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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그래 Nov 03. 2024

초선이와의 잘못된 만남 1

주방 설거지 알바를 시작하면서 마음에 걸리는 게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주방보조 및 설거지라는 채용 문구 때문이었다.

설거지는 워낙 대식구와 집으로 놀러 오시는 시부모님들의 고스톱 멤버들 식사 챙기기로 단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나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칼질은 영 폼이 나는 정도는 못되었다.

왜 텔레비전에 나오는 이연복 셰프처럼 양파를 다다다다 썰어내는 그런 화려한 칼솜씨는 없었다.

그런데 이런 대형 식당에서는 그런 칼솜씨를 원할 것 같았다.  제발 나한테 칼질만은 시키지 말아 줬으면 기도하며 출근했다.

그런데 그 기도는 며칠 못 가 끝나게 됐다. 주방에 책임 자인 부장님이 내게 중식도를 쥐어준 것이다.

부장님은 아이 둘의 아빠였지만 순하고 어린 외모에 일도 착착 잘하고 무엇보다 어린 직원들의 실수에도 온화 한 성격 좋은 부장님이었다. 연두부처럼 얼굴도 뽀얀데 성격도 보들보들했다.

그런 연두부 부장님이 내게 빨강 도마와 중식도를 들고 와 10킬로그램의 포장 박스에 누워있는 초선이를 소개 시켜 주었다.

나는 그동안 식당에서 봤던 중국산 김치 중에 초선이라는 아이가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됐다. 초선, 초선..... 초선이라는 이름에서 오묘하게 "조선 김치"인척 이름에 점하 나만 붙이고 사람들을 흘리는 초선이와 나는 살짝 대면 대면 했다.

나는 연두부 부장님이 시키는 데로 빨간 고추양념 범벅인 그녀. 그러니까 주름진 빨간 한복치마를 겹겹이 덧입은 여인처럼 얌전히 상자에 누워있는 그녀를 꺼내 그녀의 옷처럼 새빨간 도마 위에 가만히 눕혔다.

그녀를 크기에 따라 가로로 2등분, 3등분 한 후 자근자근 촘촘히 난도질을 하는 게 나의 임무다.

칼질을 할수록 빨간 도마 위로 초선이의 빨간 눈물이 강처럼흐르는 것 같다.

‘미안해 초선아. 칼솜씨 좋은 기술자를 만났으면 덜 너덜너덜하게 최후를 맞이했을 텐데 나 같은 초짜를 만나서 네 몰골이 말이 아니구나.’

이런 엉뚱한 생각을 하다가 그만 "앗" 하는 목구멍 안에서 나오다만 비명이 나를 현실로 데려 왔다.

무시무시한 중식도가 헛생각에 사로잡힌 나의 정신을 제자리로 데려다주는 대신 내 왼손 검지 손톱과 살을 데려간 것이었다.

마치 영화의 중요 장면에 등장하는 슬로모션 화면처럼 내 검지 손톱의 빈자리에 스며 나오는 수십 개의 피가 하나의 핏방울이 되는 순간을 내 눈으로 목도하는 섬뜩한 1, 2초의 시간.  그 몇 초가 이렇게 아득하게 멀고 길게만 느껴지다니.

너무 놀라면 비명도 나오다 만다.

너무 당황하면 뭘 해야 할지도 뇌가 까먹는다.

나는 순간 이 상황을 누구도 모르게 한다는 생각에 사로 잡혀서 온통 빨간 색인 이 사건현장을 수습하려 했다.

빨간 도마, 빨간 초선이, 빨간 내 손톱밑 살.

사건이 벌어진 도마 위 초선이의 일부를 재빨리 싱크대 배수구에 유기하고 왼손 검지를 움켜쥔 채 휴지를 뽑아 새어 나오는 피를 막았다.

반창고를 찾으면 누군가가 내가 다친 걸 눈치챌 것이고 나는 현장에서 검거되어 초짜 칼잡이의 낙인이 찍히는 불운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없는 말도 만들어서 팔만대장경을 만드는 홀 이모들에게 이렇게 먹잇감이 될 수는 없어. 그것만은 안돼.’

나는 휴지가 빨갛게 젖어가는 검지 손가락에 주방 랩을 찢어감쌌다.  고등학교에서 배운 붕대법 따위는 지금 이 순간에는 아무 쓸모가 없다.

랩으로 감싸 퉁퉁해진 손가락을 가리기 위해 검정 니트 릴 장갑을 다시 끼며 생각했다.

‘위험할 줄 알면서 최소한의 대비도 안 한 건 나야. 속장

갑을 끼고 니트릴 장갑을 꼈어야 해'  나는 머릿속 메모 장에 김치를 자를 땐 필히 속장갑을 착용하고 그 위에 주방 장갑을 낄 것. 절대 칼을 잡고 허튼 생각하지 말 것. 이렇게 적어 두었다. 훗날 메모가 하나 더 추가되는데 칼질을 하면서는 절대 옆사람과 수다 떨지 말 것. 이 메모가 추가 됐다는 건 결국 또 이런 출혈 사태가 내게 다시 벌어졌다는 의미다.

피도 멈추고 사건 현장도 처리하고 모든 게 완벽하게 마무리됐다고 생각하던 중 뭔가 뒤가 찜찜했다. 마음이 자꾸 쓰였다.

나는 싱크대에 흘러 보낸 초선이가 아닌 잘려나간 내 손톱의행방 이 갑자기 궁금해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손톱이초선이와 함께 하수구로 쓸려 갔는지 칼질하는 순간 튀어 나가 다른 초선이들 속에 섞였는지 불분명했다.

나는 순간 머리가 띵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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