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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그랬음'의 의미

새해에는 좀 더 당당해 지자!

by Phd choi 최우수

어릴 때 단독 주택에 살았다. 요즘 같이 아파트가 많지 않은 시대라 단독주택이 지금과 같은 비싼 타운하우스로서 비싸고 호사스러움의 상징은 아니었다. 산밑 비탈길에 있던 그저 작고 소박한 단독 주택이었다.

말이 좋아 단독 주택이지 겉만 번지르르할 뿐 이맘때 겨울이면 아무리 지하 보일러실에서 어머니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연탄을 갈아대도 바닥만 뜨겁고 공기는 차가운 '웃풍'으로 코가 시린 허술한 집이었다.

하지만, 장점은 가끔 어머니가 시장에 가거나 집을 장시간 확정적으로 비울 때는 마당 포함한 단독주택이 온전히 나의 놀이터가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부모님이 자리를 비우고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게 되면 꼭 사고를 치게 된다. 뭔가 떨어트려서 깨트리거나 뭔가 엎지르거나 등등. 사고 이후에는 수습을 위해서 분주해진다. 수습의 목표는 결국 원래 그랬던 것처럼 만들기가 된다. 하지만, 사고 이전과 같은 완벽한 복구는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그럴 때 단골로 등장하는 거짓말이자 변명이 '원래 그랬다'이다.


연말연시 조직에는 평가, 승진, 시상 등 다양한 조직 내 이벤트가 있다. 이벤트의 이면에는 필연적으로 결정이 따르게 되고 그 결정에는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가끔 그 결정의 이유가 '원래 그랬다.'라고 말하고 대충 넘어가는 경우가 있다.

원래부터 그렇게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누가, 언제가 불분명하고 확인하려야 할 수 없다.


예전 큰 기업 본사 근무 시, 묻따(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실행하는) 업무의 단골 멘트가 '그룹에서 시킨 일'이었다. 그룹이라는 조직의 위압감도 있지만, 이 업무에 관해 물어보고 싶어도 어디다 물어야 할지 불분명하여 확인할 수 없고 그저 수행해야 했다.


'원래 그랬음'은 무엇이 문제일까?

공정성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 절차와 결과의 공정성

절차의 공정성이야 이미 '원래 그랬다'는 말 한마디로 무너진 것이고, 결과의 공정성은?

절차의 공정이 담보된다고 해서 결과의 공정성이 100% 담보되는 것은 아니나, 결과의 공정성을 높이는 핵심 요인이 절차 공정성임은 부정할 수 없다. 아무래도 절차 공정성이 부족한데 결과 공정성의 확률이 높아지긴 어렵다.


그럼 조직이나 리더는 왜 '원래 그랬음'에 숨으려 할까?

커뮤니케이션 스킬이나 의지의 부족이라기보다는, 이유에 대해 별로 고민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할 말이 없는 것이다. 그저 위에서 시키니까 혹은 '그냥~'이다. 마치 성적표에서 백점을 맞았는데, 채점한 시험지는 없는 거라고 할까?

결국 '원래 그랬음'에는 조직과 리더의 비겁함, 게으름이 감춰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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