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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그래 Oct 13. 2024

옷탑 무덤 위에 피어난 것은

해가 찢어지게 더운 2023년 8월의 여름,  거실과 안방에 린넨커텐과 암막커텐을 이중으로 펼쳐 놓은 덕에 내가 누워있는 거실에는 전혀 해가 들지 않았다.   


밤이 낮 같았고 낮이 밤같은 나날의 연속…


신경안정제 약빨에 의지해 무기력하게 이불 속에서 하루가 빨리 흘러가기를, 그래서 내 삶의 밧데리가 완전히 방전되기만을 기다리는 보통의 어느날이였다.


나는 거실에 엄마가 물려 준 두툼한 요를 펼쳐 놓고 외출하지 않는 날은 하루종일 그 안에서 1인 독방에 갇힌 죄수마냥 최소한의 움직만으로 살았다.   안방은 봄부터 겨울 옷을 정리해서 버린답시고 붙박이장에 있는 옷을 죄다 꺼내 몇덩어리의 옷탑을 쌓아둔 상태여서 도저히 몸을 눕힐 자리가 없었다.  나와 9살 늦둥이 막내 아들은 피난민처럼 무너진 옷탑의 홍수를 피해 거실로 대피했다.   옷정리가 끝나면 거실의 임시거처 생활을 청산하고 안방으로 빠르게 복귀할 생각이였지만 예상보다 그 기간은 계속 미뤄져 봄과 여름, 두 계절이 지나가고 있었다.   남편은 거실의 돌쇼파를 자신의 새 둥지로 삼았고 우리는 옷무덤에서 피난 나온 난민이였지만 어느새 같은 공간의 다른 구역에 사는 이산가족으로 변질 되었다.


안방의 옷탑은 그 종류도 크기도 다양했다.  수년째 손이 안가서 이번에야 말로 꼭 버릴 옷,  몇번 입고 던져뒀던 세탁할 옷, 언젠가 있을 장례식과 결혼식에 입을 검정 옷, 있는줄도 몰랐던 텍 달린 새 옷, 한달하고 관둔 운동복 세트,  입고 외출하긴 낡아서 집에서나 입어야겠다고 모아 둔 목 늘어난 티와 후줄근한 고무줄 바지, 나의 젊고 날씬하던 시절을 홀로 기억해준다는 고마움과 혹시나 그 영광의 시절이 다시 오지않을까하는 미련에 차마 버리지 못하고 끌어 안고 살았던 화려하고 요란한 꽃무늬 원피스들…  아빠의 영정사진이 되어 버린 8년 전 가족사진을 찍을 때 입었던 불운한 나의 검정 원피스까지.


  


옷정리를 해야겠다는 큰 결심을 한건 매듭처럼 엉켜 뭉텅이진 옷들 때문에 더이상 옷장의 문이 닫히지 않고 옷장이 매일 옷들을 토해내며 내게 살려달라고 아우성을 친 탓도 있겠지만 사실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급하게 입고 외출해야할 상황에 내가 입을만한 옷을  도저히 찾을 수가 없어서였다.  옷이 이렇게나 많은데 정작 입고 나갈 옷이 없는 처참함이란.  그때 내가 겨우 찾아 걸쳐입고 나간 것은 옷이 아니라 자괴감과 한심함이라는 무거운 갑옷이었다.  


집에만 있다가 오랜만에 외출하면 미친듯이 여러일정을 한번에 다 소화해야 하기 때문에  한 번 나갔을때 최대한 나에게 맡겨진 일들을 전투적으로 해치워야했다.  아이넷을 포함한 우리 식구 여섯명과 아랫집 시부모님과 간병인 여사님 몫까지 아홉식구 먹고 살 일주일치 장을 보고 은행업무와 거동이 불편한 시어머님 약 타오기, 아버님 모시고 강남 안과 다녀오기, 남편이 부탁한 서류떼기,  엄마가 필요하다고한 다육이 화분 사러가기,  미뤄둔 학원비 납부하러 가기,  그러다 시간이 남으면 저녁 밥때가 될 때까지 미친듯이 대형 쇼핑몰의  층층을  맨발의 순례자처럼 고행하듯 터덜거리며 걸어 다녔다.  옷무덤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늘 그렇듯 멀고 먼 길을 돌아 돌아 마지막까지 버티다 겨우 도착했다.  신발장에 신발을 넣고 중문을 열때면 아직 열기가 남아있는 화장터 문을 제 손으로 열고 들어가야하는 망자라도 된듯 발길이 떨어지지않아 마냥 머뭇머뭇 거렸다.  


외출 후에는 늘 그렇듯 의자 위에 벗은 옷을 툭 던져 두었다.  나무가 나이테를 쌓듯이 의자는 겹겹이 쌓인 옷들로 날마다 쑥쑥자라나 어느덧 커다란 아름드리 거목이 되었다.   어느날 그 거목은 차마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와르르 무너지며 끈적한 용암처럼 옆으로 옆으로 흘러 내려 안방을 뒤덮어 버렸다.  


수많은 옷탑들 사이 한쪽에는  트레이더스 쇼핑백 가득 제짝을  잃은 양말들이 여느 양말전문매장 보다 많았는데  심지어 막내가 어려서 신었던 미끄럼방지용 양말 한 짝도 외롭게 미아가 되어 날 쳐다보고 있었다. ‘도대체 넌 몇년전부터 여기에 있었던거니?‘


방바닥에 깔려 버린 옷들과 미아가 되어 쉼 없이 나를 보며 빽빽 울어대는 짝짝이 양말들을 피해 나는 안방 문을 닫았다.  그리고 그 방에 ‘출입금지’라는 투명 경고문을 내 마음 속에 붙히고는 그들을 어둠 속에 가둬 두었다.  이제 안방은 화장실로 통하는 암흑의 통로로 그 용도가 변경되었고 나는 누군가 그 방문을 열고 들어가려하면 성난 고슴도치처럼 바짝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들이 난장판인 안방을 보며 나를 향해 뱉어낸 잔소리와 무언의 비아냥은 손톱밑 가시처럼 박혀서 빠지지 않은채로 문득문득 한 번씩 나에게 기분 나쁜 아픔을 선물했다.


이 집으로 이사한지 3년이 넘었지만 나는 한 번도 떳떳하고 반갑게 손님을  집에 초대하지 못했다.   가족인 엄마와 동생들이 놀러 와도 늘 좌불안석이였다.  엄마가 모처럼 시골에서 올라왔어도 고양이털, 강아지털 알레르기가 있어서 여동생 집에서 자야겠다고 말을 꺼내면 내심 안도하고 고맙기도했다.  심지어 유일한 30년지기 친구가 멀리서 우리 동네로 놀러 왔어도 집에 데려와 차 한잔 못마시고 돌려 보냈다.  나는 엉망이고 난장판인 나를 들키고 싶지않아 전전긍긍했고 그런 내 스스로가 참 못나게 느껴졌다.  ‘그러니까 제발 치워! 좀 다 갖다 버려.  뭐가 겁나서 아까워서 그렇게 움껴쥐고 사는건데! 도대체 왜 그러는건데!!! 왜!!! 왜!!!‘ 라며 소리없는 악을 내지르며 내 자신을 원망했다.   간혹 아이들이 내 눈치를 보며 친구들을 데리고 오고 싶다고하면 나는 화가나서 절대 안된다고 선을 그었다.  매달 정수기 필터를 바꾸러오는 기사님의 약속전화를 받으면 최대한 날짜를 미루고 청소할 시간을 벌었다.   어느날 불쑥 예고도 없이 도시가스검침원이 방문하는 날에는 인터폰 앞에서 동상처럼 굳어버린채 울리는 초인종이 멈출때까지 숨을 참아야했다.  이런 순간들마다 나는  남들이 뭐라하기도 전에 지레 쫄아서는 나태하고 게으른 나를 스스로 헐뜯고 할퀴었다.  남들이 손톱 밑에 박아 놓은 가시가 아픈줄 알았는데 내가 나를 할퀴고 있어서 아픈 것이었다.   아물기도전에 같은 곳을 또 휠퀴어대니 상처는 아물새없이 짓물러 노란 피고름이 마를 날이 없었다.


이사한 날이 가장 깨끗했던 날이였다고 아이들이 회상할만큼 나의 집, 나의 삶은 하루가 다르게 공기가 꽉 들어찬 풍선처럼, 복리로 늘어나는 사채이자처럼 숨막히게 불어났다. 이러다 내 묵은 짐들로인해 집이 무너져 내리지는 않을까 온식구들이 걱정하는 처지가 되었다.  (다행히 우리 집은 내진설계가 되어있어서 쌓여있는 짐들의 아우성과 발버둥에도 아직 내려앉지 않았다.)


이불 속에 웅크리고 누워 머릿속으로만 매일 매일 안방의 옷탑을 정리하며 치우던 나는 쓰레기 더미에 악취가 풍기던 난지도도 풀이 자라고 꽃이 피는 공원이 된 것 처럼 먼 훗날 우리집도 사람들이 찾아 와 즐겁게 머물다 가는 곳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지 상상해 봤다.  커다란 10인용 식탁에 정갈하게 차려진 음식들과 북적북적하지만 소란스럽지 않은 저녁식사 자리.  나는  행복의 저편으로 가느다란 희망의 덧가지를 쳤다.   그러나 이내 다 부질없다는듯 자라나는  희망의 새싹과 나뭇가지를 내 손으로 뚝 뚝 꺾어 버렸다.  ‘어차피 늘 이 상태일텐데 뭐…‘  


유리창도 녹아버릴 것 같은  더운 여름날이였지만 빛이 들어오지 않는 거실과 안방은 마치 살얼음이 언 한겨울의 저수지처럼 위태롭고 고요했다.   나는 그 아슬아슬한 살얼음 가운데에 깔려있는 요 위에 엎드린채 한껏 목을 젖히고 필요시약을 입에 털어 넣었다.


꿈 속에서 아빠의 마지막 날로 끝없이 타입슬립을 시도하다 실패해서 울부짖고있는 나, 짝 없는 양말 한 짝처럼 아빠를 잃어버리고 미아가 되어 버린채 홀로 울고있는 나, 나에게 소리지르고 다그치는 그들 앞에서 웅크리고 있는 나, 그런 나를 잠시라도 곤히 잠재워 주고 싶어서였다.


몽롱한 채 이불을 덮어쓰고 어둠 속에서 뒤척이는데 ’띠리릭’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엄마~ 나 배고파~ 배고파~” 몸보다 말이 먼저 도착한 막내였다.


“어..어 왔어?”


나는 부스스 몸을 반쯤 일으켰다.


 ‘그래도 저 녀석 혼자 밥 챙겨 먹을 수 있을 때까지는 건강하게 살아내야겠지…?’ 막내의 다급한 긴급식량 구호 메세지에 나는 피식 어이없는 웃음이 새어나옴과 동시에  “뭐 먹고 싶은데?” 하고 반사적으로 물었다.


“나는 엄마가 해주는거 다 맛있어!  근데 흰밥이 최~고~로 맛있어! 콩들어간 밥 말고!!!”


‘에효… 저녀석 편식 고쳐 주기전에는 내가 맘 편히 눈 못감겠구만…’


나는 오늘도 살아갈 사소한 이유를 하나 만들어냈다는 안도감을 안고 부엌으로 향했다.


앞치마 허리끈을 질끈 당겨 묶을 때 왠지 끊어질듯 말듯 이어져있던 내 왼손의 흐릿한 생명선도 누군가가 바짝 당겨 손목까지 끌어다가 단단히 묶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벽에 똥칠하기 전, 아니 아니, 막내 손주 콩밥 지어 떠먹여 줄 수 있을 때까지만… 그때까지만…그때까지만 더 살아보겠습니다!’


이건 신에게 바치는 기도도 산타할아버지께 비는 소원도 아니였다.


8년전 식어가는 아빠의 발을 붙잡고 울며 기도했지만 언젠가부터 신과 산타할아버지의 규칙이 통합됐는지 ‘우는 아이’의 소원은 들어주지 않는다는걸 알아버린 탓이였다.


‘그때까지만… 그때까지만 더 살아보겠습니다…’ 이 읊조림은 흰쌀 밥을 호호 불어가며 먹는 아이의 입김으로 피어난 옷탑 무덤 속 옹골진 나의 다짐 한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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