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나의 왼쪽 검지 손톱의 일부. 그 앙큼한 녀석이 손님들 국수 그릇에 초선이와 함께 올라가 있는 생각을 하니 머릿속이 국수 면발도다 더 뽀얘졌다.
순간 홀 담당 주임님의 아찔했던 일화가 떠올랐다. 손님 한 분이 목구멍에 철수세미가 걸린 것 같다며 소동을 부려서 같이 병원 가서 검사를 받고 이상이 없었지만 위로금까지 쥐어주고 돌아왔다는 이야기.
나는 두고두고 회자될 “손톱 사건”의 주인공이 되어 이모들 입에 오르내릴 생각을 하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무엇보다 그런 상황이 벌어진다면 불같이 화를 낼게 뻔한 사장님의 굳은 표정과 돌고래 보다 높아질 목청에 내 고막도 심장도 남아나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천근만근 마음이 무거웠다.
소심한 극 I, 내향인이자 소문자 a의 혈액형을 가진 나에게는 너무 크나큰 시련이었다. 이런 손님과의 썰의 처연한 주인공이 되는 건 내 알바 인생 대본에는 없던 에피소드인데. 이를 어쩌지? 난 머리가 아팠다.
집에 가서도 온통 초선이와 잃어버린 손톱 생각만 났다.
잘려나간 손톱 조각이 김치에 섞여 들어가 손님 국수 위 고명 위로 올려질 확률이 몇 퍼센트일지 셈을 해봤다.
우선 김치통에 섞여 들어가거나 안 들어가거니의 반반의 확률. 만약 들어갔다면 중국 김치 초선이와 함께 손님 국수 그릇에 들어갈 확률, 들어갔더라도 국수 국물에 가라앉아 빈그릇과 함께 내 설거지통으로 돌아올 확률과 손님 입안에 들어가서 삼켜질 확률과 뱉어질 확률.... 뱉어 낸 손님이 별말 없이 넘어갈 확률과 컴플레인을 걸어 식당이 난장판이 될 확률. 그 손톱의 주인공이 나라는 게 밝혀질 확률, 밝혀졌을 때 뭐, 그럴 수 있지 하며 넘어갈 확률과 위로금을 물어주고 알바에서 잘릴 확률 등... 뭐야, 왜 이렇게 경우의 수가 많은 거지? 도대체 행방불명된 내 손톱은 어떻게 되는 거지? 앞으로의 내 알바 인생은 이렇게 끝나는 건가?
나는 왼손을 펼쳐 가지런한 다섯 개의 손톱을 바라봤다.
네일숍에서 급하게 인조 손톱을 덧대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것 같았지만 내 마음은 떨어져 나간 살점처럼 너덜너덜했다.
누워도 잠이 오지 않았다. 채 썰어 놓은 초선이를 다 쓰려면 최소 손님 200명은 왔다가야 한다.
일주일이 너무 길다. 설거지를 하는데 온통 서비스로 나가는 김치국수에만 신경이 쓰인다. 빈 그릇으로 돌아오는 국수그릇과 이모들의 극대노가 없는 걸로 봐서는 아직 사건은 벌어지지 않았다.
원래 범인은 사건현장을 배회한다고 했던가? 나는 그 마음이 이해가 갔다. 괜히 식재료 냉장고에 들어가서 썰어놓은 김치가 몇 통 남았는지 확인했다. 알바하는 하루 다섯 시간이 꼭 의자 들고 벌서다 집에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나의 허튼 생각은 끝도 없는 네버엔딩으로 이어져 마침내 내 손톱이 국과수에 보내지고 DNA 추출로 나라는 게 밝혀지면서 손님과 사장님의 소송에 휘말려 그동안 받은 알바비를 탈탈 털어 변상하고 알바에서 잘리는 상상까지 이르렀다.
경찰들은 나의 아이폰을 압수해서 디지털 포렌식을 시도해 네일숍 사장님과 내가 주고받은 메시지와 사진을 찾아낼 것이다. '아.. 내가 너무 신중하지 못했어. 잘라진 손톱 사진은 찍지도 보내지도 말았어야 하는데.
역시 초행범은 뭔가 미숙해서 덜미가 잡히는 거야...'
나름 어려서 읽었던 셜록홈즈 시리즈에서 터득한 범죄자의 알리바이나 증거인멸은 사실 이런 실전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허튼 생각이 내 뇌의 세포들을 99%쯤 지배했을 때 비로소 채 썬 초선이는 손님들 뱃속으로 사라지고 새로운 초선이가 붉은 도마에 눕혀졌다.
나는 두툼한 면장갑을 끼고 그 위에 검은색 니트릴 장갑을 낑겨서 꼈다.
그리고 서두르지 않고 신중한 칼질을 했다.
초선이를 처음 만나던 날 뭔가 그럴듯해 보이고자 손에 익지도 않은 칼질로 덤빈 내가 바보같이 느껴졌다.
'어설퍼 보이면 어때, 좀 느리면 어때, 나는 어차피 초보인데'
나는 호된 알바 신고식으로 주부경력 23년 차라는 어깨뽕을 빼냈다.
이번 일을 계기로 허드렛일도 허튼 생각도 1단계 레벨 업된 느낌이다.
갑자기 귓가에 "알바 경험치 +100 이 올랐습니다."라는 게임 속 멘트가 들려온다.
이런 끝없는 나의 허튼 생각은 내가 생각해도 생각할수록 어이없지만 힘든 허드렛일을 버티게 해 주는 박카스 같은 존재임에는 틀림없다.
오늘도 수고한 나와 이름 모를 누군가에게 나의 '허튼 박카스' 한 병뚜껑 따서 건네 본다.
부디 벌컥벌컥 들이키고 늘그래라는 카페인에 중독되길!