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나를 가리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대설과 강풍 주의보가 함께 내린 날, 치악산에 한가득 눈이 쌓였다. 다행히 구룡사까지 가는 길은 제설이 잘 되어 있어 절 앞까지 차로 무리 없이 갈 수 있었다. 날이 좋지 않아 예상대로 사람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지만 사람이 적은 만큼 더 조용하길 바란 기대는 사천왕문이 가까워질수록 점점 커지는 기계 소리에 서서히 무너졌다. 실망을 안고 보광루를 지나 대웅전 앞 중정에 다다르자 처사님께서 커다란 송풍기를 안고 사람들이 다니는 길의 눈을 치우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눈이 내리는 날에도 절을 찾는 이들을 위해 추운 날씨를 견디며 길을 만들어주는 소음인 줄도 모른 채, 나만을 위한 고요의 부재를 불평하며 둘이 아닌 하나임을 알려주는 불이문(不二門)을 지나온 내가 부끄러워졌다.
그나마 몇 안 되는 사람들마저 추위를 피해 대웅전 안이나 경내 찻집 안에 들어가 있었지만, 속세와의 단절을 위해서는 아직 부족하다는 듯 눈은 계속 절을 채우고 있었다. 습기를 잔뜩 머금은 눈이 우산 위로 내려앉을 때마다 톡톡 소리를 냈다. 스님이 없는 대웅전 안에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불자들의 대화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 유리문 사이로 보이는 부처님께 기도를 올리고 옆으로 빠지자 갓길 위로 작은 전각이 보였다. 현판을 보니 역시나 삼성각(三聖閣)이다. 불교의 전파를 위해 토속 신앙을 포용하려 절에 세워지기 시작한 삼성각은 재물과 수명과 복을 관장하는 신들을 모셨지만 그 신들이 부처가 아닌 까닭에 전(殿)이 되지 못하고 각(閣)으로 남아 항상 저렇게 구석지고 외딴곳, 주목받지 못하는 곳에 있다. 마치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강제로 전학을 오게 됐지만 기존의 반 아이들과는 잘 어울리지는 못하는 학생을 보는 듯하다. 그래서 그럴까, 절에 삼성각이 있으면 마음이 쓰여 나는 꼭 그 앞을 찾아가곤 한다.
삼성각 앞에 도착해 우산을 접고 처마 밑으로 들어가 구룡사 전경을 보기 위해 몸을 돌리자 때마침 처사님의 송풍기 소리가 그쳤다. 인적도, 기계 소리도, 풍경(風磬)과 우산에 부딪히는 눈 소리마저 사라지자 고요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온전한 고요. 이 고요는 어디서 왔을까? 조금 전까지 구룡사에 울리던 많은 소리가 이 고요의 파도를 이루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소리들이 없었다면 절은 당연히 조용한 곳이라는 생각에 차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맞이했을 고요를 지금처럼 크게 느끼지 못했거나 당연한 듯 받아들였을 테다.
구룡사에 오기 전에 들린 ‘뮤지엄 산’에서 본 십자가 역시 그랬다. 뮤지엄 산의 여러 시설 중 ‘빛의 공간’은 공간에 들어서는 걸음 소리도 크게 울리는 작은 곳으로 어두운 그 공간에는 천장에 난 틈 이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대신 두 개의 선이 교차하고 있는 천장의 틈 뒤로 하늘이 있었고 하늘빛이 그 틈을 만나 십자가가 되어 어두운 공간을 비춰주고 있었다. 머리 위에 펼쳐 있는 익숙한 하늘이 좁은 틈을 만나 그 어떤 십자가보다도 더 영롱하고 선명하게 빛나고 있던 것이다
구룡사의 고요와 뮤지엄 산의 십자가는 자신을 가리고 있는 대상으로 완성되었다. 소음이 있어 묵언 수행 같은 고요를 들을 수 있었고, 벽이 있어 성가(聖歌) 같은 빛을 볼 수 있었다.
삼성각 처마 아래에 서서 나를 가리고 있던 것을 떠올려 본다.
교사가 되기 전까지 나는 부모님의 이혼에 관한 이야기를 꺼렸었다. 지금도 많이 달라지진 않은 듯하지만 예전에는 이혼 가정에 대한 시선이 더 좋지 않았다. 그러다 선생님이 되고 난 후 학생들과 상담을 하다보면 가족 이야기에 머뭇거리는 표정을 짓는 아이들을 종종 만나게 되었다. 한때 내가 선생님들 앞에서 짓던 저 표정. 나는 그 표정의 아이에게 조심스럽게 가정 상황을 물어본 뒤 우리 가족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면 우리는 이전보다 조금은 편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교사 임용 시험에 여러 번 떨어진 경험도 마찬가지다.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을 만큼 괴로운 시기였지만 그날들 덕분에 재수나 삼수를 결심하는 제자를 만날 때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말들이 많았다. 얼마나 힘들고 큰 의지가 필요한지, 수많은 유혹과 무너지는 자존감을 어떻게 해야 다스릴 수 있는지에 대해 나는 실패의 경험이 없는 선생님들보다 더 자세하게 말해줄 수 있었고 진심을 담아 위로와 응원을 해줄 수 있었다. 그렇게 나를 가리고 있다고 여겨왔던 일과 시간이 선생님이 되자 나의 자산이 되었고, 그 자산은 일반적이지 않은 길을 걸어왔거나 조금은 먼 길을 돌아가야 하는 아이들에 대한 공감의 폭과 너비를 넓혀주었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를 가리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들로 인해 고요히 빛나게 될 나의 모습은 무엇일까. 누군가에게 고요처럼 아름다운 소리가 있다면 그건 그 사람 주위에 있던 소음으로 만들어졌다는 생각을 해본다. 지문처럼 주어지거나 때론 먹구름처럼 잠시 머무는 힘겨운 시간을 견디기 위해 하나둘 모아두었던 침묵이 결국 자신을 지켜주는 고요가 되어 그 사람 곁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소란과 어둠이 다시 또 찾아오면 나를 둘러싼 소음으로 들리지 않고 있을 고요와, 나를 둘러싼 벽 어딘가에서 틈을 향해 비추고 있을 빛을 떠올리겠다. 여전히 눈치채지 못한 고요와 빛이 내 주위가 더 어두워질 때 드러날 거라 믿는다. 밤이 되어야 파도 소리가 온전히 들리고, 야광공은 빛이 나니까.
절을 둘러싼 고요가 어느 정도 익숙해지자 구룡사의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바닥뿐만 아니라 지붕과 담장 위에도, 구룡사를 둘러싼 산들의 어깨 위에도 어제부터 내린 눈들이 하얗게 쌓여 있었다. 그 눈들이 세상의 모든 소음을 흡수해 주어 구룡사는 정말 속세와의 완전한 단절을 이룬 듯 보였다. 내리는 눈이 들어오지 않도록 삼성각의 문이 닫혀있어 아쉽게도 그 안에 모셔있는 신들은 보지 못했지만 삼성각의 처마 밑에서 더 많은 것을 본 듯했다. 우산을 펼치고 계단으로 내려가자 멀리 하늘에서부터 내린 눈이 우산에 앉는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고요와 화음을 이루며 소란스럽지 않게 톡톡. 구룡사의 설경은 노승의 가사(袈裟)처럼 아름다웠지만 내게 구룡사는 눈이 아닌 귀로 기억될 곳이었다.
글, 사진 : 임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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