 ‘그믐’의 세계가 문득 궁금해졌다. 인터넷에는 여러 의견이 있었지만 대체로 12월을 의미하는 ‘섣달’은 ‘설을 맞이하는 달’이나 ‘설 위의 달’ 등 ‘설’과 ‘달’의 의미와 관련성이 있었고, ‘그믐’은 ‘가물다, 사그라지다’의 옛말인 ‘그물다’에 어원을 두고 있었다. ‘그물다’의 설명 끝에 “‘그물다’는 ‘그믐달, 섣달그믐’을 제외하면 현재 쓰이지 않고 있다”라는 문장이 덧붙여 있었다. 오랜 생명체의 흔적이 담긴 화석을 표현하는 문장 같았다. ‘그물다’뿐일까, ‘섣달’도 ‘그믐’도 이제는 잘 쓰지 않는다. 사람이 살지 않으면 집은 폐가가 되어 가듯 쓰이지 않는 말은 생명력을 다한다. ‘섣달그믐’은 더 이상 쓰이지 않는 단어를 품고 있는 말이었고 자기가 가진 의미를 따라가듯, 그게 자신의 운명인 듯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

전설처럼, ‘그런 말이 있었대’로 불릴 단어. 이제 한 해의 마지막 날을 무어라 표현해야 할까? 우리는 단어를 잃어버리는 중이다. 사라진 것을 그리워하는 일보다 더 슬픈 일은 사라져가는 것을 지켜보는 일이다.

그날 서점 안에는 아직 아무 말도 모르는 아이가 부모와 함께 있었다. 한 번씩 웃고, 한 번씩 칭얼거리던 아이는 서점의 분위기를 밝게 만들었다. 주어진 삶을 다해가는 존재와 이제 자기 삶을 채워갈 존재가, 어쩌면 서로 마주치지 못할 두 존재가 지금 이곳에 함께 머물러 있는 기분이 들었다. 이 아이는 자라서 섣달그믐이라는 단어를 언제쯤 듣게 될지. 유리창 안에 있어 만질 수 없는 박물관의 유적들처럼 교과서 속에서 의미가 주석으로 달린 형태로 처음 보게 되는 건 아닐는지.

아이의 엄마는 계속 칭얼거리는 아이에게 동화책을 꺼내어 관심을 끌어보고 있었다. 아이의 긴 속눈썹이 섣달 그믐달같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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섣달그믐이 지나고 새해가 오면 한동안 사람들과의 인사가 자연스러워진다. 연락이 뜸하던 지인에게 오랜만에 안부를 물을 수도, 심지어 모르는 사람에게도 설레는 마음을 핑계 삼아 말을 건넬 수 있다. 그것도 평소와 다른 특별한 인사말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하루하루 자기 살기에도 여념이 없어진다는 요즘, 이때만큼은 새해 인사를 보내며 서로의 복을 빌어주게 된다. 행복을 위해 돌탑에 돌을 올리고, 엎드려 절을 하고, 두 손을 모아 눈을 감으며 소원을 비는 것이 기도라면 새해 복을 많이 받길 바란다는 이 짧은 인사말도 일종의 기도이다. 심지어 타인의 행복을 위한 기도이니 소원을 들어주는 존재도 그 마음을 헤아려 더 잘 이루어줄 듯하다.

그러다 새해의 설렘이 사그라지기 시작하면 서로의 복을 빌어주는 인사말을 건네는 일도 사라지고, 모르는 사람과는 어색한 침묵은 길어진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말까지는 아니어도 모두가 서로의 행복을 빌어주는 날이 종종 더 있으면 좋겠다. 그럼 기사에 자주 보이는 마음 아픈 일들도 조금은 줄어들지 않을까?

다행히 곧 설날이 온다. 음력에서 양력으로 바뀌며 새해의 첫날로 받아들여지던 설날이 이제 신년으로는 보기 어려운 1월의 끄트머리로, 때론 멀리 2월까지 옮겨졌지만 그 덕분에 이 거리에는 내가 아닌 존재를 위한 기도가 다시 울려 퍼질 것이다. 자기 자리를 뺏긴 설날도 이 점을 헤아려준다면 조금은 마음이 풀릴 듯하다.

올해 설날에 나는 몇 명을 위한 기도를 드리게 될까. 이번만큼은 쑥스러움을 견디고 많은 이를 위한 기도를 건네고 싶다. 차마 연락할 수 없다면 혼잣말이라도 읊조려 당신의 한해가 복으로 가득하기를 바라보겠다. 소원이 이루어지도록 마음을 담아 경건하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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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연, 『전라선』, 열화당,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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