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을 꾹 누르는

어떤 감각은 마음에 깊은 자국을 남기는 경우가 있다.

by 임성현

어떤 감각은 마음에 깊은 자국을 남기는 경우가 있다. 마치 도장으로 무늬를 남기거나 압인으로 자국을 남긴 듯, 지우개로 지워보거나 손으로 다시 눌러봐도 지워지거나 다시 펴지지 않는다. 이렇게 감각이 마음 안쪽에 도장을 찍듯 흔적을 남기면 우리는 ‘인상적이라는 표현을 쓴다. 인상(印象), 이 말을 들으면 마음 한편이 오돌토돌해진다.


고등학교 시절, 시험 기간은 언제나 힘들었지만 이 기간에만 느낄 수 있는 작은 즐거움이 있었다. 문제에 밑줄을 긋는 소리나 시험지를 넘기는 소리, 때론 작은 헛기침 소리만이 들리는 교실에서 선생님은 인주를 들고 교실을 천천히 돌아다니며 우리들의 OMR 답안지에 확인 도장을 찍어주셨다. 그러다 선생님께서 내 앞이나 뒤에 있는 자리에 설 때면 나는 풀던 문제를 멈추고 내 차례를 설레며 기다렸다.

‘뽀드득’

도장을 두꺼운 OMR 답안지에 한쪽 끝부터 기울이며 찍으면 나던 그 소리는 마치 누구도 밟지 않은 눈을 처음 밟는 소리와 비슷했다. 선생님도, 학생들도, 복도에 있는 누군가도 입을 열지 않아 고요한 교실에서 손바닥보다 작은 공간에만 울려 퍼지던 그 소리를 나는 무척 좋아했었기에 일분일초가 아까운 시간임에도 귀를 기울인 채 선생님께서 도장을 찍는 순간을 지켜보곤 했었다. 그러면 여름에도, 가을에도 뽀드득 - 한겨울에 하얀 눈을 밟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시간이 흘러 내가 교사가 되고 보니 도장을 쓸 일이 정말 많았다. 답안지뿐만 아니라 출결 서류나 여러 잡다한 문서들에까지, 그 잦은 빈도 때문에 선생님들은 대부분 나무 도장보다 사용이 편한 만년 도장을 사용하고 있었고 나 역시 나무 도장을 서랍에서 잘 꺼내지 않았다. 그래도 시험 기간이 되면 한 번씩 나무 도장을 들고 학생들의 OMR 답안지에 도장을 꾹 찍어본다. 그때의 나처럼 혹시 그 순간 눈에 발자국을 남기는 상상을 하는 학생이 한 명쯤은 있지 않을까? 하지만 아직도 경력이 부족한 탓인지 도장을 찍을 때마다 내가 기억하는 그 소리가 잘 나지 않았다.

뽀드득, 한자로 찍혀 예스럽기도 했던 그 소리. 어쩌면 오래된 기억이 그때의 소리를 오해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게 그 소리는 분명 설레는 소리로, 하얗게 내린 눈을 밟는 소리로 인상 깊게 남아 있다.

이렇게 감각이 눌러 놓은 자국들은 조금 왜곡될지언정 시간의 파도로도 쉽게 씻기지 않는다. 음식을 맛보았을 때나 노래를 들었을 때 무언가가 떠올랐다면 그건 감각이 그때의 순간을 도장에 새겨 입이나 귀에 꾹 눌러놓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때로는 사람이 순간을 도장에 새겨 감각에 눌러놓기도 한다.


당신과 시골길을 달릴 때였다. 길을 잘못 들어 차를 돌려 나오다 당신은 마을에서 무언가 타는 냄새가 난다고 했다. 익숙한 냄새였다. 지금은 모르겠지만 예전의 시골에서는 지푸라기나 이것저것을 태우곤 했었다. 당신의 어머니와 나의 아버지가 자란 곳은 모두 시골이었으니 당신과 나에게는 그 냄새를 맡고 자란 시절이 있었다.

타는 냄새가 좋다는 당신의 말에 나도 저 냄새를 좋아한다고 했었지만 그 말은 사실 거짓말이었다. 그저 익숙했을 뿐, 좋아하거나 그리움의 대상은 아니었다. 당신이 냄새를 잘 맡을 수 있게 창문을 내리며 최대한 천천히 차를 몰았던 그날, 나는 다만 당신과의 공통점을 하나 더 만들고 싶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그 후로 나는 정말 시골의 타는 냄새를 좋아하게 되었고 당신이 곁에 없는 지금도 시골길을 지나다 타는 냄새가 나면 창문을 살짝 내리고 속도를 줄인다.

사랑의 기억은 시간의 흐름에 조금씩 사라져 가지만 감각에 새겨진 사랑은 여전히 남아 누군가를 혹은 한때를 떠올리게 한다.

“나는 이 타는 냄새가 좋아.”

태우는 냄새는, 그 감각은 당신의 목소리와 그때의 풍경을 떠오르게 한다. 계절이 여름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 순간을 새긴 도장으로 당신이 꾹 누르고 간 인상(印象)이다.







글, 사진 :: 임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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