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절함의 기원
나는 50짤 가까이 살면서 간절함이 꽤 큰 동기와 추진력이 되어주곤 했었다.
가령, 고등학교 때 전교 등수를 아우르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고3 담임과의 대학 지원 면담 시, 우리 엄마가 우리 아들이 서울에 있는 대학은 갈 수 있겠냐고 간절히 물었을 때, 담임 선생님이 밝게 웃으며, 서울에 있는 대학은 충분히 가고 고를 수도 있단 말을 듣고 우리 엄마는 더 묻지도 않고 면담을 대충 마치고 나왔단다. 선생님이 알아서 해주시라는 말을 남기고.
그때도 난 대학에 대해 간절했었다.
그래서 지금도 주위 사람들은 이젠 지겹다고 하는 말이지만, 90년대 초에 학원이나 과외 한번 없이 서울에 있는 대학을 재수 없이 들어갔다. 간절함의 힘으로
대학을 들어가고 나서도 인생의 단계마다 중요한 성취를 이뤄야 할 땐 난 자주 간절함이 힘이 되어 주곤 했다.
취업, 이직, 박사학위 등등
하지만, 내일부터는 타인(회사 사람, 자녀 포함)에게 간절함을 가지고 업무 혹은 공부해라라는 말은 안 하려고 한다.
이유는 동기와 추진력의 '간절함'이 과연 남이 가지라고 해서 가질 수 있는 건가에 대한 회의가 들기 때문이다.
요즘같이 풍족한 시대에 왠 간절함이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사실 내가 생각하는 간절함은 꼭 가난, 결핍의 결과만은 아니었다.
간절함은 결국 자신에 대한 관심과 사랑에서 기인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나르시시즘까진 가지 않더라도 자신을 대부분 사랑하고 아낄 테니 여기서 말하는 자신에 대한 관심과 사랑은 평균은 기본으로 깔고 얘기해야겠다.(물론 극소수 평균 이하인 분들도 인정, 존중합니다.)
그럼 직장인이면 업무, 학생이면 공부에 간절하지 않은 사람은 자신을 평균이상으로 사랑하지 않는 걸까?
최근에 최인아 저자의 "내가 가진 것을 세상이 원하게 하라"는 에세이를 읽었다.
30년 넘게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아왔고 지금은 책방 사장으로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는 남부럽지 않은 저자지만 그도 대기업에서 살아남기 위해 많은 갈등, 고민 끝에 자기만의 신념과 가치관을 만들고 부수고 다시 만들면서 견뎌왔다.
저자는 조용한 퇴직이나 회사에서 대충 일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결국 회사에서 무의미하게 보내는 시간은 회사의 시간이 아닌 나의 시간이므로 시간을 그렇게 보내는 것은 회사에 대한 조용한 복수도 아니고 결국 나의 시간을 허비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일이나 공부에 간절하지 않은 사람들은 역시나 그 일이나 공부의 의미와 가치 그리고 그것들이 미래에 자신의 인생과 시간 그리고 가치에 영향을 줄 거라는 걸 외면하기 때문 아닐까?
굳이 외면이란 표현을 쓴 이유는 현재 모르지는 않지만, 그저 귀찮고, 회피하고 미루고 싶은 마음을 이기지 못하는 것이라 짐작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시간은 기회는 또 오겠지 하는 자기 합리화의 최면을 걸고 만다.
즉, 간절함은 내가 활용하면 엄청난 힘이 되지만, 배부른 식사 후에 설거지를 미루듯이 아주 손쉽게 미룰 수 있는 대상일 뿐이다.
이렇게 복잡하고 또 자기 주관적인 판단에 좌우되는 '간절함'을 타인이 어떻게 줄 수 있을까?
더군다나 매월 같은 날짜에 꼬박꼬박 통장에 꽂히는 돈에 - 그 돈이 적든 많든 - 맞춰 사는 게 제일 큰 장점인 직장인들에게 간절함을 얘기하는 게 가당키나 할까?
그래서 난 내일부터 절대로 입 밖으로 '간절함'을 얘기하지 않으려 한다.
그저 나만 아는 비밀 한 가지로서 '간절함'을 내 일과 삶에 활용하면서 혼자 잘먹고 잘살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