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도에 와 긴 걸음을 세 번 걸으며 마음을 세 번 비워야겠다.
청도를 다시 와야겠다. 청도에 와 지난 이틀처럼 긴 걸음을 세 번 걸으며 마음을 세 번 비워야겠다.
먼저 유등 연지(蓮池)를 걷겠다.
차에서 내리자 연꽃 향이 먼저 달려온다. 한눈에 가득 들어오는 연못에 두 손으로 연분홍 꽃을 받치고 있는 초록이 가득하다. 그 풍경만으로 연못의 정자에 붙은 ‘군자정(君子亭)’이란 이름이 절대 과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둘레길을 따라 심어진 배롱나무 사이에 서서 연꽃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 뒤의 야트막한 산이, 그리고 그 너머에 푸르게 뻗어있는 하늘과 구름까지 눈에 들어온다. 괜히 지명에 푸름이 들어있는 것이 아니다.
배롱나무꽃도, 연꽃도 다 진 후 둘레길에 피어날 구절초를 상상하며 유등 연지를 한 바퀴 다 돌쯤 비가 내린다. 청도에 머무는 삼 일 내내 온다던 그 비가 이제야 시작되나보다. 여름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 내가 땀 한번 제대로 흘려보자고 떠나왔건만 비라니. 더위를 싫어하는 나를 위해 누군가 하늘에 빌어준 걸까? 이를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며 비를 피하기 위해 군자정으로 들어가자 빗방울이 제법 굵어진다.
톡톡-, 우산도 쓰지 않았는데 우산에 빗방울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 소리에 맞춰 연잎 위로 작은 구슬들이 굴러다니더니 톡톡 소리가 더 크게 울리기 시작한다. 너무 많지도, 적지도 않게, 딱 빗방울이 연잎에 부딪히는 소리가 선명히 들릴 만큼만 내리는 비를 보며 누군가가 나를 위해 비가 오기를 빌어준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든다. 덕분에 이렇게 연지를 귀로도 즐긴다.
그렇게 군자정에 앉아 있으니 많은 것들이 잊힌다. 심지어 올 리 없는 연락을 향한 기다림마저. 기다림이 잊힌 자리에 배롱나무와 연꽃의 분홍이, 산과 연잎의 초록이, 아직 하늘에 드문드문 피어있는 파랑이 담겼으면 하는 마음이 든다.
유등 연지에서 한 마음을 비우고 다른 마음을 챙겨본다.
다음은 청도 읍성을 걷겠다.
점심을 가볍게 먹고 청도 안쪽으로 더 들어가니 마을 한 가운데 놓여 양쪽으로 길게 뻗어 있는 청도 읍성이 보인다. 읍성 말고는 별다른 구경거리가 없는 시골 마을, 더구나 가랑비까지 내리는 평일 낮이다 보니 읍성에 나 말고는 아무도 없다. 몇 걸음만으로 가볍게 읍성에 올라 먼발치를 바라보자 곳곳에 적운이 피어있고 반대편에는 안개가 산을 에워싸고 있다. 그렇게 적운과 산안개를 양쪽에 둔 채 읍성을 걷는다. 오늘 이곳에 세상의 모든 고즈넉함을 모아둔 듯하다.
이름 모를 새들과 나비들이 곁을 지나가고 저 밑으로 ‘두더지 퇴치 중’과 ‘뱀 출몰 조심’이라는 안내문이 보인다. 생을 가진 모두에게 살기 좋은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나저나 여긴 밭도 아닌데 어째서 두더지를 퇴치하는 걸까? 억울하게 쫓겨나는 두더지를 그려보며 걷다 보니 어느새 읍성의 끝에 다다른다. 청도 읍성은 고창 읍성처럼 동그랗게 연결되지 않아 한쪽 끝에 다다르면 왔던 길을 걸어서 다시 돌아가야 한다.
돌아가는 대신 읍성에서 내려와 골목으로 들어간다. 어린 시절 내가 살던 곳에도 이렇게 골목길이 많았다. 그때는 골목길에 늘어선 현관 중 한 곳에 서서 친구의 이름을 크게 부르곤 했었다. 처음 보는 골목길에 감나무를 품은 집들이 많다. 감나무들이 내리는 비를 마시며 연잎 색의 초록 감들을 부지런히 익히고 있다. 할머니 집의 뒤뜰에도 감나무가 있어 가을이 오면 아버지는 그 나무에 올라 감을 따곤 하셨다. 할머니께서 돌아가시고 그 집이 사라지기 전까지도 가을이 되면 아버지는 감을 따러 시골에 가곤 하셨다. ……. 청도는 가을에 오면 안 되겠다.
골목 끝에 다다르자 도로가 나온다. 분명 시작점을 향해 골목길을 거슬러 왔다고 생각했건만 읍성으로부터 멀리 와 있다. 골목길이 나를 전혀 다른 곳으로 이끌었다. 나 심지어 기다림으로 애타던 감정으로부터도.
다시 읍성에 올라 이번에는 반대쪽으로 걷는다. 문득 두더지가 나타나 나의 남은 애타는 마음을 훔쳐 가 주길, 그래서 한껏 가벼워진 내가 저 적운처럼 하늘 위에 첩첩 쌓아질 수 있으면 하는 마음이 든다.
청도 읍성에서 남은 마음을 마저 비우고 다른 마음을 챙겨본다.
마지막은 운문사를 걷겠다.
두 번의 비움으로 다 비웠다고 생각했건만 밤새 내린 빗방울에 불어버린 계곡물처럼 기다림과 애타는 마음이 다시 차곡히 쌓였다. 그 마음을 끌어안고 아침 일찍 운문사로 향한다.
차를 절에서 먼 곳에 대고 소나무 숲길을 걸으며 밤새 쌓인 마음을 조금씩 비워낸다. 그렇게 솔잎이 송진 흩날리듯 마음을 흩날리며 걷다 보면 어느새 절 입구에 다다른다. 비가 그치지 않은 운문사 주위로 운무가 잔뜩 껴 있다. 이쯤 되면 정말로 나를 위해 비가 오기를 빌어주는 이가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넓디넓은 만세루를 지나자 두 곳의 대웅전이 보인다. 새로 지은 대웅전에서 마음을 마저 더 비우고, 오래된 대웅전에서는 소원을 빌어 본다. 정오가 되자 범종 소리가 들린다. 종소리를 더 잘 듣기 위해 우산을 접고 가까운 전각의 처마 밑으로 들어가 있으니 곧 불경 외는 소리가 들린다. 전각 안에서 스님들이 책상 위에 불경을 올려놓고 한목소리로 읽고 있다. 벽에 기대어 눈으로는 처마 밑으로 떨어지는 빗방울을, 귀로는 빗소리와 불경 소리를 담아 본다. 다른 생각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다.
운문사를 나와 걷다 보니 화장실 벽 한쪽에 5마리의 고양이들이 붙어 있다. 그 자리에만 빗물이 닿지 않는다. 새끼 고양이는 부모 고양이에 기대어 자고, 부모 고양이는 연신 새끼 고양이들을 핥아주고 있다. 빗살이 점점 세져 비가 닿지 않는 공간이 좁아지자 고양이들이 서로 더 가까이 붙는다.
차 속의 남는 우산이 생각난다. 차를 절 바로 앞 주차장에 세워두지 않은 게 후회된다. 뭘 얼마나 대단한 걸 비우겠다고 차를 그렇게 멀리 대고 왔을까. 조금만 기다려 달라는 말을 건네고 차를 향해 한참을 걷는다. 차를 몰고 다시 화장실 앞까지 돌아왔을 때도 고양이 가족이 그대로 있다. 혹시나 도망갈까 봐 화장실을 끼고 반대 방향으로 돌아 고양이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 편 우산을 놓아둔다. 잠시 후 새끼 고양이가 호기심에 우산이 있는 쪽으로 가보지만 부모 고양이가 오지 않자 제 부모 곁으로 되돌아간다. 이번에는 아빠 고양이가 우산이 있는 쪽으로 가지만 새끼들이 오지 않자 역시 제 새끼 곁으로 돌아간다. 결국 우산만 휑하니 벽에 기대어 있다.
비를 맞아도 소중한 이와 함께 있고 싶은 마음.
일기예보를 보니 비가 좀 더 온다고 한다. 운문사 앞 화장실에 우산을 두고, 대신 그 마음을 가져간다.
청도를 다시 와야겠다. 요즘처럼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차오르면 그 마음을 세 번 비우러 다시 와야겠다.
가을 지나 겨울이 오면 눈이 쌓여 유등 연지도, 청도 읍성도, 운문사도 더 고요해질 테니, 세 번을 길게 걸으며 그 고요로 번잡한 마음을 하얗게 덮으러 와야겠다.
글, 사진 :: 임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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