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 시작해야만 할 것 같은 8월 중순이었다.
여름이 지나면 곧 겨울이 오고 이렇게 누워만 있다가 1년이 또 지날 것 같은 서글픔.
누워서 휴대폰을 쥐고 매번 뭐 살 것 있나? 남들은 뭘 파나 궁금해서 들여다봤던 당근 어플.
무심코 우리 동네 알바 코너를 어슬렁 거리며 들어가 봤다.
과연 우리 동네에서 내가 원하는 알바를 찾을 수 있을까? 주말에는 아래층에 사시는 시부모님 식사와 케어를 내가 맡아서 해야 해서 평일에 근무할 수 있는 곳을 찾아봤다.
평일 5일 연속은 첫 알바이기에 부담스러웠고 평일 하루 이틀은 시부모님 병원 모시고 가야 하니 그것도 어려웠다.
내 조건에 맞추려니 할 수 있는 알바가 거의 없었다.
다시 치과에 취직해 볼까 했지만 경력 단절이 너무 길었다. 야속한 20여 년의 세월…. 보육교사 자격증이 있으니 어린이집을 알아볼까?
하지만 우울증이 심했던 나는 나의 감정기복이 아이들에게 독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문득 겁났다.
’이것도 안 될 것 같고… 그럼 시어머님 간병하려고 따 두었던 요양보호사 일을 해볼까?‘ 하다가 내 시부모님 모시기 힘들다고 차라리 알바한답시고 뛰쳐나가는 주제에
남의 부모님 모신다는 게 가당 키나 한가 싶어 이 일도 마음을 급히 접었다.
그리고 그런 나름의 자격증을 필요로 하고 전문인력을 채용하려는 곳은 꾸준히 매일 나올 것을 전제로 사람을 뽑기 때문에 나한테는 해당이 되지 않았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주방 설거지나 청소뿐이구나 한숨 쉬는데 집 근처에 주방보조 겸 설거지를 할 수 있는 곳이 알람에 떴다.
일주일에 세 번, 다섯 시간씩 하는 설거지일이었다. 거리도 차량으로 이동하면 가까웠다. 시간도 막내 등교시키고 가면 딱 맞을 것 같았다.
나는 알바 지원서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사진을 올리면 채용될 확률이 높아진다는 안내문을 보며 나는 내 얼굴을 이렇게 까야하는 게 맞는지 고민했다.
사진을 찾으려 휴대폰 사진첩을 뒤적여 봤는데 아이들이랑 같이 찍은 셀카 사진에 내 얼굴은 절반만 걸친 사진이 다였다. 면접 지원용으로는 맞지 않았다.
휘리릭 휘리릭 손가락을 올리며 사진첩을 넘기니 다행히 큰 딸이 찍어준 사진이 한 장 있었다. 인상이 좀 밝아 보이도록 살짝 색감 보정 좀 하고 사진을 올리려는
그 순간 사진 속에 이런 말이 들렸다. ’너 지금 무슨 수작이야? 네가 뭘 할 수 있다고 이런 걸 하고 있어? 그냥 평상시처럼 편하게 누워있으면 좋잖아.!
누가 너 같은 무경력자를 뽑아주겠어? 너 또 금방 지쳐서 나가떨어질 거잖아. 차라리 안 하느니만 못해. 뭐 하러 이런 허튼짓을 하는 거야?‘
내 안에 우울하고 나태한 그녀가 여지없이 내 손목을 잡아끌어 날 주저앉히려 하고 있었다. 나는 얼른 사진 저장 버튼 눌러 그녀를 봉인시켰다.
문제는 자기소개였다. 버젓한 직장이나 아르바이트 경력도 없이 20년 넘게 살림하고 남편 채소농장에서 일 거들어준 게 다였는데 날 뭐라고 소개하지?
빈칸으로 나를 응시하는 자기소개란을 한참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나는 무턱대고 나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시부모님을 모시는 8인 가족의 살림을 하는 주부이고 15년 넘게 채소농장에서 수확하고 포장하는 작업을 하며 일꾼들 식사를 담당했었다.
또한 단순 반복 업무를 잘한다라는 조금은 어처구니없는 경력 소개였다.
내가 쓰면서도 어이가 없는데 지원서를 읽는 사장님도 헛웃음, 아니 비웃음을 지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알바고 뭐고 다 때려치울까 싶었다.
나의 20년 세월이 헛살아 온 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싶어 발버둥 치는 것처럼 보이면 어쩌지… (‘어, 너 지금 발버둥 치는 거야. 엄청!‘ 그녀가 또 한소리 거든다.)
아… 머리가 아팠다. 그다음으로는 장점과 추가 정보를 입력해야 한다. 산 넘어 산… 알바 면접의 고지가 너무 높구나.
맨날 자기 비하에 왜 사나 싶은 내가 나의 없는 장점을 쓰려니 곤혹스러웠다. 사실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으니 장점이랄 게 없어 보였다.
그러다 저 끝 바닥에 먼지처럼 가라앉아있는 장점 한 두 개를 겨우 낚시 바늘에 걸어서 건져 올렸다. 나의 장점은 ’성실해요‘ ‘긍정적이에요‘.
우울증 환자가 긍정적인 게 장점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지만 그래도 이 암흑 같은 동굴 속에서 빛이 있다고 믿기에 아직 살아있는 게 아닌가 싶어 선뜻 나의 장점이라고 받아주기로 했다.
추가 정보는 차량 있음, 반려동물 양육경험 있음, 육아 경험 있음, 보건증 있음, 요양보호사 자격증, 비흡현, 장기근무 가능이라고 체크했다.
비흡연도 뭔가 추가 점수가 있는 건가? 이런 항목이 있는 거 보면…. 뭐든 누를 수 있는 건 다 눌렀다. 구차해 보일언정 지금의 나를 표현할 수 있는 건 이런 게 다니까.
한 시간도 넘게 알바 지원서의 자기소개와 추가정보를 골랐다 지웠다했더니 알바를 하지도 않았는데 벌써 야간 근무를 며칠 한 것처럼 머리가 멍했다.
‘아… 몰라. 어떻게든 되겠지.’
나는 알바 지원 버튼을 눌렀다. ‘경력도 없는 나 같은 생초보에게 면접이라도 보러 오라고 해주면 분명 마음씨 괜찮은 사장님일 거야.‘
혹시 연락이 오면 면접이라도 가보는 거고 안 오면 다행이다 싶은 마음이었다. (사실 마음속으로는 차라리 연락이 안 오기를 바랐다. )
나는 아직 뭔가를 규칙적으로 해낼 자신이 없었다.
내 몸 하나 일으켜 화장실 가는 것도 귀찮은 상태였다.
포로시 초등학교 3학년 늦둥이 막내가 집에 돌아오면 뭉그적거리다 겨우겨우 천근만근 몸을 일으켜 저녁밥만 차려주는 못난 엄마였다.
띠리릭~ 막내의 허겁지겁한 발소리가 들린다.
마침 ”당근!“ 하며 해맑은 알람 소리도 들린다.
나는 채팅창을 한참 바라봤다.
내일 면접을 올 수 있냐는 채팅이었다.
‘이런…. 망했다…
난 아직 준비가 안 됐다고요.‘
내 마음의 소리가 들렸는지 내 안의 그녀가 다시 말을 건넸다.
“꼴좋다. 넌 어차피 못해. 그리고 누가 너 같은 초짜를 써주겠어? 다 관둬… 주제를 알아라… 좀… “
나는 그녀가 더 떠들기 전에 채팅 창을 닫고 안방으로 가 쌓여있는 옷장을 뒤적였다.
면접 때 입고 갈 검은색 옷이 필요해서 쌓인 옷탑을 뒤적였다.
와르르르….
휘청이던 옷탑이 무너지는 순간 내 안의 사는 그녀도 그 안에 같이 묻힌 것 같았다.
그녀가 꼼짝 못 할 때 나는 행동 개시를 해야 한다.
“네! 내일 갈 수 있습니다.”
나는 최대한 당당해 보이도록 단어들을 꾹꾹 눌러써 답장을 보냈다.
그리고 휴대폰 네이버 캘린더에 “생애 첫 알바 면접!” “오후 3시/단정한 옷차림”이라고 적었다.
옷탑에 갇힌 그녀가 슬슬 기어 나와 또 허튼 소리로 나를 방해하기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