떨리는 생애 첫 알바 면접을 보고 내가 택한 일은 주방 보조 겸 설거지 알바였다.
면접 볼 때 젊고 표정이 밝으니 홀서빙을 해보면 어떠겠냐는 제안을 받았지만 난 아직 누구 앞에 나설 자신이 없었다.
묵묵히 내 할 일만 하는 것.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오전 알바.
알바를 하면서 가장 힘든 일은 채소를 씻는 일이었다.
종갓집에서 김장할 때나 쓸 고동색 큰 고무대야에 물을 받아 채소를 씻는다. 다음날 쓸 채소를 미리 씻어서 큰 바구니에 가지런히 정렬시키고 물기를 빼 저온 냉장고에 넣어두는 게 나의 아침 미션이다.
이 미션은 계절과 채소의 상태에 따라 시간과 에너지의 소모차이가 심하다. 남들이 보기에는 앉아서 슬렁슬렁 채소 씻는 일이 뭐가 힘들까 싶지만 나는 이 시간이 제일 괴롭고 싫다.
딱딱한 플라스틱 목욕의자에 얇은 등산용 방석을 깔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앉아 채소를 한 장 한 장 씻는 일. 그리고 찢어지지 않게 가지런히 바구니에 차곡차곡 옮겨 담는 일. 한 시간 반동안 허리를 굽히고 앉아 있는 것 자체가 고문이다.
알바를 시작하는 첫날에 나는 상추와 깻잎을 어떻게 씻어야 하는지 몰랐다. 그렇게 많은 양을 씻어본 적도 없었고 어느 정도까지 깨끗하게 씻어야 하는지도 몰랐다.
내가 알바가 처음이라는 걸 안 홀의 책임자인 주임님은 손수시범을 보여주셨데 말 그대로 손이 상추와 깻잎 위를 날아다녔다. 부드러운 핀셋처럼 엄지와 검지를 이용해 살포시, 그러나 기계처럼 착! 착! 착! 상추를 대야에서 건져냈다. 왼손은 하늘로 향해 펼치고 오른손 엄지와 검지로 물속에 잠긴 상추를 들어 올려 왼손에 착착 쌓아 올리면 왼손의 엄지는 높아지는 상추를 떨어지지 않게 살포시 잡아야 했다. 한 손 그득 상추가 쌓이면 네모난 바구니에 상추 머리 쪽을 살짝 세운 후 살짝 기울여 정렬시킨다. 그래야만 상추의 물기가 잘 빠지고 나중에 접시에 놓을 때 상추에 상처가 나지 않게 잘 꺼낼 수 있기 때문이다.
각도를 맞추고 상추와 바구니의 간격에 여유를 맞춰 담아내는 일은 몇 번의 지적을 받고 수정하는 시행착오를 통해 내 몸에 어느 정도 익었지만 상추와 깻잎을 닦는 속도는 쉽게 단축되지 않았다.
아침에 출근해서 상자를 풀었을 때 상추와 깻잎의 상태가 싱싱하면 나도 모르게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절로 마음속에서 우러났다.
미리 며칠 동안 쓸 식재료를 장 봐오기 때문에 매출이 저조한 날이 이어지거나 날씨가 너무 더워서 채소가 얇고 연약 자란 상태면 여지없이 무르고 상한 채소들이 사이사이 섞여있었다. 그걸 일일이 골라내야 하는 날에는 내 단순반복업무에 에러가 발생하는 날이다. 아예 확실히 상한 상추나 깻잎은 작은 바구니에 담아 모아뒀다 버리면 되는데 꼭 애매한 애들이 문제였다.
지금은 괜찮지만 냉장고에서 하루이틀 지나면 물러버릴 것 같이 시들거나 연약한 녀석들은 나를 머리 아프게 했다.
작은 바구니에 담아 버리자니 지금은 멀쩡하고 큰 바구니에 담아두자니 물러서 버릴게 뻔했다. 그런 녀석들은 꼭 앞뒤로 붙어 앉은 친구를 물들이는 불량학생처럼 결국은 주변을 다 무르고 썩게 만든다.
손님 상에 올라갈 채소를 접시에 담는 업무는 주로 주임님이 하는데 주임님은 그런 싹수가 노란 녀석들은 골라서 애초에버리라고 하지만 나는 사장님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한 겨울과 한 여름에는 4kg 상추 한 상자에 십만 원이 넘기도 해서 버려지는 상추 한 장이 내 눈에는 천 원짜리 지폐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 날은 겉이 멀쩡한 깻잎이 문제였다. 푸릇푸릇한 깻잎의 뒷면.
그 뒷면에 노란 모래알 같은 나비들의 알이 수없이 달라붙어있었다.
어쩌다 한 두 알 있는 게 아니라 그날은 나비들이 깻잎 밭에 날아와 동시 출산을 한 것 같았다.
나는 깻잎의 앞면과 뒷면을 번갈아 보며 이 깻잎을 살릴지 말지 고민해야 했다. 평상시보다 두세 배의 시간이 걸렸고 나는 마치 어떤 삶의 난제가 내게 던져진 것처럼 깻잎을 씻으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 고민은 어느새 더 깊숙 이 가라앉더니 내 삶과 오버랩되어 나를 힘겹게 했다.
파릇한 깻잎의 앞면은 아이넷 키우며 시부모님 모시며 사는 착한 며느리라는 번지르르한 내 겉면을 보는 것 같았다. 반면 깻잎의 뒷면에 붙은 수십 개의 노란 나비 알들은 내 삶에 기생하는 크고 작은 고민처럼 느껴졌다. 떼어내려 하면 깻잎에 상처를 남길 수밖에 없고 가만 두자니 알을 깨고 부화한 수십 개의 고민들에 내 삶을 다 갉아 먹힐 것 같은 공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
한숨이 절로 나왔다.
허리 숙여 대야에 고개를 처박고 채소 씻기에 여념이 없는데 아침을 먹자는 반가운 목소리가 들린다.
엉거주춤한 자세 탓에 뻣뻣해서 삐그덕 거리는 허리를 붙잡아 겨우 제자리를 찾아준 뒤 밥상 앞에 앉는다.
갓 지은 따뜻한 흑미밥에 된장국.
다른 건 모르겠고 남이 차려주는 식사가 이렇게 맛나다니. 그것만으로도 알바의 노고가 보상받는 느낌이다.
나는 접시에 놓인 깻잎 한 장을 들어 뒤집어 본다. 깨끗한 깻잎의 뒷면을 확인하고서야 쌈장을 듬뿍 바르고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밥을 올려 깻잎쌈을 완성한다.
이렇게 한 쌈 크게 입안에 넣고서 오물오물 꼭꼭 씹다 보면 누군가의 정성이 들어간 따뜻한 밥과 함께 뒤섞인 내 삶의 고민들이 어느새 잘게 으깨져 흐물거리며 부드럽게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것 같다.
그래, 너무 깊은 고민은 하지 말자. 큰 고민거리도 이렇게 잘게 으깨 씹다 보면 생각보다 쉽게 삼켜지는 날도 오겠지.
앞으로 남아 있는 내 삶은 겉면과 뒷면이 깨끗한 깻 잎 한 장처럼 생생하기를....
그래서 텁텁한 삶을 살아가는 누군가의 입 안 가득 내 이야기가 깻잎 한 쌈이 되어 잠시잠깐 향긋해 지기를.
부디 지친 하루를 견뎌낼 작은 에너지원이 되어 서로가 서로를 일으켜 주길 바라본다.
그런 의미로 입 크게 벌리고 제가 쓴 이야기로 만든 깻잎쌈 한 입 해보세요.
"자~ 크게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