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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그래 Nov 17. 2024

허드레꾼의 DNA와 DJ본능

나는 무식할 정도로 단순, 반복 업무를 좋아한다.  


신이 나를 만들 때 식곤증으로 깜빡 졸다가 내 몸을 구성하는 요소 중 “단순함” 하나만 넣어준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나는 아메바 같은 생물체다.


머리를 쓰지 않고 기계처럼 움직이는 일을 한다는 건 내 어린 시절 (물론 지금도) 꿈이었다.


커다란 컨베이너 벨트 앞에서 작은 부속품 나사를 같은 자리에 돌려 꼽는 일이라던가  색깔이 다른 부품을 찾아내 바구니에 담는다던가 하는 일.  하지만 생활의 달인에 나오는 재활용 쓰레기 분리수거는 좀 어려워 보였는데 그건 머릿속에서 플라스틱, 유리, 고철, 종이, 그 외의 것들로 머리를 써서 순식간에 분리해야 하는 초고난이도 업무처럼 느껴졌다.  난 아직도 그분들의 신들린 손놀림과 속도감이 경이롭다.


내가 꿈꾸는 단순 반복 업무에는 한 가지 조건이 있었는데 바로 광고 없는 음악을 내 취향껏 고막에 피가 나도록 들을 수 있을 것! 이였다.   하지만 공장이나 업장에서는 대부분 라디오를 틀어주는데 나는 라디오에서 나오는 광고를 진절머리 나게 싫어했다.   남편 채소농장에서 일할 때도 하루 10시간 가까이 라디오를 틀었는데 일하시는 할머님들과 취향의 주파수가 맞지 않아 라디오를 듣는 그 순간이 때론 고통스러웠다.


요즘 MZ세대들이 음악을 들어야 업무 효능이 높다며 이어폰을 꽂고 일하는 걸 꼬집는 블랙 코미디를 보며 나는 모든 직장, 회사에서 업무시간에도 눈치 보지 않고 당당하게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청취 권리’를 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음악적인 요소가 노동의 효율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아! 물론 이어 플러그를 끼고 아무것도 듣지 않을 권리도!  (그게 특히 상사의 잔소리라면 더더욱)    


그런 입장에서 생각해 볼 때 나의 저녁 알바는 그 조건을 조금 충족해 주는 감사한 곳이다.


홀 알바를 시작한 첫날에 사장님께서 주문받는 법과 포스기 조작법을 알려주셔서 살짝 긴장했다.  사장님은 듣고 싶은 노래 틀어도 좋다며 유튜브로 노래 트는 법을 알려줬는데 ‘이게 바로 직원 복지구나!’하고 감격했다.   그 순간 나는 사장님이 정말이지 알바생의 복지에 혁신을 주도하는 스티브잡스처럼 느껴졌다.


내가 투잡으로 일하는 오후 알바는 고깃집이라 손님의 연령층과 계층이 다양한데 나는 평일 알바생이자 매장의 홀 매니저로서 이곳의 비공식 DJ도 겸하며 그때그때 그 분위기에 맞는 음악을 선정해 틀어주고 있다.   


나름 최소한의 양심은 있기 때문에 내가 좋아하는 음악 10%, 고깃집에 알맞은 신나는 댄스히트곡메들리 70%, 고객 연령층 맞춤 노래 20%를 골고루 튼다.


노래를 틀 때도 분위기 파악을 잘해야 하는데 제아무리 명곡이어도 요즘 같은 비수기에는 발라드 이어 듣기는 거의 금기사항이다.  조성모, 버즈, 성시경이 매장에서 마이크 들고 콘서트를 연다고 해도 당장 쫓겨날 분위기다.  이럴 때는 어쩔 수 없이 철 지난 히트곡메들리를 들어야 한다.  안 그래도 더위와 습기로 고깃집 매출이 바닥을 치는데 노래까지 쳐지면 매장 분위기와 직원들까지 물 먹은 솜처럼 몸과 마음이 무거워진다.   


그렇다고 신나는 노래라고 다 좋은 것도 아니다.  최신 히트곡은 사장님이랑 직원들 연령대가 40대 정도라 별로 감흥을 못 느낀다. 이럴 땐 우리가 한창이었을 젊은 시절 노래를 튼다.  추억의 히트곡메들리 속에는 우리들의 청춘이 있다.  그 시절 그 노래를 흥얼거리며 우리는 에너지를 끌어올린다.  


사장님 내외는 고기 손질을 하고 나와 주방 알바 동생은 테이블과 주류 냉장고를 닦는다.   분무기에 담은 소주를  물총 놀이하듯 리듬감 있게 뿌려가며 닦을 곳 없는 곳을 닦고 또 닦는다.  손님이 오길 바라는 일종의 염원을 담는 의식처럼 둥근 스텐테이블을  무념무상으로 빙글빙글 돌며 행주질을 하다 보면 마치 손님 테이블이 하나의 커다란 턴테이블처럼 느껴진다.   이 턴테이블에 수많은 사람들이 스쳐간다.  


삼삼오오 모여 앉아 웃고 이야기하고 울다 싸운다.     행주를 쥔 내 손이 어느새 턴테이블에 올려진 LP판의 소리골을 읽어내는 바늘이 되어 둥글게 원을 그리며  그들의 고단했을 삶을 읽고 읽는다.   나는 그들이 남기고 간 삶의 흔적과 얼룩을 깨끗이 행주질한다.  그리고 흘러나오는 쿨의 “해변의 여인” 노래를 작게 따라 부르며 주문을 건다.      


“빨리 떠나자~~~ 야이 야이 야이 야이 바다로~ 그동안의 아픔들 그 속에 모두 버리게~~~”

그나저나 이 노래처럼 모두 여름휴가를 바다로 떠났나?  손님도 없고 노래가 눈치도 없다.

사장님의 한숨 소리가 텅 빈 매장에 밀물처럼 밀려온다.   


내가 빨리 떠나라고 해서 손님들이 다 떠난 건 아닐 테지만 쪼금은 찔리는 32도 한 여름,  깨끗하게 청소한 시원한 매장에서 우리는  “인생의 고비에는 고기를 먹자 “라는 신념을 갖고 있는 첫 손님을 간절히 기다린다.


드르륵…..


“어서 오세요~~”  


인사를 하며 고개를 끄덕인 우리는 말하지 않아도 서로가 동지임을 안다.


더운 셔츠차림의 그도, 앞치마 차림에 나도 속으로 반갑게 동시에 외치는 것 같다.


‘야, 너도 휴가 못 가고 일하는 신세냐?’


물병에 맺힌 찬이슬이 테이블을 적시고 시원한 물 한잔이 벌컥벌컥 삶의 갈증을 삼킬 때 비로소 멈춰있던 턴테이블은 새로운 손님의 하루를 천천히 플레이한다.   


그의  삶이 설익거나 너무 뜨거워 빠짝 타들어가지 않게…

모든 부분이 서서히 골고루 익어가기를,

그리고 삶도 고기도 천천히 꼭꼭 씹어 충분히 음미할 수  있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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